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사람 대부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한다는 인생 초반 3대 빅 이벤트가 있다. 인생의 동반자와 함께 부부의 삶을 시작하는 결혼식. 독립적인 개인으로 거듭나 성인으로서의 첫 날을 맞이하는 만 18세 생일. 놀이가 전부였던 유아의 삶에서 탈피해 배움에 첫 발을 내딛는 초등학교 입학식. 아쉽게도 독일에서 누군가의 결혼식이나 18세 생일을 함께해보진 못했다. 허나 내게도 독일 빅 3 이벤트 중 하나를 경험해 볼 기회가 왔다. 바로 큰 아이 조슈아의 초등학교 입학식! 3대 이벤트의 첫 테이프를 끊는 셈이니 집안의 큰 경사일 터. 가족 중 누구 하나 소외되지 말라는 뜻인지 초등학교 입학식이 토요일 오전이다. 부모 형제는 당연하고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이모, 고모, 사촌, 거기에 대부 대모까지 합류. 주위를 둘러보니 입학하는 아이 하나에 초대된 손님이 몇명인지 세기도 어렵다. 독일에 있는 핏줄을 모두 다 불러 모아도 네 명뿐인 우리는 물론 예외였지만.
여자아이들은 하나 같이 예쁜 원피스 차림에 구두는 반짝반짝. 남자아이들은 캐주얼 정장이 대세다. 깔끔한 바지에 칼라가 달린 셔츠를 입고 거기에 앙증맞은 넥타이까지 매면 입학식 패션 완성. 바지를 입은 여자 아이도 없고, 칼라가 달리지 않은 티셔츠를 입은 남자아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답지 않게 잘 차려입은 오늘의 주인공들과 초대 손님들을 보니, 여기가 입학식인지 결혼식장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다. 결혼식에서는 주인공인 신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게 있다. 그건 바로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부케. 아무리 멋들어지게 차려입어도, 아무리 미모가 뛰어나도 부케를 들지 않았다면 그날의 주인공이 아닌 것이다. 독일 초등학교 입학식에서도 결혼식의 부케와 같은 상징이 있다. 초대받은 수많은 또래 형제, 자매, 사촌 등등의 어린이들 중에서 주인공의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켜주는 그것, 손에 들고 있는 것만으로도 온몸으로 ‘오늘 밤 주인공은 나야 나!’라고 외치는 것이나 다름없는 그것. 바로 아이들의 손에 들려있는 주커튜테다.
슐튜테(Schultüte)라고도 불리는 주커튜테(Zuckertüte)는 설탕이라는 뜻의 쥬커(Zucker)와 봉투라는 뜻의 튜테(Tüte)의 합성어로 ‘설탕 봉투’ 혹은 ‘설탕 고깔’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1800년대 초반 독일 동부 지역인 작센과 튜링겐에서부터 시작되었다니 꽤 오래된 전통이다. 달콤한 것이 귀했던 옛 시절, 부유층 사람들이 작은 고깔 모양의 종이봉투에 사탕이나 초콜릿을 담아 입학하는 아이에게 선물로 준 것으로부터 주커튜테가 유래되었다. 아이에게 뭐라도 해주고픈 부모 마음은 부자이든 가난하든 그 깊이가 다르지 않아서일까. 주커튜테는 일반 서민 사이에서도 유행처럼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고, 독일 전역에서 일종의 전통으로 자리매김 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작은 종이봉투였던 주커튜테는 오늘날 1미터 정도나 되는 딱딱한 골판지 고깔로 업그레이드되었고, 커진 사이즈만큼이나 꼬마 주인공을 빛내주는 역할도 대체 불가할 만큼 중요해졌다. 독일 민속학 연구자 크리스티나 칸타우브(Christiane Cantauw)에 따르면 주커튜테 없는 입학식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고깔을 신문지나 감자로 채우는 한이 있더라도, 주커튜테 자체를 준비하지 않은 부모는 없을 정도로 말이다. 돈이 없다고 아이를 위하는 마음이 포기되는 게 아니니까….
입학을 앞둔 아이를 격려하는 마음은 주커튜테의 외관에도 가득 묻어난다. 주커튜테가 뭔지도 잘 몰랐던 나는 공장에서 찍어 만들어, 대형 문구점에서 파는 기성품을 샀다. 여름이면 서점, 문구점, 완구점 심지어 슈퍼마켓 여기저기에서 많이들 팔길래 다들 이렇게 사주는 줄 알았다. 한데 입학식 때 보니 대부분의 아이들이 부모님이 직접 만든 수공예 주커튜테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고깔은 아마도 아이가 좋아하는 색깔을 골라 만들었겠지. 그 위에 응원과 애정을 가득 담아 아이 이름을 한 자 한 자 꾹꾹 붙였을게다. 그래서일까? 엄마 아빠가 만든 주커튜테는 그것만 봐도 그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아, 이 아이는 공룡을 좋아하는구나. 저 아이는 뮌헨 축구팀 팬이고. 요 숙녀는 엘사 공주에 푹 빠져있네.‘ 아이 취향에 맞춰 정성스레 꾸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주커튜테. 어른인 나도 하나 갖고 싶을 정도다. 자기만을 위해 맞춤 제작된 고깔을 소중히 들고 있는 어린이들을 보니 마음이 따뜻해지다가도 한켠으로는 콕콕 쑤신다. 조슈아도 자랑스레 자기 주커튜테를 들고 좋아해서 다행이지만, 좀 아쉽다. 미리 알았으면 나도 하나 만들어 주는 건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 더. 주커튜테는 입학식 때까지 아이에게 들키지 말아야 한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25일 아침까지 들키지 않아야 하는 것처럼. 그러니 부모님들은 아이가 잠든 밤 겨우 시간을 내어 만들었을 것이다. 무거운 눈꺼풀을 비벼가며 며칠밤 동안이나. 그야말로 지극정성의 결정체. 한동안 꼭꼭 숨겨 놓았던 주커튜테는 보통은 입학식이 끝나면 부모들이 짜잔- 하고 아이들 품게 안겨준다. 지금은 아이들 가슴 높이만큼이나 그 사이즈가 커져버려 불가능 해졌지만, 주커튜테가 자그마했던 시절에는 아주 귀여운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건네줬다.
하나, 입학식 전날 밤에 부모나 조부모가 아이들 몰래 학교에 간다.
둘, 학교에 있는 주커튜테 나무(학교에서 적당한 나무를 미리 점찍어 놓고 그걸 주커튜테 나무라고 하기로 약속한 것)에다가 아이 이름이 적힌 고깔을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다.
셋, 입학식 날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 자기 이름이 적힌 주커튜테를 망가뜨리지 않고 잘 따서 내려온다.
여기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학교에 갈 날을 고대하던 아이들에게 해주시던 달콤한 이야기가 함께한다.
”학교에는 주커튜테 나무가 있는데 말이다, 그 나무에 너의 이름이 적힌 주커튜테 열매가 열릴 거란다. 그 열매가 따먹을 수 있을 만큼 커다랗게 잘 익으면 네가 학교에 갈 때가 되는 거지.”
아쉽게도 알록달록 예쁜 고깔 열매를 가득 매단 주커튜테 나무는 이제 보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학생수가 아주 적은 시골 학교라면 가능할까. 학급수도 많아지고 고깔도 특대 사이즈로 커진 요즘, 주커튜테 나무는 추억 속 옛날이야기에서나 만날 수 있다. 학년 전체가 함께 한 입학식이 끝난 후, 부모들이 안겨준 커다란 주커튜테를 안은 아이들을 따라 모두가 반별로 흩어졌다. 일 년 동안 지낼 큰아이의 교실을 함께 둘러보기 위해 들어서는데 여기저기서 어른들의 함성이 터져 나온다.
‘‘어머, 이게 뭐야? 주커튜테 나무잖아!‘‘
‘‘분더바, 분더바!!‘‘ (Wunderbar: ‘대단하다 ‘는 뜻으로 ‘와우!‘ 같은 추임새처럼 많이 쓰인다)
어디서 구하셨는지 담임 선생님께서 교실 천장에 제법 큰 주커튜테 나무, 아니 나뭇가지를 걸어 놓으셨다. 그 나뭇가지에는 아이들 손바닥만한 고깔 스무여 개가 주렁주렁. 가만 보니 반 아이들 이름이 하나씩 적혀있다. 호명되면 아이가 나와 선생님과 악수를 하고, 나뭇가지에서 자기 주커튜테를 따는 것으로 입학식을 마무리하시겠단다. 높이 매달린 고깔에 닿기 위해서는 아빠나 할아버지의 목마 내지는 힘껏 안아 올리는 엄마의 슈퍼파워는 필수.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남편이 호기롭게 조슈아를 어깨 위에 올려 앉히고 일어서려는데 휘청휘청. 영 중심을 못 잡는다. 넘어질까 불안한 마음에 나도 핸드백을 내동댕이치고 남편 등과 아이 엉덩이를 받쳐줬다. 도움은 안되었지만, 힘을 보태고 싶었던 막내도 내 엉덩이에 찰싹 달라붙었다. 초면에 돌아가며 가족 차력쇼 내지는 장기자랑을 하는건가? 이렇게 온 가족이 힘을 합쳐 주커튜테를 하나씩 딸 때마다 교실에는 환호와 박수가 울려 퍼졌다. 아이들이 이만큼 성장했음을 함께 자랑스러워하고 기뻐하는 순간이니까. 시끌벅적했던 입학식, 경험해보니 기억에 남을 이벤트가 확실하다. 인생 초반 3대 빅 이벤트의 포문을 여는 첫 순간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조슈아는 내 어설픈(기성품인데다 입학식 전에 들켰다) 주커튜테를 풀었다. 좋아하는 하리보 젤리와 초콜릿은 물론이고 갖고 싶어 했던 책과 학용품을 줄줄이 쏟아내며 즐거워하는 아이.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식구들 모두에게 사탕과 초콜릿을 잘도 나눠준다. 달달한 초콜릿을 천천히 녹여 먹으며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우리 아들이 걸어갈 배움의 길이 쓰지만은 않기를… 알아가는 즐거움과 재미를 많이 느끼기를… 그래서 달콤한 배움의 열매를 가득 맺을 수 있기를…
- 작가: 오롱
<동독에서 일주일을> 공동저자. 한국에 나고 자람. 스위스, 미국, 독일을 거쳐 이제 막 영국에 정착. 언어, 문화, 정체성이 뒤섞인 콩가루 집안을 지키는 씩씩한 엄마.
- 본 글은 오롱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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