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뛰어다녀요?
백일이 된 아이를 데리고 한국에 갔었다.
고국에 계신 부모님들께 아기를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 뒤로 아이를 데리고 두세 번쯤 더 간 것 같다.
맨 마지막으로 갔을 때는 첫째가 세 살.
아이는 독일에서 겪을 수 없는 밤문화에 (독일은 애고 어른이고 여덟 시면 자는 집이 수두룩하다) 크게 감격한 듯했다. 밤에도 여는 가게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자꾸 편의점에 가자고 졸랐고, 거만한 표정으로 편의점에서 산 바나나 우유를 입에 물고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스웩 넘치게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서울의 밤거리를 활보했다.
기본적으로 정 많은 한국 아주머니들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편이지만, 외국에서 아기를 낳아 키우다가 한국에 데려갔을 때 가끔 느꼈던 당황스러움이 있다. 미국 할머니들은 지나가는 유모차를 불러 세우는 일이 별로 없었다. 간혹 있더라도 그건 그들이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눈길로 내 아이를 쳐다보며 미소 짓기 때문에, 그 마음에 응답하고자 아기 얼굴을 잠깐 보여주려고 내가 멈추는 경우였다. 독일 할머니들도 마찬가지였다. 조용히 지나치거나, 아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덮개로 유모차를 가리고 있는데도 그 덮개를 활짝 열어보는 아주 거침없는 할머니들이 계셔서 이 늙은 엄마를 당황하게 했다. 의례적인 절차로 아기의 개월 수를 확인하게 되면 우리 손자 손녀와의 즐거운 비교가 시작되었다.
이 집 아가는 우리 손녀보다 머리숱은 훨씬 많은데 눈은 작네.
(제 눈과 머리숱을 보시지요 할머님.)
이 집 아가는 이가 몇 개나 났나.
(위아래로 여섯 개 나서 수유할 때 극한의 공포를 느낍니다 할머님.)
우리 아이가, 우리 손자 손녀가 귀엽고 예뻐서 그러는 걸로 좋게 생각할 수 있는 거였다.
나도 좋은 마음으로 받고 칭찬하면서 함께 공감해주곤 했다.
그러다 엘리베이터를 탔다.
계절이 여름이었으니 아이가 제법 컸을 때다.
우리 첫째는 말띠라 그런가, 망아지처럼 무지하게 뛰어다닌다.
별로 기지도 않고 일찍 걷기 시작했는데, 뜀박질의 기쁨을 알고 나서부터는 짧은 다리로 미친 듯이 질주를 시작했다.
그날도 시차 적응에 실패하고 새벽 댓바람부터 단지 내 놀이터에서 질주하다가, 집에 가자는 재촉에 엘리베이터 안으로 질주해 들어간 참이었다.
우리 아이의 개월 수를 확인하시는 한 할머님.
“아이구, 벌써 뛰어다녀요?”하는 질문과 함께 또래 아기를 안고 옆에 서 있는 여성, 즉 따님이나 며느님으로 추정되는 분께서 의문의 옆구리 공격을 당하셨다.
어이쿠.
공격을 당한 옆구리의 소지자 분께서는 민망함과 씁쓸함을 양념 반 후라이드 반처럼 버무린 표정으로 나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우리 애가 뛰는 데 그분의 옆구리는 왜 공격을 당해야 했을까.
벌거벗은 두 인간의 만남
Two Men Meet, Each Believing the Other to be of Higher Rank (Paul Klee, 1903)
내가 좋아하는 파울 클레의 작품.
처음에 이 작품을 흘끗 보았을 때, 나는 홉스의 자연 상태를 떠올렸다. 두 발가벗은 원시인이 마주 보고 레슬링이라도 하려는 듯 서로에게 덤벼들기 직전의 모습 같았다. 배경도 문명의 손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황량한 황무지. 그래서 <리바이어던>의 유명한 구절,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war of everyone against everyone)”을 떠올렸다.
- (홉스의 자연 상태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시다면 제가 쓴 철학동화 <자연섬 이야기>를 수줍게 추천합니다. https://brunch.co.kr/@jinmin111/17 <동화 쓰는 엄마> 영업은 계속됩니다. 발그레.)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뭔가 이상했다.
둘은 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상대의 경계를 풀기 위해 웃으면서 다가가 한 대 칠 수도 있지,라고 생각해 보지만 그러기엔 손끝이 너무 곱게 모여 있다.
덤빌 생각이라면 손끝을 날카롭게 세우거나 주먹을 쥐고 있을 텐데, 이 팔의 각도는 한 방을 날리려고 잔뜩 웅크린 각도가 아니라 사람들이 춤추기 전에 서로에게 인사하는 듯한 우아한 각도다.
게다가 손질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머리와 수염의 모습.
오. 나에게는 반전을 주는 결정적 힌트였다.
이들은 원시인이 아니라 문명의 세례를 받은 인간들, 즉 수염과 머리를 정성 들여 손질하는 인간들인데, 어떤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런 황량한 곳에서 벌거벗고 마주친 것이다.
작품 밑 제목을 보니 더욱 확실했다.
Two Men Meet, Each Believing the Other to be of Higher Rank.
알몸의 두 사람이 만났는데, 상대가 더 높은 지위일 것으로 믿고는 어색하고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서로 공손하게 절을 하고 있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홉스의 자연 상태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루소의 자연 상태로 탈바꿈되는 순간이었다.
- 자연 상태(State of Nature): 실제 우리 인류 역사의 한 순간이 아니라, 철학자들이 고안해 낸 상상의 시공간이다. 사회나 국가가 어떻게 생겨나는지 설명하기 위해 그 이전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 대표적으로 홉스, 로크, 루소가 각각 다른 자연 상태를 가정하고 그 위에서 다른 논리를 펼친다.
내가 루소의 자연 상태에 대한 얘기를 하려는 이유는, 이것이 아까 그 억울하게 맞은 옆구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우리나라 부모님들에게 꼭 소개해 주고 싶은 분. 바로 장 자크 루소 아저씨다.
루소: 인간은 어떻게 불평등해지는가
1753년, 프랑스의 디종 아카데미에서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상금을 걸고 논문을 공모했다. (원래 주제는 “인간 불평등의 기원은 무엇이며, 불평등은 자연법에 의해 허용되는가”인데 자연법까지 담기엔 글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 뒷부분은 생략.)
이 근사한 질문에 루소는 패러독스 넘치는 매력적인 문장들로 톡 쏘는 답변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Discourse on the Origin and Basis of Inequality Among Men)>으로 알려진 루소의 저작이다. 주어진 질문에 대한 루소의 답변은 간단히 말하자면 이렇다.
“인간들이 모여 살고 서로 비교하기 시작하면서 인간들 사이에 불평등이 싹튼다.”
루소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는 루소가 ‘고귀한 야만인(noble savage)’이라고 부르는 미개인들이 제각기 흩어져서 살고 있는데, 이들 사이에는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natural or physical inequality)이 존재한다.
쉽게 말하자면, 다 다르게 생겼다는 것이다.
눈이 큰 사람, 눈이 작은 사람, 머리숱이 많은 사람, 머리숱이 적은 사람, 배가 좀 나온 사람, 마른 사람.
능력도 다르다.
시력이 남들보다 좋아서 사과나무를 더 잘 발견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남들보다 빨라서 사과나무까지 더 잘 뛰어가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이렇게 자연적인 능력의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이유로 이 야만인들이 서로 만나서 모여 살게 된다. (루소는 이들이 어떤 연유로 모여 살게 되었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고, 이들이 모여 살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더 관심이 있었다. 아 뭐 지나가다 만났겠지.) 루소에 따르면,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아까 말했던 자연적, 신체적 불평등이 도덕적, 정치적 불평등(moral or political inequality)으로 변한다고 한다.
도덕적, 정치적 불평등이 된다는 건 이런 거다.
그저 ‘차이’였을 뿐인 것들이 사회 안에서 어떤 주관적 의미를 갖게 되고, 사람을 ‘차별’하는 기준으로 바뀌는 것.
예를 들면, 원래는 그냥 눈이 큰 사람이었고 거기에 아무 뜻도 없었는데 “저 사람은 눈이 크기 때문에 더 예쁘네”가 되고, 원래는 그냥 달리기가 좀 빠를 뿐이었는데 “저 사람은 달리기가 빠르니 정말 멋지다.”가 되는 것.
즉 나보다 더 월등한 인간이 되는 것이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차이가 사회적 의미를 갖게 되는 객관적 기준은 없다. 사실 굉장히 주관적이다.
한 때 중국에는 기이할 정도로 여성의 발이 작은 것을 아름답다고 여겨 전족이 유행했고, 치앙마이 북부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카렌족은 목의 길이가 길어야 미인이라 아직도 목에 겹겹이 두꺼운 링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한 여인은 목 길이가 자그마치 40cm로 기네스북에 올랐다고.(뭐, 뭐라고요.)
내 기억으로는 예전 우리 사회에서 작은 머리와 큰 가슴은 그다지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머리가 작으면 지능이 낮을 거라고 놀렸고, 가슴이 크면 둔하고 미련한 년 소리를 들었다.
지금은 머리가 크고 가슴이 없는 사람들이 왠지 슬퍼지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루소: 인간들이 불행해지는 이유
인간들이 모여 살게 되면 신체적 차이와 능력의 차이가 눈에 확연히 띄게 된다. 사람들 생각에 더 아름답고, 더 강하고, 더 노래를 잘 부르고, 더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이 눈에 띄고 이들이 인정을 받게 된다. 오징어가 한 마리면 그냥 오징어가 있나 보다 하지만, 여러 마리가 있을 땐 같은 오징어라도 매끈한 오징어가 예뻐 보인달까.
그러면 모두의 마음속에 남보다 돋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루소가 말하는 ‘허영(amour propre)’인데, 자연 상태에서 순수하게 가졌던 자기애(amour de soi)가 이렇게 사회 안에서 허영심으로 바뀌면서 인간들의 불행이 시작된다.
이게 왜 불행이냐 하면, 이 투쟁은 남들에게 인정을 받기 위한 투쟁이기 때문이다.
허영심은 나에 대한 판단이 나의 내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나와 비교되는 다른 이들, 즉 외부로부터 온다.
내가 스스로 아무리 예쁘다고 생각해 봤자 남이 그렇게 인정하지 않으면 나의 허영심은 채워지지 않는다.
따라서 더 사랑받고 더 인정받기 위해서 본래의 나와는 다르게 나를 꾸며야 하므로 나의 내면과 외면이 달라지는 상황, 즉 가면을 쓰는 자기 분열의 상황이 초래된다. 내 약점들은 숨기고, 남들이 좋고 예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나를 꾸미게 된다. 그러다 결국 “나도 내가 누구였는지도 잘 모르게 됐어, 거울에다 지껄여봐 너는 대체 누구니(BTS )” 하게 되는 것.
더 중요한 것은, 루소에 따르면 허영심은 절대적 기준보다는 관계적으로 구성되는 기준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절대평가가 아니고 상대평가다. 쉽게 말하자면 내가 여기에서 저기까지 10초에 뛸 수 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15초가 걸리더라도 내 옆에 있는 저 자식보다 잘 뛰는 게 중요한 것. 따라서 내 기록을 단축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상대와 나와의 거리를 최대한 벌리는 것이 중요해진다.
상대와의 거리를 벌리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내가 하체운동을 열심히 하고 연습을 많이 해서 저 친구보다 빨리 뛰든지, 아니면 저 친구가 다리를 다쳐서 잘 못 뛰게 되든지 둘 중 하나가 되면 된다.
두 번째 방법에서 좀 섬뜩함을 느꼈다면, 바로 보신 것. 루소는 이 허영심이 인간들로 하여금 타인에게 적극적 위해를 가할 충분한 이유를 제공한다고 본다. 결국 홉스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해를 가하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즉, 나보다 뜀박질을 잘하는 저 자식의 다리몽댕이를 분지르게 되는 것이다.
비교하면 불행해지고, 서로를 해하게 된다.
비교당함으로써, 그분의 얼굴 표정은 불편해졌고, 그분의 옆구리는 가격을 당했던 것이다.
애가 좀 빨리 걷고 빨리 뛰는 게 무슨 대수라고.
루소는 그렇게 인간 사회가 타락한다고 했다.
그 안에서는 아무도 자유롭지 못하며, 결국 자기마저도 파괴하는 악순환만 계속된다고.
(다음 편에 계속)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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