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진지하게 고민하고 독일로 왔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유학이라는 단어는 내 삶에 어울리지 않는 단어라고만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뜨거운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그것은 걷잡을 수 없는 실행을 이끌었다. 그것은 배움을 향한 열정이었는지 아니면 커리어의 한 자락을 거하게 채워버리기 위한 것이었는지 여전히 잘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쉬운 길은 전혀 아니었다는 것이다.
죽을 각오로 독일어와 마주했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되돌아보니 그저 흘려보낸 시간 또한 많았던 것 같다. 외롭다는 핑계로 찾은 돌파구는 내게 힘이 되어줄 때도 있었고 좌절의 구렁텅이로 밀어붙일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책을 펼치고 독일인을 찾은 나의 행동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학교 수업에서 곧잘 발표를 하고 울렁이는 사람들 무리에서 농담도 슬쩍 던질 줄 아는 꽤 능구렁이 유학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것들은 내게 도전이다.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언어의 수준이 달라지는 외국인으로서 신경 쓰며 살아가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다. 하고 싶은 수많은 말들이 물고기처럼 머릿속을 헤엄쳐도 그저 ‘적당히’ 표현할 수밖에 없는 지독한 답답함에 마주할 때면 그날은 어쩔 수 없는 우울을 경험한다. 바로 오늘처럼 말이다.
좋은 것
부모님의 넉넉한 지원을 받으며 과외나 알바 같은 것은 하지 않고 매일 밤 친구들과 와인을 마시며 영화를 본다. 시내의 이름난 레스토랑에 가 노을 진 풍경을 마주하며 앉는다. 사랑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멋진 남자와 그윽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하루를 주고받는다. 유럽 향기 물씬 나는 거리를 걷다 음악에 이끌려 괜찮은 재즈바로 발걸음을 돌린다… 면
참으로 이상적인 유학생의 삶이라 말할 수 있겠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삶은 그랬다. 어느 정도는 사실 실현 가능하다. 허나 매일의 삶을 이렇게 살 수 있는 유학생이 있다면 그는 분명 축복받은 것이다.
현실
하지만 현실은 정말 현실적이다. 로맨틱도 희극도 아닌 모노크롬 하루가 오늘과 내일을 차지한다.
망쳐버린 발표 때문에 땅굴을 파게 되는 날 나는 우습게도 유학 생활을 접고 돌아가고픈 강한 충동을 경험한다. 하필이면 그런 날 쉬지도 못한다. 과외 수업을 위해 컴퓨터를 켜고 활짝 웃는 얼굴로 누군가를 마주한다. 말을 많이 해서 이제는 목까지 아프다. 또다시 생각한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것일까.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그저 그렇게 하고만 싶은 것일까.
그런데 나는 아직도 짐을 싸지 않고 이곳에서의 내일을 고민을 한다. 전진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좌절을 하는가 싶다가도 주어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꿈이 이끄는 힘일까 세상을 향한 나의 패기일까. 아마도 그 모든 것들 위에 내 마음이 있을 것이다. 비록 자주 험한 바람을 마주해야만 할지라도 잔잔히 비추는 햇살이 너무 따뜻해 도무지 자리를 뜰 수 없는 그런 곳. 바로 그곳만이 주는 눈부신 마음의 평안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자주 행복을 말한다
나는 자주 행복을 말한다. 현실은 미래를 보여주지 않는데 나는 이상하리만큼 자주 행복을 말한다. 외면보다 내면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들 속에 내 자아를 찾아가고, 흘러넘치도록 많아진 시간 속에 내 취향을 알아간다. 언어와 문화가 주는 고통 속에 나는 모순되게도 우정과 사랑의 뜨거운 치유를 경험한다. 배움을 향한 진지한 자세와 경쟁하지 않는 독일인들을 보며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을 만들어 나간다. 자연스레 주체성을 기르며 성장하고 있는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마음의 병을 가진 청춘
물질적인 풍요와 눈과 입을 즐겁게 하던 것이 넘쳐나던 한국에서 나는 자주 절벽 끝으로 밀렸다. 불면증이 병인 줄도 모르고 벌건 눈을 뜨고 앞으로 나아갔다.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 되는 줄로만 알았기에 멈출 수 없었고 무언가 손에 쥐어야만 했다. 예쁘다고 말해주는 애인이 있었고 어깨를 으쓱할만한 괜찮은 성적이 있었다.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부어주던 부모가 있었다. 부족할 것 없던 나는 그렇게 아름다웠던 청춘에 마음에 두려움의 병을 키웠다. 그렇게 절벽 끝으로 밀어버렸다.
나로서 살아간다는 것
그랬던 내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독일에 왔다. 어느 누구도 나와 경쟁하지 않는 것을 알게 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삶은 각자만의 속도로 걸어야만 하는 너무도 개인적이고 개성 넘치는 선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마음의 병은 타인의 눈치에서 벗어나는 순간 치유의 살을 만들기 시작한다. 한번 만들어진 주체성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마음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그것은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미소를 시작으로 인격의 성장 그리고 놀라운 사람들과의 만남까지 상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낸다.
내가 독일 유학생활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내가 나로서 바로 설 수 있는 이곳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한 자신감을 얻었다. 마음이 끌어당기는 놀라운 힘에 우주가 반응하기 시작하면 지금 당장 돈이 없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어느 순간 기대하지 못했던 방법으로 채워지며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살아갈 방법을 찾게 된다. 내 무의식은 더 이상 과거의 절벽 위 소녀가 아닌 것이다.
이제는 고통과 마주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유학생으로서 사는 삶이 또다시 눈물을 가져다줄지라도 내게는 극복할 힘이 있다. 혹여나 모든 것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삶을 선택한다고 해도 그 또한 괜찮다. 여전히 행복꾸러미는 내 손안에 있고 내 세상은 오직 나만이, 나의 선택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이기에.
- 작가: 물결 / 예술가
독일에서의 삶을 기록하는 예술심리치료사. 재미있게 사는 것이 좋은 사람.
- 본 글은 물결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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