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마다 물건의 대이동, 좁은 집도 넓게 살 수 있는 비결
2020년 4월 어느 날
3년 전 베를린 살이를 시작할 당시 두 달짜리 임시 숙소였던 집은 방 하나 거실 하나 그리고 독립된 작은 부엌이 하나 있는 작은 집이었다. 2층짜리 주택에 4가구가 살고 있는, 한국으로 치면 다 가구 주택이었는데, 한국에서 출발한 짐이 도착할 때까지 간단한 짐 몇 가지가 가진 것의 전부인 우리에게는 그리 작지도 않았다.
방에는 세 식구가 충분히 자고도 남을 사이즈의 침대 하나와 화장대로 쓸 수 있는 서랍장, 그리고 옷가지와 이불 등이 들어가는 두 칸 자리 붙박이장이 전부였다. 방보다 조금 큰 사이즈의 거실은 경우에 따라 침실로도 쓸 수 있었는데 많은 독일 가정에서 사용하는 침대 겸용 소파 덕분이었다. 낮에는 소파로 사용하고 밤에는 펼쳐서 침대로 사용하는 식.
독일 집집마다 있는 야외 테라스는 커다란 창을 미닫이로 달아 실내용 베란다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돼 있었다. 아마도 작은 집 사이즈를 고려한 듯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베란다 공간은 남편의 홈 오피스로도, 매 끼 식사 공간으로도 다양한 활약을 했다. 너무나 작은 사이즈의 부엌에서는 도저히 식사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독일 집에 필수인 식기세척기도 갖춰져 있지 않았던 데다 다른 공간들과 철저히 분리된 형태의 그 집 부엌에서는 오랜 시간 머물고 싶지 않아 식사도 가능한 간단한 방식으로 해결하곤 했었다. 5kg짜리 작은 세탁기와 어른 한 명 들어가면 여유 공간이 별로 없는 작은 샤워 박스가 설치된 욕실도 그저 딱 기본 기능에만 충실한 것 같았다.
많은 것이 부족할 수 있었지만 잠깐 산다고 생각해서였는지 아니면 기본 생활이 가능하도록 웬만한 가구며 집기가 다 갖춰져 있어서였는지 크게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부엌에서 만든 음식을 매끼 테라스까지 날라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지만 햇빛 잘 드는 곳에서 초록 초록한 마당을 바라보며 식사하는 즐거움을 위해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처음 만난 날, 집주인은 이것저것 설명해주면서 지하 창고에 대형 세탁기와 건조기가 있으니 필요할 때 창고에 가서 사용하면 된다고, 수납할 물건이 있으면 그곳에 보관해도 된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대문 쪽에서 바라보면 지하 차고 옆에 딸린 공간이 집주인이 말한 지하 창고인 모양이었는데, 그곳에 거주하는 두 달간 나는 단 한 번도 지하 창고를 이용할 일이 없었다. 여름이라 다행히 침구도 대형 세탁기까지는 필요하지 않았고 써본 적 없던 건조기는 더더욱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했다. 임시 생활자에게 창고에까지 보관해야 할 물건이 있었을 리도 만무.
현재 거주하고 있는 집으로 이사 오면서 나는 그제야 지하 창고의 위력을 알게 됐다. 독일 집에는 ‘켈러’라고 부르는 지하 창고가 집집마다 하나씩 딸려 있다. 프라이빗 주차 공간처럼 매월 별도의 돈을 지불해야 하는 공간이 아닌 기본으로 제공되는 또 하나의 공간이다.
집을 보러 왔을 때 관리인은 지하 켈러를 보여주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었다. 가구당 약 3평 정도에 이르는 작지 않은 사이즈의 켈러들이 하나씩 배정됐는데, 사이즈도 사이즈지만 쾌적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처음 입주하는 새 아파트라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창고’ 치고 꽤나 공들여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지하에 마련된 켈러 공간. 우리 보눙(아파트)의 경우 집집마다 3평 남짓한 룸 하나를 제공받았다.
사실 처음에만 해도 나는 켈러를 그저 한국식 ‘창고’의 개념을 떠올려 잘 안 쓰는 물건, 부피가 큰 물건들을 보관해두는 곳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래서 이삿짐을 넣었던 튼튼한 박스 수십 개를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때 쓸 요량으로 켜켜이 쌓아두었고, 한국에서 가져왔지만 불필요하게 된 몇 가지 가전 등을 두서없이 늘어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옆집 켈러를 보게 됐는데 선반 여러 개를 짜 넣은 그곳은 일목요연하게 수많은 물건들이 정리돼 있었다. 한눈에 봐도 안 쓰는 물건이 아닌, 다만 지금 계절에는 쓰지 않는 필수품들로 보였다.
그랬다. 켈러는 내가 생각하는 창고 개념이 아닌, 또 다른 방이었다. 일 년 내내 필요한 물건들을 집안 여기저기 어떻게든 쌓아놓고 사는 방식이 아닌, 지금 이 계절에 이 시기에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지하 켈러에 가져다 놓고 집은 최대한 미니멀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봄이 되면 겨울 이불이며 옷가지, 크리스마스 장식 관련된 물품을 켈러에 가져다 놓고 대신 가드닝을 위한 물품들을 꺼내오는 식. 사람들이 가끔 박스나 수레에 뭔가를 싣고 켈러에 내려가는 것을 보곤 했는데 때마다 ‘물건의 대이동’이 필요한 시점이 오면 그렇게 켈러를 오가곤 했던 것이었다.
나는 그제야 작은 사이즈의 집에 살면서도 넓게 살 수 있는 이유를 알게 됐다. 지금 당장 이 시즌에 필요하지 않은 물건만 덜어내도 집은 넓어질 수밖에 없으니까. 사계절 옷과 이불을 수납할 대형 옷장도 일 년 내내 필요한 여러 종류의 신발들을 채워 넣을 신발장도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특수한 케이스이긴 하지만 일부러 냉장고 없이 켈러에 식재료나 병조림 등을 보관하며 산다는 독일 거주 한국인 부부의 이야기도 들었다. 여름이 돼도 켈러는 항상 서늘한 온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사실 3년간 켈러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다. 변명하자면 이삿짐을 위한 수많은 박스들이 3년 후 사용을 대기하며 이미 많은 자리를 차지해버린 탓에 처음부터 세팅을 다시 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켈러 덕은 톡톡히 보고 있다. 옷장도 없는 집에 보관이 쉽지 않았던 겨울용 온수 매트며, 매 계절 바뀌는 신발들, 현재 읽지 않지만 언젠가 필요할 책들, 크리스마스 용품 같은 계절에 맞지 않는 소품들까지, 집안 어딘가에 쌓여있어야 할 물건들을 켈러가 담당하고 있으니까.
몇 해전 서울의 한 신축 고급 아파트가 지하에 가구당 창고 하나씩 배정해줬다는 말을 들었다. 직접 가봤다는 지인에 따르면 대부분 그냥 잘 안 쓰는 캠핑 용품 같은 덩치 큰 물건들을 보관하는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어 독일의 켈러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고 했다. 지하 창고를 제대로만 활용한다면 버리지 않고도 미니멀리즘이 가능할 것 같은데 언젠가 한국에서도 일상화될 날이 있을까.
<오늘의 깨달음>
한국에서 ‘정리’는 전문가의 영역, 독일에서는 (어느 정도까지는) ‘켈러’의 영역.
- 작가: 어나더씽킹 in Berlin/공중파 방송작가,종합매거진 피처 에디터, 경제매거진 기자, PR에이전시 콘텐츠 디렉터,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유럽통신원 활동 중, ‘운동화에 담긴 뉴발란스 이야기’ 저자
현재 베를린에 거주. 독일의 교육 방식을 접목해 초등생 남아를 키우며 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고민합니다.
- 본 글은 어나더씽킹 in Berlin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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