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김치, 파김치, 오이김치, 깍두기, 무김치, 물김치… 이 다양한 김치를 뚝딱 만들어 내는 한국 엄마들은 김치 고수다. 한국 엄마들이 김치 고수라면, 독일 엄마들은 제빵 고수. 평소에는 맛과 모양보다는 오로지 건강만을 생각한 듯한 거뭇거뭇하고 씨앗이 잔뜩 붙은 투박한 빵을 만들어 먹는 독일인. 허나 제빵 고수들이 자신의 실력을 한껏 발휘하는 날이 있으니, 그날은 바로 생일! 독일에서는 생일을 맞은 사람이 머핀이나 케이크를 구워 학교나 직장으로 가져와 함께 나눠 먹는데, 베이킹에 익숙지 않은 내게는 이게 과연 집에서 가능한 비주얼과 맛인가 싶을 정도로 다들 제빵실력이 대단하다. 베이킹에 자신이 없어 그동안은 한국의 정을 듬뿍 담은 초코파이를 돌리곤 했는데, 이번엔 결심했다. 제빵의 나라 독일에 사는 만큼 올해는 꼭 내 손으로 아이 생일 케이크를 구워보겠노라고.
‘케이크는 나눠 먹기 힘드니까 하나씩 들고 먹기 좋게 머핀을 굽자. 좋아, 그럼 무슨 머핀을 구울까? 알레르기 있는 아이들도 먹을 수 있어야 하니 견과류가 들어가는 머핀은 제외. 그렇다면 초콜릿을 듬뿍 넣은 달달한 머핀을 구울까? 아… 이건 너무 달아서 학부모들이 싫어하려나? 아하! 바나나 머핀을 구워야겠다. 건강한 단맛이니까 애들에겐 딱이겠다.’ 고심 끝에 바나나 머핀으로 정한 후 최종 보스, 생일의 주인공에게 물어봤다.
"바나나아 머피이인? 난 싫어"
깐깐한 부장님 결재 서류 되돌려 보내듯 단칼에 거절한다. 그렇다면 무슨 머핀이 좋을깝쇼 여쭈니 한 말씀하신다.
"파파가이 머핀!"
파파가이(Papagei)는 독일어로 앵무새. 앵무새처럼 노랑, 초록, 빨간색이 알록달록한 머핀을 구워달란다. ‘한 번도 만들어 본 적 없는데 어쩌지? 그건 안 된다고 할까? 그래도 생일인데… 이렇게 좋다는데 할까… 말까…’ 내적 갈등을 하는 찰나에 아이는 꼼꼼한 추가 주문으로 쐐기를 박는다.
"엄마, 머핀 위에 하얀색 소스 바르고… 그거 뭐더라? 그 도넛 위에 있는 거. 그것도 뿌려줘. 꼬옥!"
머핀 위에 아이싱도 곱게 하고, 형형색색의 스프링클도 뿌려 달라는 소리. 이렇게 원하는데 어쩌랴. 그래, 이 엄마가 한 번 해주마!
밀가루, 버터, 설탕, 우유, 베이킹파우더, 계란, 식용색소 또 뭐가 있지? 제빵 고수 독일 엄마들처럼 온갖 재료를 하나하나 계량해서 만들면 좋겠지만, 현실을 직시하자. 나는 베이킹 하수. 한국에 백설 선생님이나 청정원 박사님이 계시다면, 독일에는 카티(Kathi) 선생님과 오트카(Dr. Oetker) 박사님이 업계 최고봉. 이분들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다. 마트로 달려가 베이킹 코너에 있는 카티 케이크 믹스 상자를 집어 들었다. 점자도 아닌데 한 자 한 자 손으로 짚어가며 확인하는 추가 재료. 더 필요한 것은 오직 계란 세 개에다 식물성 식용유. 둘 다 집에 있으니, 머핀 믹스 세 박스만 집어 오면 베이킹 준비 끝! 제빵 종주국임을 자부하는 나라에서 이 정도면 반칙이겠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베이킹이 아니라 김치의 나라에서 온 코리안인걸…
경건한 마음으로 박스 뒷면에 적힌 머핀 만드는 법을 찬찬히 읽어 내려간다. 카티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큰 볼에다가 가루 믹스를 쏟아 넣고, 볼 가장자리에 계란 세 개를 탁탁 두드려 깨 넣는다. 해바라기유도 매뉴얼대로 정확히 계량해서 붓고 골고루 섞어주면 기본 반죽 완성. 이제 잘 섞인 반죽을 볼 세 개에다 똑같이 나눠 담으면 된다. 첫 번째 볼에는 원래 반죽을 그대로 두고, 두 번째 볼에는 동봉된 핑크 색소 가루를, 세 번째 볼에는 초록 색소 가루를 넣는다. 나무 숟가락으로 슥슥 섞어주니 연노랑 반죽이 꽃분홍과 쑥색으로 물들었다. 머핀 열 두 개를 한 번에 구울 수 있는 틀에 머핀 종이를 하나씩 끼워 넣을 차례. 케이크 믹스에도 흰 머핀 종이가 들어있지만 그건 구석으로 치워놓고, 얼마 전 사놓은 알록달록한 머핀 종이를 깔았다. 우리 아들 생일이니까!
드디어 파파가이 머핀의 성패를 가르는 최난이도 구간 진입. 세 가지 색깔의 반죽을 머핀 종이 하나하나에 나눠 담아야 한다. 한 반죽을 열두 칸에 고루 나누는 것도 큰 일이지만, 한 칸에 세 가지 색깔의 반죽이 보기 좋게 섞이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과제. 과장을 조금 보태, 수술 집도의의 노련한 손과 집중력이 필요한 순간이다. 일단 노란 바닐라 반죽을 열두 개의 틀에 골고루 담아준다. 노란 반죽 위 오른쪽 한켠에 꽃분홍 반죽 한 스푼을 넣고, 재빨리 손을 바꿔 쑥색 반죽을 왼쪽 한켠에 밀어 넣는다. 이쑤시개로 숫자 8을 그려가며 세 가지 색깔 반죽을 살짝 섞어주면 마무리 터치도 끝. 반죽 그릇, 숟가락, 이쑤시개를 번갈아 들었다 놓았다 또 들었다 놓았다. 머핀 열두 칸을 채우다 보면 손도 분주하지만 발도 줌바댄스 스텝을 밟는 마냥 이리저리 바쁘다.
180도에 예열해 놓은 오븐에 알록달록 열두 칸을 채운 머핀 틀을 조심스레 올려놓는다. 삐-삐-. 20분 후 알람음이 울려 오븐을 열어보니 달콤한 향이 실린 뜨거운 바람이 훅하고 얼굴에 닿는다. 머핀 틀을 살살 꺼내 요리조리 살펴본다. 갓 구워낸 머핀 색깔은 반죽이었을 때 보다 한결 얌전해진 파스텔 톤. 물을 가득 머금은 붓에 연노랑, 연분홍, 연둣빛 수채물감을 묻혀 봉긋이 솟아 오른 머핀에 색을 칠한 게 아닐까 싶은 어여쁜 모습. 속까지 잘 익었나 확인해 보려면 이쑤시개를 꽂아봐야 하는데… 여린 자태에 괜히 멈칫 망설여진다. 이쑤시개를 꽂느니 깔끔하게 내가 먹어보는 게 낫겠다 싶어 한 입 베어 물었다. 폭신하고 따스하고 달달한 게 제법 커피를 부르는 맛이다. 우유가 들어간 라테나 마끼아또보다는 쌉쌀한 아메리카노가 더 잘 어울릴 법 한. 상상 속 커피 한 모금을 생명수 삼아 입에 머금고 힘을 내본다. 밤 열 한 시. 아직 구워야 할 머핀이 두 박스나 남았다.
다음날 생일 아침. 깨우지도 않았는데 일찌감치 일어난 아이가 주방으로 달려온다. 콩콩콩 작고 빠른 걸음으로. 주문한 대로 하얀 아이싱에 알록달록 스프링클까지 뿌려져 있는 파파가이 머핀을 본 아이의 얼굴이 해님보다 환하다. “엄마, 고마워요” 라고 속삭이며 앞치마 폭에 쏙 안기는 아이. 밤새 서른 개도 넘는 머핀을 굽고 장식하느라 쌓인 피로가 아이의 온기에 사르르 녹아내린다. 요 따뜻하고 달콤한 녀석. 내가 만든 어여쁜 파파가이 머핀처럼 작고 귀엽다. 머핀 같은 아이를 품에 안고 있으니, 문득 생일 케이크를 굽는 것과 아이를 키우는 것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이라 자신이 없어도 어떻게든 잘해보려고 동동거리는 모습. 완벽할 수는 없어도 포기하지는 않겠다는 다짐으로 내딛는 한걸음. 갖은 노력과 수고를 들여도 결국은 기다려줘야 하는 인내의 시간. 어쩌면 제빵 고수 독일 엄마들도 비슷한 심정으로 아이 생일 케이크를 만드는 건 아닐까. 아이를 낳고 기르는 마음으로 맛있고 예쁜 케이크를 구워내는 고수들의 정성스러운 손길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말하지 않아도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고 하지 않는가. 왠지 오늘만큼은 이 어설픈 한국 김치 고수, 감히 독일 제빵 고수의 마음을 이해 하노라 말해도 될 것 같다.
- 작가: 오롱
<동독에서 일주일을> 공동저자. 한국에 나고 자람. 스위스, 미국, 독일을 거쳐 이제 막 영국에 정착. 언어, 문화, 정체성이 뒤섞인 콩가루 집안을 지키는 씩씩한 엄마.
- 본 글은 오롱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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