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너무 졸려요. 아이와 함께 밤 9시부터 침대에 누우면 다음날 오전 8시경 아이와 함께 침대에서 나와요. 하루의 거의 절반을 침대에서 보내는 거 같아요.”
“수면의 질이 어떤 거 같아요?”
“나쁘진 않아요. 새벽에 아이가 깨면서 우유를 찾아서 두세 차례 깨서 먹이고, 휴대폰으로 이것저것 보다가 다시 또 금방 잠들어요. 몇 번 깨긴 하지만 그리 불편하진 않아요. 오히려 그렇게 자고도 또 낮에 졸린 게 기가 차요. 저 기면병 아닌가요?”
불면증은 물론이고, 기면증(정확히 말하면 주간 졸림증, Excessive daytime sleepiness)도 사람을 미치게 합니다. 밤 수면의 양과 질을 떠나서, 하루 종일 참을 수 없는 졸음은 삶의 질을 매우 떨어뜨리지요. 대부분 인터넷에 나와있는 <주간 졸음 자가 평가 설문(Epworth Sleepiness scale)>을 확인해보고 수면 클리닉으로 옵니다. 요약하자면 ‘아무런 자극이 없는 상황(가만히 앉아있거나 TV 시청, 독서 등등)’에서 각성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가, 얼마나 습관적으로 졸리는지 스크리닝 해볼 수 있습니다. 주간 졸림증이 있는 분들은 대부분 10점 이상의 자가 설문지를 들고 오셔서 ‘뇌 각성제’를 처방받길 원하십니다. 해야 할 공부량이 산더미 같은 중고등학생들의 경우에는 더 절실하죠.
주간 졸림증이 왜 생길까
기면병이 주간 졸림증의 대표적인 원인이 아닙니다. 주간 졸림증의 99.9%는 ‘불충분한 수면 시간’과 ‘수면의 질이 나빠서’ 발생합니다. 충분히 질 좋은 수면을 취해야 ‘잠 에너지’를 해소할 텐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만성적으로 반복되니 낮에 졸린 것이지요. 또 낮에 자꾸 졸다보면 엉뚱한 시간대에 ‘수면 에너지’를 풀어버리니, 정작 밤에 써야 할 수면 에너지가 없어 또다시 수면의 질이 나빠지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연령대별로 권장되는 수면 시간이 있지만,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자야 개운한 사람(Long sleeper)이 있는 반면에 좀 덜 자도 낮 생활에 지장이 없는 사람(Short sleeper)이 있습니다. 만약 Long sleeper인 사람이 사회적인 제약(공부량, 업무 양, 출퇴근 시간 등)으로 수면 시간이 계속 부족한 경우에 낮에 졸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Long sleeper라는 것도 ‘대한민국 사회가 요구하는 수면 시간’의 기준이 엄격해서 그렇지, 생물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 합리적인 범위의 적정 수면일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이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수면 시간은 너그럽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의 밤 시간은 너무 밝습니다. 야간 빛은 수면 시각을 뒤로 미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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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의 자율신경은 여전히 항진되어있고, 빛 공해로 인해 학생들의 뇌는 밤 12시를 저녁 8시로 착각합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대입 수험생은 초등부까지 거슬러 내려가는 것으로 감안했을 때, 수험생들의 입면 시각은 새벽 1-2 시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많이 자면 총 수면시간이 6시간, 만성 수면 부족으로 주간 졸림증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절대적인 수면 시간의 양과 질도 중요하지만, 다른 수면 질환의 가능성도 찾아봐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폐쇄성 수면 무호흡과 하지불안증후군이 있고, 그 외 갑상선 기능 저하증, 빈혈, 우울증, 당뇨와 관련이 있습니다.
진짜 ‘기면병’ vs 가짜 ‘기면병’
주간 졸림증으로 내원한 대부분의 경우 ‘기면병(Narcolepsy)’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모든 환자에게 ‘수면 다원 검사’나 ‘다중 수면 잠복기 검사(얼마나 빨리 잠드는지 확인하는 검사)’와 같이 정밀한 검사를 시행하지 않습니다(보험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굳이 시행하지 않아도 병력과 수면 일기(Sleep log), 각성 시 활동도(Actigraphy) 정도만 체크해봐도 상당수에서 기면병을 배제할 수 있지요.
정밀 검사에서 기면병으로 진단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평생 이 환자는 ‘기면병’이라는 희귀 진단을 가진 채 약을 먹으며 지내야 할까요?
2017년에 저명한 수면 학술지 에 실린 프랑스 연구팀의 연구 결론이 중요한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처음에 검사했을 때 1형 기면병으로 진단된 사람이 재검했을 때 같은 1형 기면병으로 확진될 확률이 81.3%로 떨어지고, 2형 기면병으로 진단된 사람이 재검 시 똑같이 재 진단될 확률은 47.1%로 떨어졌습니다. . (참고 문헌 : https://academic.oup.com/sleep/article/40/12/zsx164/4584523) 한번 ‘기면병’이 평생 안고 가야 할 불치병이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기면병 검사는 엉터리?
중고등학교 때 주간 졸림증으로 기면병을 진단받고서 약을 먹다가, 대학교 때 정상으로 진단되는 경우가 정말 많습니다. 수면 시간이 만성적으로 부족하고 수면의 질이 좋지 않으면 진단 검사 결과는 2형 기면병을 가리킬 수 있지요. 수면 검사는 생리적인 검사이기에, 그 당시의 수면 상태를 반영하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하면, 수면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고 질을 개선한 뒤에 재검하면 정상으로 나올 수 있습니다.
기면병에는 2가지 종류가 있다
1형 기면병은 진단 오류의 가능성이 (2형보다) 적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한 가지 타입이 더 있으나 여기서는 편의상 1형/2형 기면병만 언급합니다) 왜냐하면 1형 만의 전형적인 증상이 두드러지기 때문입니다. 감정 변화가 심하거나 졸릴 때 갑자기 근육 톤이 떨어지면서 쓰러지거나 혀가 어눌해지는 증상(탈력 발작), 수면 시 심한 꿈자리와 수면 마비, 수면 환각 증상이 병적으로 두드러집니다. 낮에도 밤에도 계속 자는 게 아니라, 밤 잠의 질이 나쁘고 계속 깨는 게 특징이지요. 낮에 수면 에너지를 모두 써버렸으니 정작 밤에는 숙면을 취할 수 없습니다. 호르몬(Hypocretin) 수치와 유전자 검사(HLA typing)에서도 1형 기면병의 진단은 확실해집니다. 그렇다면 뇌 각성제 보험 처방을 위해 확진 검사가 꼭 필요합니다.
유전자 검사나 호르몬 수치상 결과가 애매하거나 주간 졸림증 외에 뚜렷한 증상이 없이 기면병이 확진된다면, 추후 주기적으로 재검을 해서 기면병이 정말 맞는지 추적 관찰해야 합니다. 사춘기를 지나면서 수면 행태가 야행성으로 넘어가고, 너무나도 늦게 자고 수면 패턴이 불규칙하기 때문에 주간 졸림증은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만큼 기면병의 진단에 오류가 생길 수 있는 것입니다.
적정 수면 시간의 현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적정 수면 시간은 8-10시간입니다. 초등학생 연령대 아이들의 적정 수면 시간은 9-11시간, 평균 10시간이라고 하면 등교로 7시에 기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밤 9시에 취침에 들어야 합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등원하는 아이라면 밤 8시에는 잠자리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죠. 현실과 너무 다릅니다.
독일 어린이들은 ‘정말’ 저녁 8시경이면 각자 침실로 들어가 취침 준비를 합니다. 그러나, 의학 교과서 같이 살았던 독일 아이들에게도 위기가 옵니다. 2020년부터 반복되는 온라인 수업 때문이죠. 외부 활동이 줄어들면서 저녁이 되어도 졸리지 않습니다. 저녁까지 전자 매체의 빛 노출로 수면 시각이 뒤로 연장되는 야행성으로 변합니다. 늦게 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수면 패턴이 불규칙해집니다. 아침에 강렬한 태양에 노출되지 않으니 뇌는 애매하게 깨어있습니다. 활동량이 줄어드니 알차게 농축된 잠 에너지를 충전하지 못하고 밤에 자주 깹니다. 낮에 무기력하게 졸린 증상이 이어지고 활동 반경이 침대와 책상을 벗어나지 않는 악순환이 오면서 우울감과 두통도 겪습니다.
대한민국 기면병 진단 과정은 적절한 수면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적인 관습과 분위기가 엮여있는 슬픈 현실을 반영합니다. 만성적인 주간 졸림증은 ‘의학적으로 권장하는’ 수면 시간과 ‘사회적으로 용납 가능한’ 수면 시간의 격차가 유발하는 사회적 질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중고등학생은 물론이고 취학 전 아동에게까지 확대된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본인이 기면병이라고 걱정하기에 앞서, 평소의 수면 습관과 수면 시간을 반복적으로 체크해 보세요. 수면 패턴을 교정하지 않고 뇌 각성제를 복용하면, 안 그래도 야행성인 수면 패턴은 더 뒤로 연장이 되고 오전 늦게까지 졸림증이 지속되는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물론 청년기까지 불규칙한 수면 패턴을 조절하기는 어렵습니다. 40대가 되어서야 규칙적인 본인 수면 패턴을 찾는다고 할 수 있죠. 스스로 확인해보세요.
잠드는 것이 쉬운지, 계속 깨어있는 것이 쉬운지.
- 작가: 익명의 브레인 닥터 / 의사
말보다 글로 수다 떨기를 좋아하는 13년 차 신경과 의사입니다. 우연히 코로나 시대의 독일을 겪는 중입니다.
- 본 글은 익명의 브레인 닥터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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