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에 첫눈이 내렸다. 힐더가드 어머니를 방문한 레겐스부르크에도. 어머니 댁 발코니 화단에는 핑크빛 장미가 11월에도 지지 않고 피어있었다.
뮌헨에 첫눈이 내렸다. 11월 말에 첫눈이 온다고? 그렇다. 서울에서도 뮌헨에서도 첫눈은 보통 이맘때 왔다. 올겨울은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될 수 있을까. 첫눈을 보며 가장 먼저 든 생각. 최근 수년 동안 독일에도 성탄절에 눈이 온 적이 드물다는 독일 시어머니의 불평을 들은 게 몇 년째다. 올해는 예감이 좋다. 눈이 올 것만 같다. 꼭 왔으면 좋겠다. 눈이 오면 자전거도 못 타고 불편함도 많겠지만, 그럼에도 눈 내리는 날 아침 마법의 세상에라도 온 듯한 설렘을 무엇으로 바꿀 수 있을까. 그래서 첫눈. 그러니까 첫눈. 첫눈이 온다. 첫사랑이 남기고 간 눈꽃처럼 정갈한 기쁨으로. 잊을 수 없는 그날의 맑고 곱던 눈빛으로.
슬픈 소식도 있다. 1일 확진자가 5만 명을 넘는 독일은 올겨울도 크리스마스 마켓이 전면 취소되었다. 작년에 이어 두 해째. 독일에 살면서 이보다 우울한 일이 있을까. 옥토버 페스트가 없는 뮌헨의 가을, 크리스마스 마켓이 없는 독일의 겨울이라니. 길고 지루한 겨울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 크리스마스 마켓인데. 온갖 반짝이는 것들. 따뜻한 것들. 예쁜 것들. 동화의 나라에 온 듯한 환상이 가득한. 독일 길거리에서 군밤 마로니와 달콤한 땅콩 만델을 사 먹을 수 있는 계절. 강추위 속에 양손을 비비며 뜨겁게 마시는 글뤼바인. 술을 못 마시는 사람도 따끈한 어린이용 킨더펀치로 기분을 낼 수 있지. 새콤달콤하면서 도수까지 센 글뤼바인이 돌고돌아 언 몸을 녹이고 얼어붙은 마음까지 데워주는 크리스마스 마켓. 그곳이 전부 문을 닫다니! (예전의 나는 이렇게 옥토버 페스트와 크리스마스 마켓을 애타게 기다리지 않았는데.)
첫눈 오는 날 아침에는 림프 마사지를 받았다. 성실한 새 물리 치료사의 이름은 프라우 호르카 Frau Horka. 1시간 동안 쉬지도 말하지도 않고 열심인 치료사는 그녀가 처음이었다. 마사지를 받는 동안 보온용 열기구 히터등도 켜주었다. 창밖에는 첫눈. 마사지용 침상 위로는 열전등. 그녀는 부종이 있는 내 왼쪽 다리뿐 아니라 굳어있는 복부 수술 자국까지 마사지해 주었다. 여자 치료사가 남자 치료사보다 편한 건 이런 이유다. 남자 치료사에게는 보이기가 쉽지 않다. 그녀가 마음에 드는 건 말수까지 적다는 것. 우리 동네 <해적 미용실>의 20대 남자 미용사 토비처럼. 말수가 적어서 나를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 침묵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은 많을수록 좋다.
눈 오는 날 아이 절친인 율리아나 할머니 댁에 들러 차를 마셨다. 올해 70이 되신 할머니는 아직도 자전거를 타고 장을 보시고, 두 명의 손주들이 학교를 마치면 픽업도 하시며 건강하게 사신다. 11월에 독일 할머니들을 바쁘게 만드는 일이 있다면 바로 크리스마스 쿠키를 굽는 일. 독일에서는 플레첸 Plätzchen이라 부른다. 율리아나 할머니에게 수제 플레첸을 얻어오자 아이가 맛있다며 손을 멈추지 못했다. 늦은 오후 항암 동기 이어리스와 산책을 나갔다. 오후 5시가 한밤중 같았다.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시각이지만 둘이라서 무섭지는 않았다. 영국정원 근처까지 걸어갔다가 카페바에서 뜨거운 킨더펀치를 마시고 돌아왔다. (계산은 독일식으로 더치페이. 펀치 값은 3.90유로. 이어리스가 팁 포함 5유로를 주길래 따라함. 이 경우 4.50유로도 괜찮다. 예전에도 쓴 적이 있지만, 독일 식당이나 카페에서 계산을 할 때 1) 손을 들어 종업원과 눈을 마주친다 2) 종업원이 테이블로 와서 금액을 얘기한다 3) 돈을 주며 팁을 포함한 숫자를 말한다. 4) 거스름돈을 받으며 감사 인사를 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처럼 차값이 3.90일 때 돈을 건네며 내가 정한 금액이 5면(푼프, 비테/파이브, 플리즈)라고 한다. +10%면 무난함. +20%면 장미처럼 피어나는 미소를 볼 수 있음. 종업원의 서비스가 유쾌하거나 착해서 맘에 들거나 외모가 아름답거나 세련된 매너가 매력적일 때 강추!)
11월의 마지막 일요일. 레겐스부르크에도 눈이 왔다
레겐스부르크에 사시는 힐더가드 어머니를 방문한 다음날이었다. 첫 번째 성탄절 초를 켜는 첫 아드벤트 Erster Advent 데이. 네 개의 초 중 하나에 불을 켜고, 창이나 발코니에 전등 장식을 하며, 4주 후에 올 성탄절을 기다리는 날이다. 올해 어머니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생략하실 생각이시다. 플레첸도 안 구우시고, 화재를 대비해서 아드벤스 크란츠 초도 하나만 준비하셨다. 우리와의 식사 역시 식당에서 먹거나 주문 후 직접 찾아와서 먹었다. 토요일 저녁 이태리 레스토랑에서는 두 시간 만에 음식이 나오는 전대미문의 일도 경험했다. 저녁 7시에 갔다가 저녁 9시에 식사가 나왔다. 이럴 때 독일 사람들의 반응은 어떨까. 우리 남편. 전형적인 그럴 수 있지 스타일. 말 그대로 평온하다. 기다리다 지친 어머니가 배가 고프다고 종업원에게 두 번 말하심. 평정심을 잃지 않으신 채로. 플러스 미소까지. 남편분 거드심. 빵을 좀 달라고. 배고프면 뚜껑 열리는 사람은 난데 그날은 괜찮음. 국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날 전채로 수프를 먹은 사람이 나뿐이라서. 양심에 따라 바게트는 딱 한 조각만. 맛있나 보려고. 별로.
여담인데, 다음날 아침 눈도 오는데 점심은 뭐 먹나 고심하시는 어머니께 우리가 자주 가던 중국집을 상기시켜 드리며 집에서 주문해서 먹을까요?라는 신박한 제안을 한 사람도 나였다. 물론 배달은 안 온다. 그럴 민족이 아니라서. 이럴 때 바지런하고 부지런한 남편의 진가가 드러남. 남편이 배달해올 따끈한 점심을 기다리며 이태리 형부와 서울에 사는 언니에게 간밤의 이태리 레스토랑 사건을 톡으로 전했다. 이태리에서 어제 같은 상황이 생긴다면?묻자마자 언니 왈. 말해 뭐해, 벌써 테이블 엎고 식당 뛰쳐나갔음, 이라고 듣기만 해도 청량감 있는 답이 도착. 독일 사람들 진짜 점잖네, 폭풍 칭찬도. 그 말은 맞다. 어느 테이블에서도 언성을 높이거나 언짢은 기색을 못 봤으니까. 어머니의 치매 초기 증상도 몇 번 목격했다. 첫째 날은 이태리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자고 직접 제안하신 후에 다시 저녁을 어디서 먹을까 물으셨다. 둘째 날에는 점심 후 커피를 마시겠냐고 세 번을 묻고 남편에게만 커피를 내오셨다. 남편은 세 번 다 아니오를 했고, 난 한 번에 네, 했는데도. 사랑이란 저런 것이다. 어떻게 속마음을 감추나. 그래서 어머니가 좋다. 전날 밤 남편도 아이도 자러 간 시간. 펑소에 꼭 하고 싶던 말이 있어 용기를 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우리가 어머니 곁에 남아있겠다고. 당신이 알츠하이머라는 걸 아시는 어머니가 무서워 하실까봐 드린 말씀이었다. 그러자 어머니가 나를 꼭 안으며 하시는 말씀. 우리 서로 그러자꾸나. 다음날 아침 레겐스부르크에는 하얀 눈이 내렸다.
- 작가: 뮌헨의 마리
뮌헨에 살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북 <프롬 뮤니히><디어 뮤니히><뮌헨의 편지> 등이 있습니다.
- 본 글은 마리 오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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