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메르켈 총리는 현재의 Lockdown 지침을 더 촘촘히 강화하면서 2월 14일까지 기간을 연장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마스크 기준을 한국 KF94와 같은 FFP2로 바꾸는 것, 재택근무를 더 활성화시켜 대중교통 이용을 극도로 자제하는 것 등이 추가 사항이다. 이유는 모르나 지난 3-4월과 다르게 독일의 감염 빈도는 좀처럼 줄지 않고 있다. 아직도 대부분의 주에서 10만 명당 감염자 수가 100명이 넘는다.
자발적이자 비자발적인 은둔 생활이 2021년의 시간조차 빠르게 잠식해 들어가고 있다. 그래도 오늘까지 백신 1차 접종자가 120만 명이 넘었다는 점이 희망을 주고 있다. 벌써 일 년, 코로나는 되도록 빼고 지난 일 년을 되짚어보는 중이다.
때때로 친구들, 선후배와 연락을 주고받는다. 대부분이 내가 유럽에서 사는 것을 부러워한다. 어느 지역에서나 갇혀 사는 시대이지만, 그래도 덜 익숙하고 덜 지루하고 좀 더 이국적인 곳에서 감금 생활을 하는 것이 낫다는 이유다. 지인들 대부분이 병원에서 근무한다. 병원은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직장 환경이다. 20년 가까이 병원에서 맴돌다 보니 인간관계의 반경도, 활동 반경도 좁아졌다. 휴가 기간은 일 년에 5일에서, 길어야 7일이니 덩달아 휴가지 반경도 좁아졌다. 일 년에 일주일 휴가로 꿈도 꿀 수 없었던 유럽행이 결정되어 독일에 거주하기 시작했지만, 그리던 유럽 일주는 물 건너가고 독일 생활은 서울 라이프의 연장선이 되었다.
2020년 3월 독일에서 첫 lockdown이 시작되던 바로 그 날, 한 도시에 정착하였다. 부동산 중개인이 손소독제로 열심히 버무린 열쇠 꾸러미를 건넸다. 모든 출입구마다 번호를 누르던 서울 시민이 처음으로 뜨악했던 부분이다. 현관문, 아파트 일층 출입구, 주차장 출입구 모두 열쇠로 여는 아날로그식이었다. 열쇠를 분실하거나 챙기는 걸 깜박 잊을까 봐 항상 신경 써야 했다. 두 번째 충격은 매우 협소한 주차장 공간과 기계식(복층) 주차 시스템. 위층에 주차 장소를 배정받았는데 주차를 하고 올려보니 자동차 천장이 주차장 천장을 뚫을 기세였다. 출입 통로를 빠져나갈 때 사이드 미러와 양쪽 벽과의 거리가 5cm 정도밖에 남지 않아 자동차 옆구리 흠집 여부에 초예민해져야 했다.
가장 빈번히 드나들기 시작한 곳은 마트와 빵집이다. 한국에서 ‘유기농’하면 만원이 훌쩍 넘고 카트를 조금만 채워도 20만 원은 우스웠는데, 여기는 저렴하고 신선한 ‘Bio’ 천국이었다. 손이 자주 가는 식자재들의 가격이 오천 원 안팎으로 가격이 형성되어 있었고, 식료품의 종류가 다양해서 요리를 위해 쇼핑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외식 비용보다 장바구니 비용이 훨씬 저렴하여 집에서 요리하여 먹을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유럽이 환경 보호 정책에서 선진적이라는 정도만 알고 있는데, 확실히 플라스틱과 비닐 포장률이 낮아 보였다. 어떻게 보면 제품 보호가 허술해 보일 정도로 종이와 유리 의존도가 높았다. 빈 생수병이나 맥주 캔 등을 기계 수거함에 넣어 일정 금액을 현금으로 교환하는 pfand 시스템이 있다. 기껏 열심히 pfand를 해서 영수증을 받아놓고 마트 계산대에서 제출하는 걸 깜박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괜찮은 재활용 유인책이라 생각한다.
유럽의 식수에 석회질이 많다는 얘기에 생수를 사다 마시다가, 매번 사다 나르는 것도 빈 병이 집에 쌓이는 것도 pfand를 하는 것도 귀찮아져 현재는 수돗물을 필터 없이 그냥 마시고 있다. 알프스에서 내려오는 깨끗한 물이라는 현지인들의 말을 믿고 있고, 마시자마자 흡수가 쫙 되는 게 물 맛이 참 좋고 냄새도 없다.
한국에선 아침부터 무조건 밥심이었는데, 여기서는 빵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커피 부심, 독일 사람들은 빵 부심이 있다. 독일의 건강빵은 잡곡밥처럼 거칠면서도 씹을수록 고소한 풍미가 느껴지는 말 그대로 건강한 맛을 선사한다. 각종 스프레드나 잼과 조화를 이루어 매일 먹어도 새로운 맛이다. 빵집은 오전 7시부터 오픈을 하는데, 빵집 앞에 줄을 서 개인 빵 바구니에 커다란 건강빵을 하나씩 담아 가는 게 이방인에겐 구경거리였다. 건강면에서 대척점에 있는 프레츨도 즐겨 먹고 있다. 베이글과 닮았는데 모양새에 비해 훨씬 쫄깃하고 고소하고 짭짤한 맛에 중독된다.
독일에서 카페를 많이 가보진 않았지만 카페 커피는 생각보다 대단한 감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같은 에스프레소라도 이탈리안 에스프레소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활비를 아끼자고 커피는 주로 집에서 해결했지만, 카페가 고플 땐 이탈리아 사람들이 운영하는 아이스크림 카페에 가서 에스프레소와 아이스크림을 함께 먹었다. 봄에서 가을까지 열심히 장사를 하다 겨울에는 본국으로 돌아가 잠시 장사를 쉰다고 한다.
자전거가 일상인 문화. 출퇴근과 등하교에 자전거가 필수이다. 자전거 도로가 보행자 도로와 1:1로 나뉘어 있다. 일반 자전거도 많지만 자전거 앞 혹은 뒤에 유모차 겸용 수레 같은 걸 많이들 달고 다닌다. 자전거 뒷 자석에 유아 전용 카시트를 달고 다니는 경우도 많다. 수레엔 어린이들이 1명에서 3명까지 오순도순 탄다. 세 살 전후의 어린아이들도 페달 없는 밸런스 자전거를 쌩쌩 잘 탄다. 조심스럽고 긴장하는 기색이 없이 씩씩하게 혹은 거칠게 주행한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자전거를 이용하여 이동한다.
비가 쏟아져서 우산이 필요한 정도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빠랑 나란히 자전거를 타며 이동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독일 가정교육 문화가 궁금해진다. 놀이터에서 혹은 마트에서 옆 눈길로 구경하기로는, 위험할 것 같은 상황인데 ‘당장 그만둬’라고 말하기보다 시간차를 두고 지켜보는 경우가 많았다. 어릴 때부터 몸을 거칠게 놀리고, 일찍 집에 귀가하여 저녁 8시부터 방에 들어가 잘 준비를 하고, 학원 문화가 없고, 14살부터 집에서 음주를 배우며 생활 철학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문화가 국력의 기본이 되나 보다.
아이들의 근력이 눈부시다. 놀이터가 중요한 지역 시설이자 아이들 체육 시설이다. 일정한 거리마다 다양하고 재밌는 나무와 흙 놀이터가 많다. 놀이터의 클래스가 다르다. 체력 단련장에나 있을 법한 로프 시설이 많은데, 근력과 유연성 균형 감각을 키우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더럽게 뒹굴거리면서 논다. 기어 다니는 영유아들이 손에 흙을 쥐고 입에 넣어도 엄마들이 크게 개의치 않는다. 자기가 알아서 뱉겠지. 놀던 손으로 그냥 빵을 집어먹는 건 예삿일이다.
지난 1차 lockdown 때는 놀이터마저 금지하였는데, 이번엔 놀이터는 개방하고 있다. 아이들이 즐겁게 숨 쉬며 몸을 놀릴 수 있는 공간이 있어 감사한 마음이다.
생활공간의 답답함은 적응이 되었다. 세탁기가 4kg이다. 매일 빨래를 돌리니 물과 세제 소비량이 더 클 거 같다는 생각도 든다. 한국 기준에서는 상상도 안 되는 부분인데, 세탁기가 없는 집을 위한 공용 세탁소가 여전히 활발히 운영 중이다. 오래된 주택을 개량해서 사는 경우가 많아 그런 거 같다. 참고로 화장실 바닥이 건식이라 시원하게 물청소를 할 수가 없다. 물이 빠지는 배수구가 없어 바닥 물청소는 불가능하다. 정말 답답할 때가 있지만 화장실 바닥에 검은곰팡이가 없는 장점이 있다.
세탁기만큼 답답한 것이 냉장고이다. 한국 냉장고의 1/4 크기이다. 냉동고 역시 마찬가지이다. 냉장고가 작으니 장을 봐오면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다음 장을 볼 타이밍이 되면 냉장고는 텅텅 빈다. 먹을 만큼만 사서 넣어놓을 수밖에 없고, 재고 음식이 없으니 냉장고 파먹을 일이 없이 낭비가 없는 장점이 있다.
도로는 평온한 편이다. 운전 시 양보를 잘해준다. 깜빡이를 켜기 시작하면 알아서 속도를 줄여주고 양보해준다. 교통 신호 체계가 다른 부분이 있어 초반에는 긴장을 많이 했었다. 좌회전을 할 때 따로 좌회전 신호가 없는 ‘비보호’ 좌회전이 많다. 상대편 직진 차량이 모두 지나가면 수 분 안에 좌회전 차량이 빠져나간다. 전반적으로 도로는 조용하고 질서가 있고 느긋하다. 다만 길이 너무 좁다. 독일은 다른 유럽에 비해 도로포장상태는 좋으나, 도로 양측에 나란히 주차되어 있는 차량 때문에 주택가 도로에서는 중앙선이 의미가 없을 때가 많다. 그래서 중앙선이 실선이 아니고 점선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전거를 조심하는 것! 목을 길게 빼지 않으면 사각지대에서 달려오는 자전거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큰 개를 키우는 문화, 작은 개를 찾아보기 어렵다. 가게 밖에 줄에 묶인 채로 얌전히 주인을 기다리는 애들이 대견하다. 공원에 나가면 서너 살 아이보다 큰 개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다리가 길고 날렵해 보이는 늑대견 같은 개들이 목줄 없이 주인과 뛰어다니며 운동을 할 땐 나조차도 순간 정지, 움찔한다. 개 세금을 낸다는데 국민 대부분이 개를 키우는 거 같다.
도심의 숲과 공원은 사시사철 소중하고 유용한 공간이다. 산책과 조깅을 위한 코스가 완벽하다. 산책은 독일 현지인들에게 의식주만큼 소중해 보인다. 영하의 날씨에도 조깅을 지속하는 생활 체육인이 많다. 어릴 때부터 놀이터에서 키워온 체육 능력이 생활 스포츠로 이어지는 것 같다. 한국에서는 거의 앉아서 생활하던 사람이 여기에서 하루 만보를 우습게 여기도록 만들었으니, 환경이 유도하는 변화는 중요한 것 같다.
공원은 각종 스포츠 그라운드가 된다. 냇가의 지형에 따라 서핑을 즐길 수 있는 곳도 있고, 깊이와 상관없이 물놀이와 수영을 한다. 고정된 시설이 없이 사람들이 이동식 네트나 장비를 들고 다니며 축구, 배드민턴, 핸드볼, 체조, 원반 날리기 등을 즐긴다. 공원 한복판에 삼삼오오 모여 맨발로 옆구르기와 물구나무서기를 함께 하는 모습이 신선했다. 볕이 좋은 날에는 공원 여기저기에 매트를 깔고 누워 요가나 독서를 한다. 함박눈이 내리면 썰매를 즐긴다. 썰매는 모든 가구의 필수품이다. 집 앞에서 썰매를 공짜로 무한대로 즐길 수 있다니, 아이들에겐 천국이다.
지근거리의 녹지가 풍성한 공원에서 산책과 운동을 즐길 수 있는 수혜를 누리는 현지인들을 보면서, 한국 사람들의 ‘정신 건강’과 ‘스트레스’에 대해 생각을 하곤 했다. 낮에도 마트와 놀이터에 포진한 젊은 아빠들을 보면서 국민들의 평균 업무 시간과 휴가 기간을 비교해보고, 누리는 생활 여유와 복지를 비교해봤다. 문헌을 찾아본 바 없고 독일을 피상적으로 경험해본 것이 전부이지만, 이 시기가 마음에 던진 파동은 잔잔하게 오래 지속될 것 같다.
고작 일 년인데 너무 단정적으로 쓴 것은 아닌지, 경험치가 늘면 또 생각하고 글로 남겨야겠다.
- 작가: 익명의 브레인 닥터 / 의사
말보다 글로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13년 차 신경과 의사입니다. 우연히 코로나 시대의 독일을 겪는 중입니다.
- 본 글은 익명의 브레인 닥터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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