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집 H
우연으로 시작된 인연
‘지이잉’
일요일 오전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채팅 앱으로 연락이 왔다.
사랑하는 친구야,
어젯밤에 침대 밑으로 무엇인가가 바스락 거리고 지나가는 바람에 나는 한 숨도 못 잤어. 혹시 쥐였을까?
나 너무 무서운데, 혹시 지금 와서 쥐가 다닐 법한 구멍이 있는지 같이 봐줄 수 있어?
윗집에 혼자 살고 있는 이웃 H의 다급한 메시지였다.
(현재 살고 있는 5층짜리 집은 오래된 건물이라 그런지 쥐들이 종종 출몰한다. 하지만 집 안에서 쥐를 본적은 단 한 번도 없다.)
” 나도 쥐가 너무 무서운데, 우리 남편이 가도 될까?” 결국 남편과 딸아이가 손전등을 들고 비장하게 집을 나섰다. 그리고 한참 뒤에 그들은 별 다른 성과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결국 관리사무소에 연락을 해보는 것으로 사건은 싱겁게 끝나버렸지만, 다행히 그녀는 한시름 놓은 것처럼 보였다. H는 우리 집보다 두 층 위에 살고 있는 독일 여성이다. 내 키보다 한참 크고 살짝 곱실거리는 금발과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처음부터 그녀의 나이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사실 독일 사람들의 나이를 궁금해해 본적 또한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낯선 베를린에서 이렇듯 소소한 것까지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웃을 만나게 될 줄은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바야흐로 3년 전, 토요일 오후 느닷없이 현관 벨이 울렸다. 당시 한 살이었던 딸을 돌보고 있던 나 대신 남편이 재빨리 현관 쪽으로 달려 나갔다. 어렴풋이 독일어가 들려왔지만 어떤 상황인지는 전혀 알아차릴 수없었다. 잠시 후 남편은 방으로 돌아왔고 옷장에 넣어 두었던 아기띠를 꺼내어 들고는 다시 현관으로 향했다. 상황은 이러했다. 윗집에 사는 이웃에게 다른 지역에 사는 친구가 놀러 왔다. 그녀의 친구는 어린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왔는데, 그만 깜빡하고 아기띠를 챙겨 오지 못한 것이었다. 당황해하던 그녀는 우리 집에 아기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내고 용기를 내어 벨을 눌렸다 했다. 아마도 젊은 동양인 부부가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모습을 몇 번 보았을 것이고, 외국인-그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외국인이다-의 이름이 적혀있는 집을 찾기는 생각보다 쉬웠을 것이다. 그렇게 한번 얼굴을 마주한 우리는 그제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친해지게 되었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다. 그냥 우릴 향해 친절하게 웃어주는 H가 너무 고마웠고, 서툰 독일어도 열심히 들어주며, 심지어 나에게 독일어를 잘한다며 칭찬해 주었던 그녀의 마음씨가 참 따뜻했다. 서로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이 그저 마주칠 때마다 인사하고 안부를 한 번씩 묻는 그런 사이가 되었다. 매년 여름이나 겨울에 H는 3주씩 긴 휴가를 가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그녀 집 열쇠를 맡고 있다가 일주일에 한 번씩 집에 들러 식물들에게 물을 주었다. 그리고 우리가 한국을 방문하거나 길게 집을 비울 때에는 주방 창가에서 기르는 포인세티아를 H의 집에 맡기기도 했다. 이미 몇 해를 지나며 붉은 잎의 흔적이 온 데 간데 없이 온통 초록색으로 웅장하게 자라난 나의 식물을 마주할 때마다 H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레 나는 딸과 함께 계단을 두 층 올라 그녀의 집에 몇 번 놀러 가게 되었고 직접 구운 케이크도 사이좋게 나눠 먹었다. 또 가끔은 그녀가 우리 집으로 놀러 오기도 했다. 또 내가 급한 일이 있을 때는 우리 딸을 몇 시간 정도 돌봐주기도 했다. 찬찬히 알고 보니 H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고, 의사였다. 이 대목에서 속으로 살짝 놀랐다. 카페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한다는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둔 의사였다니. 독일에서 의사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한국 못지않은 힘든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고등학교 성적과 대학 입학시험 성적도 월등이 뛰어나야만 한다.
의사는 각 사람의 몸을 잘 알고, 제대로 된 처방을 해야 해. 기계처럼, 로봇처럼 처방을 내려선 안돼.
하지만 현재 병원의 시스템은 다 그런 식이야.
배가 아프면 이 약을 주고, 머리가 아프면 저 약을 주고….
사람의 몸은 각기 다른데 ,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 처방을 내릴 수 있지? 그게 너무 싫어서 그만뒀어.
스스로의 철학과 소신을 가진 그녀는 2년 전부터 채식주의자가 되었고, 지금은 자연물로 치료하는 자그마한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훗날 H는 자신의 소신을 바탕으로 어떠한 일을 하고 싶어 한다. 화학물질의 결합체가 아닌,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로 각 환자에게 알맞은 처방을 내리는 의사가 되고 싶어 한다. 구체화된 계획은 없지만 나는 그녀의 그런 점이 참 좋다. 매번 ‘뜬 구름 잡는 소리’만 한다며 엄마의 핀잔만 듣던 내 모습과 닮아서일까?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보다 때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더 큰 힘이 있음은 분명하다.
항상 좋은 향기가 나고, 식물들이 가득하며 무엇하나 억지스러운 구석이 없는 그녀의 집은 그녀와 참 많이 닮았다. 최근에 H는 거실 벽 한쪽을 올리브 그린 컬러 페인트로 가득 칠했다. 그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색이었다. 서로의 생일에 사랑스러운 메시지를 보내고, 여행을 다녀오는 길에는 꼭 작은 선물을 하나씩 챙겨주는 우리. 나도 모르게 높게 쌓아둔 나만의 높은 방어벽 틈새로 H는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스며 들어왔다. 이만큼 나누면 꼭 그만큼 돌려주어야 한다는 마음에 다른 이에게 제대로 도움 하나 청하지 못하는 나와는 다르게 있는 그대로 부탁하고 있는 그대로 베푸는 그녀의 모습이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도 작은 초콜릿 하나 사서 그녀의 현관 문고리에 살며시 걸어 두어야겠다. 내년에도 잘 부탁해- 라는 짧은 메시지와 함께 말이다.
- 작가: KIRIMI/KiRiMi 일러스트레이터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삶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득 영감을 받아 무작정 기록해보는 진솔한 이야기. - 본 글은 KIRIMI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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