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김밥을 좋아한다. 때깔 고운 재료가 알차게 들어있는 모양새도 예쁘고, 맛도 좋으며, 먹고 나면 배도 든든하다. 빵이나 과자는 아무리 배불리 먹어도 간식이지만, 김밥은 한두 줄만 먹어도 끼니로 쳐줄 수 있다.
어디 대한민국에 김밥을 좋아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랴. 첫 소풍에 들뜬 어린이집 꼬맹이들, 바쁘고 빠듯한 일상에 쫓겨 끼니를 챙기기 힘든 젊은 학생과 회사원들, 종종 입맛이 없으신 어르신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김밥을 싫어해서 안 먹는다는 사람은 내 아직 단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다.
난 어떻게 김밥을 좋아하게 된 걸까? 어릴 적 김밥은 곧 좋은 날, 특별한 날을 뜻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엄마가 한창 김밥을 말고 계시면, 그날은 소풍을 가거나, 운동회를 하는 날이거나 아님 가족이 함께 나들이를 가는 날이다. 그래서 어쩌면 난 김밥 그 자체가 좋다기보다는 좋고 즐거운 날에 김밥을 먹기 때문에 김밥을 좋아하게 된 게 아닌가 싶다. 소풍이나 나들이 메뉴가 꼭 김밥이 아닌 다른 어떤 거였더라도 내가 김밥을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을까? 장담할 수 없다.
사실 우리 엄마의 김밥은 특별할 게 없는 맛도 모양도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김이 안으로 밥이 밖으로 나온 누드김밥도 아니고, 온갖 재료로 맛이며 모양이며 한껏 멋을 내지도 않은 김밥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엄마는 김발 이를 돌돌 말아 꾹꾹 눌러가며 김밥을 만드시면, 아빠는 프라이팬에 김밥을 가지런히 놓고 살짝 구워내셨다. 그러면 엄마는 김밥 옆구리가 터지지 않게 조심조심 자르시고, 아빠는 동글납작한 김밥을 하나씩 하나씩 도시락통에 담아주셨다. 나랑 동생은 그런 부모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가 김밥 꽁댕이를 서로 먼저 먹겠다고 아웅다웅했었다. 엄마가 다 차려놓은 밥상 앞에 와서 앉아 먹기만 하는 여느 아침과 달리, 김밥을 싸는 날이면 우리 네 식구는 넓지도 않은 주방에 모여 복작거렸다. 초등학교 다닐 적부터 중고등학교를 거쳐 내가 다 큰 어른이 되어 가끔 집에 내려오는 나이가 될 때까지 김밥을 싸는 날 아침은 항상 그래 왔던 것 같다.
제비 마냥 벌린 입으로 김밥 꽁댕이를 받아먹던 나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될 정도로 훌쩍 커 버렸고, 한국을 떠나 온지도 10년이나 넘었다. 아쉽게도 엄마가 싸준 김밥을 마지막으로 먹은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김밥을 볼 때마다 함께 주방에서 함께 복작거리던 엄마 아빠가 생각난다. 날 위해 김밥을 싸주시려고 새벽같이 일어나셨을 우리 엄마, 그런 엄마를 도와주려고 같이 일찍 일어 셨을 우리 아빠. 김밥을 싸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일에도 나를 사랑하는 마음을 담으셨던 우리 엄마 아빠. 그런 엄마 아빠 생각에 난 김밥을 좋아하나 보다…
며칠 전 큰 아이가 학교에서 가정 통신문을 받아왔다. 경마장과 숲으로 현장학습을 갈 건데 이러이러한 준비물과 함께 도시락을 준비해서 보내달라고 적혀있었다. 통신문을 보면서 점심은 뭐 독일 스타일로 빵에 햄이랑 치즈나 끼워서 간단하게 샌드위치나 만들어주면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옆에서 눈을 똥그랗게 뜨고 통신문을 같이 읽던 아들이 주문을 하는 게 아닌가.
“엄마, 나 김밥 싸주세요. 그 노란 것도 꼭 넣어서.”
“진짜? 그래! 우리 아들 소풍 가는데 엄마가 당연히 김밥 싸줘야지.”
단무지를 넣고 싸 달라는 소리이다. 맛있는 건 알아가지고.
소풍 가는 날 김밥을 싸 달라는 아들의 말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말로는 항상 자기는 반은 한국 사람이고 반은 스위스 사람이라고는 하지만, 한국은 태어나서 딱 3번밖에 가보지 않은 아이인데 소풍 가는 날 김밥은 김밥을 먹어야 한다고 하니, 너도 한국 어린이이구나 싶은 게 괜히 고맙고 기특해서 기쁜 마음으로 김밥 도시락을 준비해 주기로 했다.
독일에서는 김밥 한번 싸려면 장도 몇 군데나 따로 들러서 봐야 하고 재료도 제대로 구색을 갖추기가 쉽지 않은데 그게 어디 대수랴. 내가 물려준 한국인 DNA를 가진 아들이 소풍날 김밥을 싸 달라고 하는데!
아들이 특별히 주문한 단무지는 라이프치히에선 귀하디 귀해 시내에 있는 아시아 마트에 가야만 살 수 있다. 얇고 바삭하면서도 잘 터지지 않는 한국산 김밥용 김도 여기에서만 파니까 한 봉지 샀다. 일반 마트에 들러서는 김밥용 햄을 대신할 샌드위치 햄도 사고, 길이가 짧아서 김밥 한 줄 싸려면 세 개를 이어 붙어야 하는 맛살도 넉넉하게 두 봉지 집어 들었다.
현장학습 당일. 알람이 울리기 10분 전인 4시 50분에 일어났다. 잠들기 전에 알람 소리에 잠귀가 밝은 둘째가 깨면 어쩌나 살짝 걱정하며 자서 그런지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저절로 떠진다. 이건 엄마가 되고 나서 생긴 신기하고도 고마운 초능력이다. 일단 밥을 앉치고 냉장고에서 각종 재료들을 꺼내 다듬는다. 어제 아시아 마켓에서 모셔온 통통한 단무지도 늘씬늘씬하게 잘라준다. 김을 꺼내 양념한 밥을 꾹꾹 눌려 펴 바른 후 다듬은 재료를 가지런히 올리고 돌돌 말면 김밥 한 줄 완성. 기왕 싸는 거 남편 도시락도 준비하고, 어학원에 있는 한국 유학생도 갖다 주려고 두어줄 더 쌌다. 김밥 열 줄을 썰고 남은 꽁댕이 20개는 아침으로 먹으려고 그릇에 담아뒀다.
도시락 3통이 김밥으로 가득하게 담겨있고, 가족을 향한 내 사랑과 정성으로 꽉 찼다.
꽁댕이를 모아 놓은 접시를 식탁에 가져다 놓는데 깨우지도 않은 큰아들이 언제 왔는지 식탁에 와 앉아있다. 안 그래도 일찍 일어나야 하는데, 평소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지만 입은 헤벌레 웃고 있다. 겨우 가늘게 뜬 실눈으로 김밥을 보고는 기분이 한껏 들떠 속사포로 질문을 쏟아 놓는다.
엄마 김밥 벌써 다 만들었어?
그 노란 거 넣었어?
내 도시락은 어디 있어?
김밥 얼마큼 많이 쌌어?
나 보여주면 안 돼요?
이거 나 친구들 달라고 하면 좀 줘도 돼?
엄마 엄마, 근데 나 이거 지금 먹어도 돼요? 엄청 배고픈데….
아침부터 김밥 때문에 기분이 좋은 큰아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서 그런지 둘째도 혼자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온다.
형아 다 먹으면 안 돼. 나도 나도, 나도 먹을 거야
두 녀석이 손에 집히는 대로 자기 앞접시에 김밥 꽁댕이를 가져다 놓는 모습이 꼭 어릴 적 나와 내 동생 같아 보였다. 우리도 서로 더 많이 먹으려고 싸웠었는데… 또 입으로는 싸우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애들 더 먹으라고 천천히 젓가락질을 하는 남편을 보니 괜히 아빠도 보고 싶어 졌다. 내가 싼 동글납작한 김밥을 보니 엄마가 싸주던 특별할 것 없이 평범한 김밥이랑 똑 닮았다. 김밥이 뭐라고 괜히 아침부터 내 눈앞에 있는 가족들과 멀리 한국에 있는 가족들이 다 애틋하게 느껴진다. 우리 아이들도 나중에 지구 어디에 살건 김밥을 보면 내 생각을 하려나…
조슈아, 노아가 어른이 되어서도 김밥처럼 작고 사소한 것에서도 엄마 아빠를 추억할 것이 많으면 참 좋겠다. 얘들아, 엄마가 김밥 많이 많이 싸줄게. 김밥 싸 가지고 우리 같이 재미난데 많이 많이 놀러 다니자. 약속!
- 작가: 오롱
<동독에서 일주일을> 공동저자. 한국에 나고 자람. 스위스, 미국, 독일을 거쳐 이제 막 영국에 정착. 언어, 문화, 정체성이 뒤섞인 콩가루 집안을 지키는 씩씩한 엄마.
- 본 글은 오롱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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