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아이가 학교에 입학한 지 삼일째가 되는 수요일. 하루 이틀 쌓인 초조함에 아침부터 속이 더부룩하다. 같은 반 친구들은 이미 교과서를 갖고 있다는데, 우리 아이는 어찌 된 일인지 아직까지도 교과서 한 권 받아온 게 없다. 이게 무슨 일이람? 왜 우리 애만 교과서를 못 받았지? 교과서가 부족해서 다 못 나눠줬나?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프라이버시가 중요한 독일에서 담임 선생님의 개인 연락처는 국가 기밀만큼이나 알기 어렵고, 학교 사무실에 전화해서 문의하자니 내 독일어 실력이 못 미덥다. 어쩔 수 없이 학교 가는 아이를 붙잡고 신신당부를 하고 또 하는 수밖에…
“오늘은 학교 가거든 제일 먼저 선생님한테 교과서 달라고 말해. 알았지?”
“엄마. 그런데 선생님이 책은 엄마한테 달라고 하랬어!”
“나한테? 엄마한테 교과서가 어디 있어? 엄마가 책 주문한다고 써냈으니까 선생님께 가서 ‘우리 엄마도 책 주문했대요. 저도 책 주세요’ 해”
그날 오후,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의 가방이 너무 가볍다. 아니나 다를까, 오늘도 책을 못 받았단다. 안 되겠다.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 내일 아침 교실까지 따라 올라가 직접 선생님께 여쭤봐야지.
해야 할 말을 미리 적어 놓은 종이쪽지를 한 번 보고, 어젯밤 연습한 대로 선생님께 차근차근 설명했다. 문장 하나를 말할 때마다 손가락을 펼쳐 보이며 하나, 나는 분명히 교과서를 주문한다고 표시했으며. 둘, 학교에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셋, 아직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고. 학교에서 뭔가 실수가 있었던 게 아닌지 확인해 줄 수 있냐고 독일어 문법책 예문만큼이나 정중하게 물었다. 한데 선생님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 쉽게 대답을 하지 않으신다. 어색한 침묵만 흐른다. 일 초, 이 초, 삼 초… ‘왜 그러시지? 내 발음이 이상한가? 아님 문법이 틀렸나?’
“교과서를 언제, 어디에서 주문했나요?”
“지난번 첫 학부모 모임 때 나눠준 신청서에 교과서를 주문한다고 표시해서 학교에 제출했습니다.”
다시 한번 똑 부러지게 대답했는데도 돌아오는 선생님의 반응이 이상하다. 학교에 주문했다고 벌써 두 번이나 말했는데 또다시 교과서를 어디에서 주문했냐 묻는데 직감했다. 이 대화가 요상하게 흘러가는 것은 내 독일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딩 동 댕. 수업 시작종이 울리는 바람에 담임 선생님과의 대화는 결론 없이 끝나버렸고, 나는 결국 학교 행정실로 떠밀려갔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오가는 질문과 대답의 연속은 행정실에서도 마찬가지. ‘교과서를 주문했는데 못 받았다, 어디서 주문했냐, 학교에서 했다, 아니 어디에다 주문했냐, 학교에다 했다니깐…’ 앵무새마냥 같은 대답을 몇 번이나 반복한 뒤 알게 되었다. 교과에서 관한 아주 충격적인 사실을!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교과서는 학교에서 주는 새 학기 맞이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그 학교 학생이라면 묻지도 따지도 않고 일인 일권, 모두에게 나눠준다.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누구나 아는 자명한 사실. 하나 낯선 독일 땅에선 그렇지가 않단다. 교과서는 학부모가 개별적으로 서점에서 주문해 받아와야 하는 것. 그럼 그 신청서는 뭐지? 학교에 교과서를 주문하겠다고 표시한 것은 내가 직접 교과서를 주문 및 구매해 오겠다는 뜻이고, 그렇지 않고 빌리겠노라고 하면 학교에서 갖고 있는 교과서를 대여해 준다는 것이다. 이 땅에서는 이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나 빼고는 모두가 아는 자명한 사실.
행정실 선생님의 친절한 안내에도 불구하고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시쳇말로 ‘민폐 캐릭터’가 되어 버린 것 같아 없는 쥐구멍이라도 만들어 숨어 버리고 싶었다. 입으로는 죄송하다며 엔츌디궁(Entschuldigung)을 연거푸 웅얼거리면서도 몸은 한국식으로 자동 반응. 고개를 연신 꾸벅거리며 뒷걸음질로 겨우 학교를 빠져나왔다.
한달음에 집으로 가서 교과서 리스트를 찾아들고 아담한 단골 서점을 찾았지만, 그곳에선 교과서 주문을 받지 않는단다. 나를 측은히 여긴 직원이 일러준 대형 서점에 가서도 교과서를 찾아 일층 이층을 오르락내리락거리며 헤맸다. 바빠 보이는 직원을 겨우 잡아 물었더니 학교 교과서는 지하로 내려가서 물어보라고 한마디 툭 던진다. 지하층이 있었어? 뭐 하나 쉽게 되는 게 없다. 날랜 걸음으로 계단을 두 칸씩 뛰어내려와 교과서를 찾았더니,
“오늘 주문하면 내일… 내일은 좀 어렵겠고 모레 오후에 찾으러 오면 되겠네요”
모레면 금요일. 학생이 일주일이나 빈 책가방으로 학교를 다녀야 한다니. 산 넘어 산이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여기저기 쫓아다녀서 그런가? 아침부터 독일어를 너무 많이 듣고 써서 뇌에 과부하가 걸린 것일까? 서점을 나오니 머리가 띵하고 다리가 풀린다. 한화로 십만 원이 훌쩍 넘는 교과서 구매 영수증을 손에 쥐고, 서점 앞 야트막한 분수대에 걸터앉았다. 따사로운 햇살을 가득 머금은 독일의 한여름 아침 하늘이 높고 푸르다. 자존심 상해 죽겠는 내 속도 모르고••••••. 한국에서는 내 앞가림 잘해서 야무지다는 소리를 꽤 듣던 내가 여기서 이게 무슨 바보짓인지. 낯선 타지에서 애들 잘 키워 보겠다고 독일어 공부도 하고, 독일 초등학교 입학 준비에 대한 정보도 많이 살펴보며 만반의 준비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기본 중의 기본인 교과서도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다니, 시작부터 헛발질 제대로다. 걱정은 늘고 자존심은 구겨진다.
야속하리만치 눈부신 하늘을 아무 생각 없이 올려다봤다. 빙그르르 도는 하늘이 어지러워 눈을 감고 쏟아져내리는 햇빛에 온몸을 내맡겼다. 태양광 에너지가 이런 건가. 피부 세포 하나하나에 에너지가 차오른다 싶더니 내 깊숙한 곳, 저 어디에선가 충전 완료를 알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래도 교과서 주문 혼자 해냈잖아. 그럼 됐지 뭐! 괜찮아!’
이게 뭐 대수라고 이리 찌그러져 있나 싶어 힘껏 땅을 박차고 있어 섰다. 독일 땅을 각서 삼아 발도장이라도 찍듯 결연하게. 어쩌겠는가. 여기가 독일이고, 아이가 독일 초등학교에 다니는 것을 바꿀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처음이라 만만치 않을 독일 초등학교 생활, 반 발짝만큼이라도 앞서서 아이를 도와주려면 내가 좀 더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사는 수밖에! 엉덩이를 팡팡 때려가며 묻지도 않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그렇게 속상한 마음도 털어내고, 구겨진 자존심도 탁탁 펼쳐 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보란 듯이 더 크고, 더 힘차게.
이틀 후, 그렇게 찾아 헤매던 교과서를 드디어 손에 넣었다. 계산대 앞에서 두 손으로 받잡자니 조회시간에 교단 너머로 상장이라도 받는 듯 가슴이 뿌듯함으로 차올랐다. 일주일이나 늦었지만 여기저기 다니면서 고군분투했으니 노력상 정도는 되겠지? 교과서 찾아 삼만리는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독일 살이 앞날에 얼마나 많은 그 무언가를 찾아 또 나서야 할까. 그 여정이 서럽고 힘겨울 때마다 기억해야겠다. 오늘 받은 노력상을.
- 작가: 오롱
<동독에서 일주일을> 공동저자. 한국에 나고 자람. 스위스, 미국, 독일을 거쳐 이제 막 영국에 정착. 언어, 문화, 정체성이 뒤섞인 콩가루 집안을 지키는 씩씩한 엄마.
- 본 글은 오롱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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