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른 일어나, 학교 가야지”
오늘 아침도 어김없이 7시 10분 전에 두 아이들을 흔들어 깨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등교 시간이 이른 독일 초등학교 덕분에 온 가족이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애벌레처럼 이불속에서 꿈틀대는 애들을 어르고 달래 씻기고, 입히고, 먹인 후 학교와 유치원까지 데려다주고 나도 8시가 되려면 5분이나 남는다.
휴- 오늘 아침 임무 완료. 이제 한 숨 돌릴 여유가 생긴다.
독일에 온지 어언 2년이 다 되는 지금. 이제 한 숨 돌릴 여유가 생긴다.
3개월 만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결정된 독일행 이었지만 감사하게도 아이들은 이곳에 잘 적응하며 지낸다. 큰 아들은 작년 8월 독일 초등학교에 입학해 이제 1학년을 마쳐가고, 둘째 아들 역시 이곳 시립 유치원에서 잘 먹고, 잘 자고, 잘 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편의 고향인 스위스도 아닌 이곳 독일에서 아이들을 키운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는데… 특히 독일에서 학부모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우여곡절도 많았고, 남모르게 가슴 졸이던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이만하면 잘 지내고 있다며 칭찬의 궁디팡팡 정도는 해 줄만 한 것 같다.
스위스 남편을 만나 외국 생활을 오래했고, 두 아이도 다 스위스에서 낳았다. 둘째가 태어나고 100일이 되었을 때는 남편 공부를 위해 온 식구가 짐을 챙겨 대서양을 건너 미국 서쪽 끝 캘리포니아로 이사를 갔다. 스위스에서도 미국에서도 큰 아이는 어린이집과 유치원을 다녔지만, 그동안은 내가 외국인 엄마라는 생각을 잘 하지 못했다. 스위스에서는 워킹맘이 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아침에 아이가 울지 않고 헤어질 수 있기만을 바랬고, 저녁에는 꼴찌로 아이를 데리러 오는 엄마가 되지 않는 게 최대 목표였다. 미국에서는 아이가 대학 안에 있는 유치원을 다녔기에 다양한 국적을 가진 유학생 가족들 사이에서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이곳 독일, 그중에서도 구 동독지역인 라이프치히에 오고 나서 처음으로 “아 맞다, 내가 외국인이었지” 싶었다.
동양인이 드문 탓인지 사람들은 날 빤히 쳐다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그 어색한시선을 피하자니 괜히 기싸움에서 지는것 같고, 안 피하자니 너무나도 불편하고 신경쓰였다. 영어는 생각보다 잘 안 통했고, 난 독일어라고는 구텐탁, 당케 밖에 몰랐다. 더군다나 여기는 내 나라도 아니고 남편의 홈 그라운드도 아니고… 10여 년의 외국 생활을 했지만, 이곳에서 처음으로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실감했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게 되었다. 독일어가 필요한 모든 일은 남편에게 부탁하고, 시내도 아는 곳을 아는 길로만 다니고, 물건을 살 때도 최대한 사람들과의 접촉은 피하도록 하고… 그럴수록 자신감과 자존감은 저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았고, 내 평생에는 없을 거라 장담했던 향수병의 쓰디쓴 맛을 보게 되었다.
향수병과 그로 인한 우울감이 처음엔 살짝 버겁기도 했지만, 그래도 아이들 때문에 힘을 낼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자기들도 나름 평생 살았던 정든 곳을 떠나 오는 게 어디 쉽겠는가? 맨날 붙어 다니던 친구들, 좋아하는 선생님과도 다 헤어지고 라이프치히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엄마와 아빠뿐인데, 그런 아이들 앞에서 맥없이 널브러져 있는 엄마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러면 안될 거 같았다. 여기선 내가 아이들의 유일한 비빌 언덕이자 믿는 구석일 텐데, 내가 무너지면 우리 아이들은 천하의 고아나 다름없는 신세가 될 거라 생각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씩씩한 척을 시작했고, 그러다 이제는 씩씩한 척을 하는 건지 아님 진짜 씩씩해진 것인지 구분이 안되게 되었다. 그래서 씩씩해졌다고 믿기로 했다.
그래 나는 씩씩한 엄마야. 라이프치히에서 제일 씩씩한 한국 엄마야!
씩씩한 척을 하기로 맘먹고 나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은 집 앞 놀이터 출근이었다. 아침 먹은 후, 오후 낮잠 후 일정한 시간에 매일 가니 자주 보는 얼굴들이 생겼다. 아이들이 때문에 몇 마디 섞어보니 나 같이 외국에서 온 아이 엄마들이 꽤 많았고, 그 아줌마들하고 금방 친해졌다. 그중 한 명은 지금 내 라이프치히 베프가 되었다.
독일 오고 반면만에 두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난 그 시간 동안 독일어 학원에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고등학교 다닐 적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는데 어쩜 이렇게 하나도 생각이 안 나는지. 한글로 치면 기억, 니은을 배우는 왕초보반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월화수목금 하루 5시간씩 다니다 보니 초급반이 끝날 무렵 까막눈은 벗어날 수 있었다. 문맹을 벗어난 다는 것은 정말이지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심봉사가 눈 떴을 때 이런 심정이었을까? 슈퍼에 가서 애들이 먹고 싶다고 집어 든 게 뭔지 알 수 있다는 것, 유치원 친구에게서 받아온 생일 초대장을 읽어 줄 수 있다는 것, 아이들이 먹고 싶다는 아이스크림을 콕 집어 주문해 줄 수 있다는 것. 사소하지만 할 수 있는 게 많아지면서 독일어 학원이 재미있어졌다. 꾸준히 다니다 보니 지금은 계획에도 없던 고급반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다.
친구도 좀 사귀고, 꿀 먹은 벙어리 신세를 벗어나면서부터 숨겨놓았던 철판을 얼굴에 다시 깔았다. 그리고 안 해본 짓들을 하기 시작했다. 혼자 도서관에 가서 어찌어찌 회원등록도 하고, 가게에 가서 사지도 않을 거면서 괜히 점원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다. 치과, 소아과, 산부인과 등등에 전화해서는 독일어 영어 섞어가며 예약도 잡고, 끊기 전에 “내가 독일어가 좀 서툴러서 미안해”라는 애교도 잊지 않았다. 그러면 대부분 웃으면서 괜찮다고, 다 알아들었다고 답해준다. 학교 선생님이나 다른 학부모들과 이야기해야 할 때 이제 더 이상 남편 뒤로 숨거나 피하지 않고, 대신 처음에 얼굴 위에는 철판을, 대화 전에는 밑밥을 깐다.
“나 독일 온지 얼마 안돼서 독일어 잘 못해. 그래도 독일어로 말하고 싶은데… 괜찮지?” (찡긋)
열명이면 열명 다 흔쾌히 좋다 하고, 그중에 아홉 명은 너 독일어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고, 그중 일곱여덟 명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그 전에는 어디서 살았는지 관심 있게 물어본다. 그리고 이 열명 모두 나중에 다시 보면 반갑게 인사는 주고받는 사이가 된다. 생긋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다니는 나를 보며 큰 아들이 말했다.
“엄마 친구 되게 많다.”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도 가끔은 우울함, 외로움, 혹은 항수병이라는 인생의 씁쓸한 맛에 인상을 찌푸리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 라이프치히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적응하면서 모아놓은 뿌듯함, 새로움, 그리고 즐거움이라는 달콤한 알사탕들도 한 호주머니쯤은 된다. 그리고 이젠, 입이 쓸 때면 모아놓은 사탕 하나를 꺼내 입에 물어 넣을 정도의 여유는 생겼다.
아이를 키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아이를 키우는 건 진짜,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쉬운 일이 아니지만, 나는 엄마니까 그 쉽지 않은 일을 해내야 한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이곳 라이프치히에서 씩씩한 척, 씩씩하게 아이들을 돌본다.
괜히 주눅들고 쳐지는 날이면 속으로 주문처럼 외워본다.
나는 라이프치히에서 제일 씩씩한 한국 엄마다!
- 작가: 오롱
<동독에서 일주일을> 공동저자. 한국에 나고 자람. 스위스, 미국, 독일을 거쳐 이제 막 영국에 정착. 언어, 문화, 정체성이 뒤섞인 콩가루 집안을 지키는 씩씩한 엄마.
- 본 글은 오롱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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