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어느 날
지난 5월 7일 화요일 저녁, 베를린 필하모닉 콘서트 홀 안은 수많은 한국인들로 북적였다. 외국인 관객 수도 적지 않았으나 열 명 중 대여섯은 한국인으로 젊은 층이 주를 이뤘다. 한눈에 보기에도 단순 관객은 아닌 듯한, 베를린에서 음악 공부한다는 유학생들은 죄다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는데, 후에 콘서트 현장에서 우연히 만난 아이의 피아노 선생님을 통해 확인해본 바 과연 그러했다.
이날은 피아니스트 조성진의 독주회가 있는 날. 피아노를 좋아하고 피아니스트라고는 조성진과 김선욱 정도밖에 모르는 아들을 데리고 공연장을 찾은 나는 사실 ‘조성진 형아’를 본다며 한껏 기대에 부푼 아들보다 더 들떠있었다. 한국에서도 그의 공연을 볼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너무나 비싼 티켓 가격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벌어지는 ‘솔드 아웃’ 사태 등으로 인해 나처럼 열정은 있으나 게으른 관객에게까지 차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여기서도 게으른 건 마찬가지라 하마터면 놓칠 뻔한 이 공연을 지인의 발 빠른 예매 덕분에 단돈 19유로에 볼 수 있게 됐으니 어찌 흥분하지 않으랴. 그것도 좋은 좌석에서! 공연을 보기도 전부터 자랑 삼매경에 빠진 내게 지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조성진을? 19유로에? 대박!”
2시간 동안의 연주는 그야말로 황홀했다. 유튜브에서, 음반을 통해 숱하게 보고 듣던 조성진의 피아노 소리를 지척에서, 그것도 그의 숨소리며 디테일한 표정이며, 그 유명한 주먹 타건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었으니 그야말로 감동의 도가니. 처음엔 자신이 잘 모르는 드뷔시를 연주한다며 불만이었던 아이는 슈베르트 곡 연주를 시작으로 드뷔시로 이어지는 긴긴 시간 동안에도 흐트러짐 없이 눈빛을 반짝였다. 그간 피아노 독주회도 몇 번 본 적이 있고, 오케스트라 공연도 적잖이 경험했지만 아이에게도 조성진의 연주는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듯했다. 공연이 끝난 뒤 물개 박수를 치며 감상 평을 쏟아낼 때는 어찌나 뿌듯하던지.
음악이 주는 더 없는 행복감에 빠져든 그 순간, 2년 가까이 베를린에 살고 있으면서도 생각만큼 많은 공연장에 가지 못했던 지난날들의 후회마저 밀려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를린 살이를 시작하게 될 때 나를 설레게 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클래식 콘서트였다.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을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지휘자 사이먼 래틀의 임기가 끝나기 전 그와 베를린 필의 하모니를 들을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만으로, 베를린은 너무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한국에서는 일 년에 몇 번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는 무대를 정말 저렴한 가격에 마음껏 볼 수 있을 것이라며 부러워했던 지인들의 눈빛을 상기하며, 나는 베를린에 가기만 하면 클래식에 빠져 살아보리라 했었다.
헌데, 처음의 그 마음은 갈수록 희석됐다. 매주 화요일, 베를린 필 단원의 연주를 무료로 볼 수 있는 런치 콘서트를 비롯해 최고의 공연들을 언제나 볼 수 있는 풍요로운 환경에 살고 있다는 게 변명이라면 변명. 다음에 보면 되지, 하는 생각에 마치 서울 사람들이 한강 유람선을 잘 안 타는 그런 심정으로 자꾸 다음을 기약하다 보니 사이먼 래틀의 임기가 끝날 때까지도 나는 그의 무대를 보지 못했다. 다행인 것은 베를린에 와서 피아노를 더 사랑하게 된 아들 덕분에 어린이들이 경험하기에 좋은 주말 낮 공연 등은 열심히 챙겨 다녔다는 점이다.
공연장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건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클래식을 온전히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아이보다 어린 유아 관객부터 지팡이 없이는 한 발도 내딛지 못하는 어르신 관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숨죽이며 감상하고 공연 뒤 뜨거운 박수를 한마음으로 쏟아내는 장면들을 볼 때면 부러운 마음마저 든다.
조성진 공연과 며칠 뒤 이어진 주말 낮 모차르트 콘서트까지 다녀온 후, 아이는 부쩍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취미 삼아 하는 연주지만 좋은 무대를 보고 자극을 받아 자신을 더 성장시켜가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이런 게 살아있는 교육’이지 싶다. 더불어 나 역시 베를린에 처음 올 때의 그 마음으로 돌아가 열심히 공연 정보를 뒤지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면 이 아까운 공연들을 놓쳤다며 분명 후회막심할 것이므로,
조성진이 공연했던 바로 그 무대에서 6월 12일에는 살아있는 전설이라 불리는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짐머만의 공연이 예정돼 있다. 평생에 그의 무대를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의 공연이 현장 예매 10유로부터 팔리고 있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 ‘악’ 소리는 중의적 의미인 바, 하나는 ‘짐머만의 공연을 10유로에 볼 수 있다고?’ 하는 놀라움이었고, 또 하나는 나는 그 날 베를린이 아닌 다른 곳에 있을 예정인 탓에 그의 공연을 볼 수 없다는 통한의 의미다. 기회는 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식으로 그 기회를 늘 누릴 수 있는 건 아니므로 이제부터 달려보기로! 당장 이번 주 금요일 라파우 블레하츠 콘서트를 시작으로 말이다.
<그 이후의 깨달음>
이름도 잘 모르는 누군가의 길거리 바이올린 연주부터 키릴 페트린코와 바렌보임의 비현실적 협연까지, 언제고 다시 떠올려봐도 가슴 벅찬 그 모든 경험들이 두고두고 나를 행복하게 만들겠지. 감동은 티켓 값에 결코 비례하지 않는다.
- 작가: 어나더씽킹 in Berlin/공중파 방송작가,종합매거진 피처 에디터, 경제매거진 기자, PR에이전시 콘텐츠 디렉터,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유럽통신원 활동 중, ‘운동화에 담긴 뉴발란스 이야기’ 저자
현재 베를린에 거주. 독일의 교육 방식을 접목해 초등생 남아를 키우며 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고민합니다.
- 본 글은 어나더씽킹 in Berlin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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