베를린 장벽은 분단 시 동독이 서베를린을 둘러싼 장벽을 말한다. 지금은 없어져 베를린 시내 포츠담 광장,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등 이곳저곳에 잔해만 남아 있다.
1. 장벽이 세워진 이유
전쟁이 끝나고 독일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전승 4개국은 동독의 한가운데 있는 베를린도 수도였다는 중요성을 고려하여 4개 구역으로 나누어 점령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서방 연합국이 점령한 지역을 서베를린, 소련이 점령한 지역을 동베를린으로 불렸다.
동독 주민들은 소련이 점령한 동독에서는 미래가 없다고 판단하고, 서베를린을 통해 서독으로 끊임없이 탈출하였다. 탈출 인원이 무려 연평균 23만여 명이었다. 해마다 23만 명의 도시가 없어지는 것과 같았다. 동독 정권은 탈출자들을 그대로 방치할 경우 동독의 미래가 위태로워질 것으로 판단하고 대책을 강구했다. 대책은 서베를린을 장벽으로 둘러싸는 것이었다.
2. 장벽 축조
1961년 8월 13일 새벽 0시를 기해 동독 정권은 서베를린 주위를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7,000여 명의 군인들로 하여금 시 경계선을 지키도록 하였다. 점차 철조망을 걷어내고 육중한 콘크리트 장벽으로 둘러쌓았다. 그 길이는 무려 167.8km였고, 동·서베를린의 경계선에 세워진 장벽의 길이는 43.1km다. 탈출이 어렵도록 장벽을 높게 했고, 300여 개의 감시초소도 운영했다. 탈출자에 대한 발포도 허용했다.
장벽 축조로 독일의 분단은 더욱 굳어졌다. 서독 주민들은 통일에 대한 가느다란 희망도 사라졌다고 느꼈다. 동서 냉전은 더욱 거세졌다.
3. 140명의 희생자
장벽이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동독 주민들의 탈출은 계속되었다.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까지 28년 동안 베를린 장벽을 넘어 탈출하다가 140명이 숨졌고, 3,000여 명이 체포되었다.
4. 장벽의 붕괴
베를린 장벽은 독일 분단의 상징이었다. 20세기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다.
동독의 호네커 서기장은 “베를린 장벽은 앞으로 50년 내지 100년은 더 존속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서독 총리를 역임한 헬무트 슈미트조차도 “내 생애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라고 할 정도로 베를린 장벽이 쉽게 붕괴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처럼 무너질 것 같지 않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89년 가을 동독 주민의 평화혁명이 성공하며 동독 정부가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을 개방하며 주민들에게 서베를린으로의 자유로운 통행을 허용한 것이다. 장벽이 세워진 지 28년 만이다.
동독 정권이 장벽을 세워 주민의 삶을 강제로 막았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에는 붕괴된 것이다.
남북한을 휴전선이 가로막고 있다. 휴전선이 견고해 보이나 언젠가는 붕괴될 것이다.
- 이 글은 작성자의 동의하에 독일 정치 문화 연구소의 글을 공유한 글입니다.
- 작성: 손선홍 전 프랑크푸르트 총영사
ⓒ 구텐탁코리아(http://www.gutentag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