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명이 심해지고 보도 듣도 못한 비문증도 왔다. 눈앞에 연기가 나타나서 계속 움직이는 것. 앞으로 이들과도 함께 가야할 거란 예감이 들었다. 비관이나 낙담은 하지 않았다. 내일은 열세 번째 항암이 기다리고 있기에.
솔직히 말하자면, 이명은 항암 이전부터 있었다. 엔지니어인 남편도 요가 강사인 언니도 오래전부터 이명이 있었으니 항암의 부작용이라 하기에는 무리가 있겠다. 작년 초에 무리한 일을 하면서 이명이 재발했고, 항암 이후 더 심해진 건 사실이다. 항암을 한 지 5회 정도 지났을 때였나. 밤에만 들리던 이명이 아침에도 낮에도 들렸다. 이제는 익숙해져 이명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는다. 다른 방법이 없고, 그러려니 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항암이 평소 약한 부위에 치명적이란 것도 알았다.
약한 곳으로 치자면 눈도 빠질 수 없다. 안경을 언제부터 썼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였는지 중학생 때였는지. 어릴 때부터 눈이 안 좋았던 건 맞다. 시골에서 자라서 어두운 방에서 책을 많이 읽은 게 문제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렌즈를 쓰기도 했는데 안경보다 더 불편했던 기억이 있다. 20대 후반에 라식 수술도 했다. 언니가 하길래 따라 했는데 당시 의사 샘의 제안으로 최소한으로 수술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각막을 많이 잘라내면 중년 이후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월요일 오후였다. 현미 잡곡밥으로 죽을 끓이는 중이었다. 왼쪽 눈앞에 스크린이 생기고 그 위로 담배 연기 같은 게 제멋대로 왔다 갔다 하는 게 아닌가. 귀신이라도 본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귀로 치면 환청, 눈으로 치자면 환각? 욕실로 달려가 거울을 보았지만 눈에는 이상이 없었다. 오른쪽 눈도 괜찮았다. 인터넷을 검색하자 ‘비문증’이란 용어가 나왔다. 그런 단어는 처음 들었다. 알고 보니 남편도 언니도 경험한 적이 있다고 했다. 이것도 항암 부작용일까? 스트레스 탓일까?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은 아닐 거라 했지만.
언니가 갔던 안과에 전화하자 의사 샘의 휴가로 9월에나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다. 바바라가 알려준 안과는 곧 영업시간이 끝난다며 증상을 설명하자 당장 응급실로 가라 했다. 그때가 오후 5시. 남편 호출. 뮌헨의 종합병원 Rechts der Isar 응급실로 갔다. 6시 병원 도착. 안과에서 오래 기다린 후에야 진료 시작.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지만 그날 나는 감동을 받았다. 독일 의료 시스템을 아는 사람들은 반문할 것이다. 거기 어디에 감동의 여지가 있냐고. 우선 친절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남편이 함께 들어올 수 있어 다행이었다. 우리 둘 다 백신 접종을 마쳤기에 가능했다.
그날도 그랬다. 접수처에서 안내하는 곳으로 가니 아무도 없었다. 누군가 나타날 때까지 무한정 기다려야 했다
안과 접수실은 문을 닫았고, 대기하는 환자 한 사람만이 있었다. 그녀는 의사가 기다리라 해서 기다리는 중이라 했다. 방법이 있나. 1시간 지나 의사 등장. 서두르거나 조바심을 내면 나만 손해다. 우리 다음에도 두 명의 환자가 더 와서 대기 중이었다. 오후 6시에서 오후 7시까지 대기. 진료 사이에도 절반 이상이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나의 감동 포인트는 거기에 있었다. 젊은 여의사와 젊은 인턴은 시력 검사부터 몇 가지 검사를 차근차근 진행했고,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교수와 전화로 상담해 보겠다고 했고, 한참 뒤 결과를 알려주었다. 진료가 끝난 시각은 저녁 9시. 한 명의 환자를 위해 2시간을 소비했다. 느리다고 불평할 일은 아니었다.
결과는 이랬다. 비문증 맞음. 현재는 양호해 보이나 안심하기는 어려움. 수정체 혼탁, 망막 분리 우려, 시신경에 피가 보이는 이유로 다음날 아침 다시 검사를 오라고 했다. 추가된 주의 사항. 세 가지 증상 중 하나라도 있을 경우 즉각 병원에 올 것. 빛이 번쩍이거나 검은 점들이 비처럼 내리거나 그늘이 보일 때. 어제 아침 병원에서 전날 했던 검사들을 다시 받았다. 의사들이 우려하던 검은 점 같은 건 발견되지 않았다. 젊은 여의사는 몇 주 정도 지켜보자고 했다. 비문증은 양쪽 눈에 발병할 수 있으며, 차차 좋아질 수도 있지만 1~2주 안에 차도가 없으면 다시 오라 했다. 클리어. 진료는 깔끔하게 끝났다. 다른 주의 사항은?(독일 병원은 의사든 간호사든 안 물어보면 절대 이런 조언을 안 함.) 조깅 말고 산책은 오케이. 독서도 괜찮음.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트람 폴린. 의사의 말에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
팔월도 중순을 넘긴 이번 주부터 기온이 눈에 띄게 내려갔다. 독일의 여름은 8. 15일 자로 끝인가 싶을 정도다. 8. 18일 현재 기온은 오후 1시 기준 16도다. 간밤에는 비가 왔고 날씨가 흐린 탓도 크다. (해가 나오는 오후부터는 최고 기온 20도 예상.) 어제는 오전 11시에 산책을 나갔는데 얼마나 서늘하던지 가을이 찾아온 줄 알았다. 따뜻한 쟈켓을 입고 나갔는데도 자꾸 옷깃을 올렸다. 비문증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많이 나아졌다. 더 이상 내가 놀라지 않는다는 뜻이다. 비문증은 불안이나 공포와 닮았다. 산책을 하며 시선을 떨구는 순간 스멀스멀 다가오다가 고개를 들어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면 부리나케 모서리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흩어지는 구름이나 연기처럼 동작이 빨랐다.
그 밖에도 항암의 부작용은 더 있다. 머리카락에 비해 속눈썹과 눈썹은 제법 빠졌다. 눈썹 문신을 하고 올 걸 그랬나. 눈썹을 그려본 적이 없어서 잘 그릴 자신이 없다.
오른쪽 입 안이 헌 적이 있는데, 이번 주에는 왼쪽도 헐었다. 코피는 한 번 난 적이 있다. 한 달에 두어 번 불면증도 있고. 항암을 하고 온 날에 주로 그렇다. 항암을 하고 와서 오후에 잠을 자서 그런가. 그런 날에는 뒤척임을 포기하고 책을 읽는다. 그런 밤도 나쁘지 않다. 내 항암을 돌보느라 몸살이 났던 언니의 상태도 차츰 좋아지고 있다. 입술이 부르튼 것은 완전히 낫지는 않고 시간이 걸릴 듯하다. 반면 눈 다래끼는 차도가 있어 육안으로는 표가 나지 않는다.
오늘은 피검사를 하러 갔다가 Dr. 마리오글루 샘께 보고를 드렸다. 비문증에 대해 들으시고는 놀라신 듯했다. 이명에는 은행이 좋다며 추천하셨다. 환자들 중 개선된 사람들이 많다며. 약값이 좀 비싸다는 말씀과 함께. 약값이 문제인가. 당장 약국에서 사 왔다. 코피는 코에 뿌리는 스프레이를 추천하셔서 약국에서 은행약과 함께 구입했다. 입 안이 허는 것을 개선하기 위해서 가글액을 공짜로 주셨다. 역시 우는 사람에게 떡 하나 더 주는구나. 모르는 건 무조건 물어야 한다. 작은 부작용이라도 상담을 해야 하고. ‘비문증’ 때문에 놀라셨는지 오늘은 평소보다 더 친절하셨다. 친절이 나쁠 때가 있나. 특히 병원에서는. 은행 약이 얼마나 약효가 있을지는 복용 후에 알려 드리겠음. 기대하시라! 내일은 열세 번째 항암을 하는 날이다. 나 역시 잘 되기를 기대 중.
- 작가: 뮌헨의 마리
뮌헨에 살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북 <프롬 뮤니히><디어 뮤니히><뮌헨의 편지> 등이 있습니다.
- 본 글은 마리 오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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