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벌레들의 오마주 책, <책 산책가>-
나의 유년시절, 책은 부모님이 권장하는 안전한 놀이터였다. 책과 함께 있으면 어느 누구도 건드리지 않았다. 삼성당에서 출간한 세계명작동화나 위인전집도 기억이 난다. 당시 방송사 기자였던 사촌이 미국이민을 가면서 버려둔 책들과, 엄마가 아는 책 외판원들이 강매로 놓고 간 책들이 즐비했다. 눈에 보이는 게 책이니 펼칠 수밖에 없었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배꼽시계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당시 마당에는 우리집 진돗개의 밥을 짓는 가마솥이 있었다. 저녁 무렵 개밥을 끓이고 남아 있는 불씨가 있으면, 엄마는 석쇠를 놓고 그 위에 몇 토막의 갈치를 올려놓았다. 지글지글 익는 소리와 고소한 비린내는 집 나간 식욕도 불러들였다. 그날 엄마는 방안에 있던 나에게 “딸! 조금 있다 갈치 좀 뒤집어!”라고 외친다. 나는 엉겁결에 대답하고는 읽고 있던 책 속으로 다시 기어들어갔다. ‘나 잡아먹수!’라고 외치는 갈치의 아우성을 뒤로 한 채, 눈은 책에 고정되어 감각과 인식이 자연히 분리되었다. 결말은 유쾌하지 않았다. 식탁의 주인공으로 등장해야 할 갈치는 검은 숯덩이로 변해 뼈도 추리지 못했다. 잠시 후 엄마는 화가 나서 내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하지만 다소 진지하고 천진난만하게 책을 읽는 내 모습을 본 엄마는 잔소리를 하려다 멈칫 한다. 잠깐의 거친 호흡 후에 이내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시곤 조심스럽게 문을 닫는 것이다. 하하, 그 이후 책이 나를 구원해준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방법을 종종 활용하곤 했다. 책은 이렇듯 나에게 안전한 도피처였던 셈이다. 어찌되었든 습관처럼 꾸준한 책읽기는 책쓰기 뇌의 전환을 가져왔고, 나를 현재의 작가로 만들었다.
최근 재독 한인 중장년을 대상으로 <위로의 그림책> 수업을 했다. 모인 이들이 처음에는 ‘그림책은 아이들이 읽는 책이 아니냐’며 의아해했다. 하지만 참여할수록 그림책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그림책을 읽으며 자신의 인생 내러티브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단순한 책읽기를 넘어 치유와 위로의 경험이었다.
책은 마법처럼 마음을 다스린다. 장르를 불문하고 독자의 마음 속에서 새롭고 다양하게 태어난다. 때론 작가 영혼의 파동이, 독자에게 시시각각 다르게 전달된다.
“나는 책을 너무 좋아해서 태우진 않아. 하지만 겨울에 너무 추워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면 그때는 태워서 몸을 녹일 수는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하면 책이 생명을 지킬 수 있거든. 책은 여러 방식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지. 마음도 녹이고 위급한 상황에서는 몸도 녹이고 말이야.”
독일 쾰른 출신 작가 카아스텐 세바스티안 헨(Carsten Sebastian Henn). 그의 소설 <책 산책가/Der Buchspaziere>에 나오는 내용이다. 작가는 문학과 삶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체감적 글쓰기로 유명하다. 그는 와인산지로 알려진 테라센 모젤의 포도밭을 경작하며 닭과 벌을 키우고 고양이들과 살고 있다. 실제로 농사를 짓다 생각나는 글감을 소설로 담아낸다고 한다. 이 소설을 읽고 있으면, 작가가 사는 마을풍경이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책 산책가>는 작은 마을에 위치한, 암 슈탓토어(Am Stadttor) 서점에서 일하는 배달사원 칼 콜호프를 둘러싼 이야기다. 칼에게는 책으로 관계를 맺은 고객들이 세상의 전부이고, 그들도 칼이 전해준 책으로 세상과의 소통을 이어나간다. 커다란 배낭 안에 마을 고객에게 어울리는 책을 고르고 정성스럽게 포장해 직접 전달한다. 하지만 나이든 칼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 서점을 3년 전부터 맡게 된 새로운 여주인 자비네 그루버. 원 주인이었던 구스타프 그루버의 딸로, 디지털에 익숙한 세대답게 직접 우송보다는 온라인 주문 시스템을 만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칼은 책을 파는 것을 넘어, 사람을 만나 온기를 전하는 책돌봄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는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는 어울리지 않지만, 대면소통의 힘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은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빠름의 법칙 속에서 느림의 미학을 구현하는 처절한 몸부림 같다. 마을의 고객들은 칼이 추천한 책을 읽고 간단한 소감을 나눈다. 하지만 칼도 점점 나이 들어가며 힘이 든 건 사실이다. 그때 반짝이는 별처럼 구원투수가 나타난다. 바로 아홉 살짜리 샤샤. 자신을 오래된 진공관처럼 낡아버렸다고 생각하는 칼에게 샤샤는 새로운 동기부여를 선물한다. 자신의 정원에 스스로 갇혀 살던 마을 고객들은 칼과 함께 온 어린 소녀의 재치와 입담에 또다른 생각의 창을 열게 된다. 샤샤의 등장은, 이국 땅에 정착자로 적응되어버린 내 삶에 새로운 울림이 필요하다는 조언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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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나 소설에는 갈등이 늘 존재하듯 샤샤 아버지의 반대에 봉착한다. 급기야 칼은 샤샤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한 후 병원 신세를 지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서점에서 해고된다. 하지만 샤샤의 끈질긴 노력으로 소녀의 아버지와 오해가 풀리면서 소설은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책은 이때도 해결사 노릇을 한다. 칼은 샤샤 아버지에게 구타를 당했을 때, <산적의 딸 로냐>라는 책을 그의 호주머니에 넣어준다. 나중에 그가 책을 읽고, 딸과 책 배달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이 소설의 각각 소제목은 실제 소설책 제목으로, 마을 고객들에게 배달한 책이다. 할도르 락스네스의 <독립한 민중>,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스탕달의 <적과 흙>, 찰스 디킨즈의 <위대한 유산>, 장 폴 사르트르의 <말>, 에른스트 블로흐의 <흔적>, 루이 페르디낭 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 게다가 칼은 마을 고객들의 이름을 본명이 아닌 자신만이 생각한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으로 지어 부른다. 아마릴리스 수녀, 에피 브리스트, 파우스트 박사, 책읽어주는 남자, 헤라클레스, 롱스타킹 부인 등등. 이 책의 제목인 ‘책 산책가’는 샤샤가 칼에게 지어준 별명이다. 이외에도 작품 안에서 다양한 책을 소환한다. 그것은 독자들에게 또 다른 연쇄독서의 충동을 불러일으킨다. 책을 읽으면서 또 다른 책의 문을 열게 되는 것이다.
“모든 책에는 심장이 있는데 누군가가 읽기 시작해야 뛰기 시작해. 읽는 사람의 심장과 연결되기 때문이지”
이 책은, 걷는 행위인 산책과 책을 매개로 빠른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천천히 사유하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산책을 하듯 첫 장을 열고 마지막 책장을 덮는다. 삶에 쉼이 필요한 이들에게 칼과 샤샤의 손을 잡고 걸으라 주문하고 싶다.
연강작가: 독일 베를린에 거주하며, 글쓰는 일을 합니다. <나는 파독간호사입니다>,<흔적>,<독일교육 성숙한 시민을 기르다> 외 집필. 희곡 <베를린에서 온 편지>, <칭창총 소나타 No.1>,<유리천국> 외 다수의 저작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한독문학공간(KD_Litkorea) 대표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