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식물을 입은 도시 가드너들의 천국, 독일
누가 누가 잘하나, 집집마다 가드닝 경쟁하는 줄
# 2018년 5월 중순 어느 날
밤과 아침의 풍경은 판이하게 달랐다. 전날 밤, 공항에 도착해 임시 거처까지 이동하던 30분간, 창을 통해 봤던 도시 광경이 물리적으론 분명 베를린에 대한 첫인상이었겠지만, 첫 번째로 맞은 아침의 기억이야말로 강렬한 첫인상으로 새겨졌다. 시차 극복을 위해 빛 한 줌 새지 않도록 쳐놓은 암막 커튼을 걷어낸 순간 주위는 온통 초록이었다. 그냥 초록도 아닌 눈이 부신 초록. 살 집을 구하기까지 두 달간 임시로 살았던 동네가 우리나라로 치면 판교쯤 되는 단독주택 단지라 더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집집마다 딸린 크고 작은 정원에 온갖 나무와 꽃들로 가득한 모습을 보면서 내가 상상했던 베를린과는 전혀 다른 베를린에 와 있음을 느꼈다.
그뿐이랴. 동네를 걸을 때면 여기가 숲인지 마을인지 헷갈릴 정도로 거리거리 울창한 나무숲이 드리워져 있었다. 물론 베를린이 2500개 이상의 공원과 정원이 있는, 독일에서도 가장 높은 녹지 비율을 자랑하는 도시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한국에서는 부러 찾아가야 볼 수 있는 풍경이 흔한 일상이라니, 나는 감탄했다. 물과 녹지가 어우러진 ‘어반(urban) 정글’이라고 표현한 베를린 관광 공식 홈페이지의 말이 괜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도심은 좀 다르겠지’ 했다. 여의도 면적의 1/4에 달한다는 티어가르텐이 도심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긴 하지만, 높은 빌딩과 보눙(아파트)이 밀집한 도심은 여느 대도시의 풍경과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런 나의 예상은 절반은 맞았고 절반은 틀렸다. 도시 외곽에서 마주한 숲과 같은 거리는 흔치 않지만, 대신 건물마다 형형색색 꽃과 식물 옷을 입고 있으니 말이다.
독일 사람들의 식물 사랑은 실로 대단하다. 오후 4시면 해가 지고 아침 9시가 넘어야 해가 뜨는, 그나마 해가 떠 있는 동안에도 쨍쨍한 햇빛을 만끽하기는 어려운 5개월여의 긴긴 겨울이 끝난 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각종 식물과 꽃 화분들로 테라스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 겨울을 어떻게 참았나 싶었을 정도다. 먼저 독일 생활을 시작한 지인이 ‘봄이 되면 누가 누가 잘하나 경쟁하듯 가드닝을 한다’고 했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각종 식물을 판매하는 화원이나 작은 수목원 규모를 방불케 하는 가드닝 용품 전문점이 왜 그리 많은지, 슈퍼마켓마다 화분과 씨앗, 흙과 비료를 왜 그렇게 쌓아놓고 있는지도 이해가 됐다. 이곳 사람들에게 가드닝은 특별한 취미나 여가가 아니라 의식주만큼이나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부분인 것이다.
봄이 무르익으면서 꽃은 만개하고 덕분에 집집마다 테라스 가드닝 경쟁도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길을 걸으며 그 광경을 보고 있노라면, 나는 마치 건물에서 식물과 꽃들이 자라나는 거대한 설치미술들의 향연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한 집 한 집 각자의 개성을 드러낸 가드닝을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 걸을 때 앞이 아닌 위를 올려다보며 걷는 버릇도 생겼다. 텅 빈 테라스라도 발견할 때면 ‘저 집엔 누가 살기에?’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쯤 되니 나 역시 테라스 가드닝을 시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 이런저런 식물을 키우는 동안 ‘내 손은 똥 손’ 임을 몇 차례 깨달은 뒤로는 아예 포기하고 살았는데, 다른 집들을 보면서 뭐라도 키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의무감에 시달렸다고나 할까. 정작 작지 않은 테라스가 두 개나 있는데도 그 흔한 화분 하나 없던 우리 집엔 그리하여 얼마 전부터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물론, 여전히 스스로 ‘좋은 가드너’로서의 자질에 대한 의심이 남아있는 터라 식물 선택은 철저히 실용 위주로 골라 토마토 화분 몇 개와 깻잎과 고추 같은 ‘식용’ 작물들로 채웠다. 알록달록 다채롭기 그지없는 다른 집 테라스에 비하면 초라한 수준이지만, 그게 뭐라고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베를린에서 맞는 첫 봄, 가드닝의 시작은 미미했지만 내년, 내후년 되면 우리 집 테라스도 여느 베를리너의 그것처럼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
<오늘의 깨달음>
가드닝은 기술의 문제라고 잘못 생각하고 살았다. 식물을 키우는 일은 마음의 문제였다.
- 작가: 어나더씽킹 in Berlin/공중파 방송작가,종합매거진 피처 에디터, 경제매거진 기자, PR에이전시 콘텐츠 디렉터,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유럽통신원 활동 중, ‘운동화에 담긴 뉴발란스 이야기’ 저자
현재 베를린에 거주. 독일의 교육 방식을 접목해 초등생 남아를 키우며 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고민합니다. - 본 글은 어나더씽킹 in Berlin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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