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어느 날
2017년 8월 초, 베를린으로 오는 비행기 안, 기내 잡지에서 흥미로운 글을 하나 발견했다. 한국인인 글쓴이가 베를린에 대한 여행의 일부를 풀어놓은 글이었는데, 독일의 남녀혼탕 사우나에 관한 것이었다. 너무나 신기한 마음에 경험해보고는 싶었지만,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결국 가본 후의 체험담이 그것. 어색하고 민망한 감정으로 들어선 남녀혼탕 사우나가 결국엔 별 것 아니더라는, 그 나라의 문화로 받아들이고 나니 편해지더라는, 한 번쯤 경험해봐도 좋을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베를린에서 한 달 살아보기 여행을 했던 후배가 호수에서 다 큰 어른들이 누드 상태로 버젓이 돌아다니고 수영을 즐기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던 일화도 함께 떠올리며 그저 재미있게 읽어 내려가던 나는 마지막 부분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절대, 그런 경험할 일은 없을 거야.’
사람 일은 역시 모르는 거다. ‘절대’라고 함부로 단정해서도 안 되는 거였다. 베를린에 살기 시작한 그 해 겨울 방학 기간, 한국을 떠나오면서 한 번도 수영장에 가보지 못하고 여름과 가을을 보낸 아이를 위해 수영장에 가기로 했다. 베를린 외곽으로 가면 한국의 워터 파크 같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큰 규모를 자랑하는 실내 워터 파크도 있고, 도심 곳곳에도 시에서 운영하는 크고 작은 수영장들이 너무나 많아 어디든 골라 가기만 하면 됐다. 문제는 물 온도였다. 워터 파크에 가면 따뜻한 풀도 있긴 하지만, 비용이나 시간적 측면에서 효율적이지 못했고, 공공 수영장을 가자니 겨울 날씨가 걸렸다. 그때, 이미 베를린 생활 2년째이던 친한 한국 엄마가 온천 수영장을 추천했다. 말 그대로 따뜻한 물에서 수영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겨울엔 아이들이 온천 수영장으로 수영하러 간다는 것. 다만, 그곳은 독일의 온천 사우나들이 대개 그러하듯 남녀 ‘누드’ 혼탕이기 때문에 ‘수영복을 입는’ 수요일에 가는 게 좋을 거라는 친절한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대체로 남녀공용으로 운영되는 독일의 사우나들. 실제론 대부분 ‘자연인’ 상태다. 사진=kristall saunatherme ludwigsfelde(독일 온천수영장)
망설임 없이 ‘수요일’로 택해 온천 수영장에 도착한 우리는 일단 탈의실에서 멘붕이 왔다. 한국처럼 남녀 구분이 돼 있지 않은 상황이라, 여기저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한 데서 옷을 갈아입었다. 물론 간이 탈의실이 있긴 했지만, 독일 사람들은 그저 모든 게 자연스럽기만 했다. 그래도 뭐 거기까진 괜찮았다.
수영장 안으로 들어선 나는 몇 미터 못 가서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을 접했고, 그런 일은 이후로도 계속 쭉 이어졌다. 수요일은 ‘수영복을 입어야 하는 날’이 아니라 ‘입어도 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누드 온천이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수영복을 입을 수 있지만, 독일 사람들은 늘 그래 왔듯 수영복을 입을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다행(?) 인건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분들은 ‘자연인’ 상태로 버젓이 돌아다니긴 해도 젊은 사람들은 대체로 수영복을 착용한 상태였다는 것.
나도 나지만, 처음 보는 이 상황을 아이가 어떻게 인식할지 궁금했다. 그렇다고 아이가 묻지 않는 이상, 먼저 대놓고 어떠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안 돌아다니고 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나마 괜찮겠지, 우리끼리 노는 데만 신경을 집중하면 눈 돌아갈 일도 없겠지, 했는데도 물속에 있는 순간조차 너무 많은 상황이 신경 쓰였다. 하다못해 자꾸 아이가 잠수한다고 물속으로 고개를 처박는 것도. 그렇게 두세 시간을 노는 동안 어쩔 수 없이 시선이 가기도, 시선을 피하기도 하는 상황들이 없지 않았지만, 확실한 건 나올 때 즈음엔 어느덧 익숙해져 있는 나를 발견했다.
사진에 수영복 입은 사람들이 등장하지만, 현실은 당황스런 시추에이션이 많이 생긴다. 사진=kristall saunatherme ludwigsfelde(독일 온천 수영장) 홈페이지
물론 그 후로는 ‘수영복을 입는’ 수요일에도 그 온천 수영장엔 가지 않았다. 내게 그곳을 추천했던 한국인 엄마가 수요일에 갔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이상하게 쳐다보는 독일 할머니 할아버지들 때문에 물속에서 수영복을 벗어던졌다는 말을 듣고 나선 더더욱! 사우나를 사랑하는 독일 사람들을 위해 곳곳에 마련된 사우나 시설엔 가본 적이 없지만, 사우나에서 주는 커다란 수건을 둘러싸고 들어갔다가 역시 독일 할머니 할아버지 눈치가 보여 ‘탈건’했다는 간접경험도 들은 터라 앞으로 사우나에도 ‘절대’ 갈 일은 없을 것 같다.
온천과 사우나의 계절 겨울, 베를린에 처음 온 한국인 가족들이 공용 누드 온천이나 사우나에 가봤느냐고 호기심 어린 질문을 할 때마다 내 대답은 “한번 직접 가보세요”다. 각자의 경험치와 후기는 다를 수 있고, 또 문화체험 차원에서도 한 번쯤은 가보는 것도 좋을 테니. 그러고 보니, 사우나에 대해서도 ‘절대’라고 단정하면 안 되는 건가.
<그 이후의 깨달음>
어디 온천뿐이랴. 독일에는 누드 상태로 일광욕과 수영을 할 수 있는 FKK(자유로운 나체 문화) 누드비치가 제법 많은 것을 그 해 겨울이 지나 이듬해 여름부터 역시 ‘체험적으로’ 깨달았다. 아무 정보도 없이 갔다가 꽤나 유명한 FKK 호수 잔디에 펼쳐진 광경을 봤을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화들짝. 덕분에(?) 이제는 산책 중에 누군가 옆에서 벌거벗고 조깅하고 있어도 그러려니 한다.
독일의 나체 문화에 대해 들어보긴 했지만 진짜 무엇을 상상했든 상상 그 이상.
- 작가: 어나더씽킹 in Berlin/공중파 방송작가,종합매거진 피처 에디터, 경제매거진 기자, PR에이전시 콘텐츠 디렉터,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유럽통신원 활동 중, ‘운동화에 담긴 뉴발란스 이야기’ 저자
현재 베를린에 거주. 독일의 교육 방식을 접목해 초등생 남아를 키우며 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고민합니다.
- 본 글은 어나더씽킹 in Berlin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 응원의 메세지나 문의를 아래 댓글창에 남겨주세요. 댓글을 남겨주시면 작가님께 메세지가 직접 전달이 됩니다.
ⓒ 구텐탁코리아(http://www.gutentag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