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살 땐 돈을 벌고 번 돈을 쓰는 삶이 전부였다. 일을 하지 않는 나머지 시간을 ‘돈 없이’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돈을 버는 데 쓰고, 나머지 시간의 팔 할은 육아로 투입된다. 주중 모든 시간을 해야 하는 일과 육아로 채우고 나면, 심리적 보상과 휴식에 대한 욕구로 갈증이 심해진다. 남은 건 한풀이 소비 활동 – 핫플레이스에 가서 화려하게 맛깔스러운 브런치를 먹어주고, 그다지 필요하지 않지만 더 그럴듯한 소비재로 허전함을 채워주고, 키즈 카페나 아이들 체험 활동에 수만 원씩 소비하며 주말 시간이 흐른다. 돈을 매개로 한 경제 활동이 주말 시간을 다채롭게 꾸려주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리 만족감을 주진 못했다. 내가 벌어 소비를 하는데도 삶의 질을 약간 높였을 뿐, 자존감 형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돈을 생략하고도’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능력이 필요했다. 그런 능력이 내 삶에서 오랫동안 누락되고 있었고, 그걸 깨달은 것이 독일에서 체류하는 동안 얻은 정신적 소득이다. 집 주변에 하이킹을 하기에 최적의 산, 숲, 호수가 즐비한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얻어졌으니, 운이 따랐다.
독일 알프스 산이 아름다운 호수와 교회 첨탑을 너그럽게 감싸듯 내려다보고 있고, 사람들은 낡고 오래된 나무집에서 쉬고 소 떼들은 심드렁하게 풀을 뜯는다. 그냥 앞을 바라볼 뿐, 돌이 많고 경사가 급한 곳을 오르내리며 다리 근육과 심장이 제 할 일을 하게 하고 기타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이게 내 심박동과 폐활량의 최대치인가 포기하고 싶다가도, 몸을 휘돌아감싸며 스쳐가는 바람과 눈앞에 펼쳐지는 전경이 앞 길을 유도한다. 정복에 대한 욕구가 그다지 없어 그냥 나아갈 뿐, 단순한 신체 활동에 몰입하며 몸의 감각 자체에 집중한다.
돈의 필요와 소비 욕구가 가장 우선이었는데, 사는 환경이 달라지면서 내 욕구와 정체성이 변한다. 돈을 벌지 못하고 있으니 돈을 적게 쓰는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지 고민한다. 돈벌이가 되지 못하는 경험에 세상의 시선을 벗어난 의미를 부여하고, 돈이 중요한 매개가 되지 않는 삶의 서사를 써 내려간다. 다른 장소와 사회에 와서 다른 경험을 하면서, 예전 나의 스토리에서 고갈되었던, 시간을 온전히 누릴 수 있는 능력과 상상력이 재생된다.
사회 통념상 가격표가 없는 노동을 하며 넘치는 시간에 불안해하면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뚜렷한 정체성을 증명해 보이고 싶은 욕망은 다시금 돈으로 수렴될 뻔한다.
주목받지 못하는 글을 쓰거나 당장 생업에 도움이 안 되는 공부를 하거나 쓸데없이 사진을 잘 찍어보고자 하는 모든 잉여적 행동들은 돈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가격이 매겨지지 않는 일을 하고 있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중이다. 환자를 진단하고 치료하고 질병을 공부하는 일 외에도, 먹고사는 생업에 의지하는 것 말고도 세상의 다른 결을 고루 돌아보는 사람이 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현재는 그럴듯한 명함이 없지만, 지금 관심을 보이는 잡다한 것들이 언젠가 더 큰 그림을 그려줄 것이라 믿으며 그것이 꼭 그럴듯한 돈과 지위로 환원되지 않아도 괜찮다. 산만하고 잡다하여 방향성이 보이지 않지만, 하나의 직업만이 나의 정체성을 설명한다면 아쉬울 것이다.
하이킹은 언뜻 단순해 보이지만 여러 결이 있다. 속도를 스스로 조절하고, 내가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범위를 정하기도 하고, 너무 힘들면 적당히 자르다 예상 범위 이상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번잡하지 않은 환경 덕에 몰입할 수 있고, 시간도 금방 흘러간다. 내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이 활동이 집중감과 재미를 주니, 돈이 매개가 되는 경제활동이 만든 빈틈을 메꿔준다.
일의 효율성이 그렇게 좋지 않았던 사람이 휴식을 오랜 기간 불편해하고, 쉼을 게으름으로 치부해왔다. 뭘 그렇게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하려고만 했을까. 현실의 층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지만, 돈이 중심이 되던 삶의 방식의 축을 살짝 틀고 벗어나니 다른 삶도 보이더라, 균형이 그렇게 찾아질 거라 믿는다. 고삐를 풀고 느슨하게 살면서 만들어 놓은 삶의 여백이 제 기능을 할 것이다.
- 작가: 익명의 브레인 닥터 / 의사
말보다 글로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13년 차 신경과 의사입니다. 우연히 코로나 시대의 독일을 겪는 중입니다.
- 본 글은 익명의 브레인 닥터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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