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널드에서 만난 외로운 두 여자
1유로 커피가 주는 싸구려위로가 필요한 날
프랜차이즈의 존재는 대단하다. 세계 어디를 가나 천편일률적인 그 맛이 재미없다가도 대기업의 위세에 무섭다가도, 때로 지극히 외로운 어떤 낯선 장소에선 익숙함이 주는 안도감으로 변신한다. 내겐 스타벅스가 그랬고 맥도널드가 그랬다.
모든 것이 어색하기만 한 독일에서도 프랜차이즈 카페에 들어서는 순간, 내가 알고 있던 그 분위기와 공기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이곳은 외로운 현대인을 위한 세계 공통의 은신처였다.
그날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마음이 허하여 시내를 혼자 돌아다니다 맥도널드에 들렀다. 1유로짜리 커피가 주는 싸구려 위안이 필요했다. 그날은 평일 낮이었음에도 사람이 꽤 많았고 나는 혼자 앉아 계신 한 할머니와 동석을 하게 됐다. 할머니는 마치 내가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 몹시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독일에서 음.. 정확히 말하면 동독인 라이프치히에서 이런 환대를 받는 경우가 자주 있지는 않습니다.)
할머니가 입고 계신 높은 채도의 핑크 가디건은 희끈희끈한 흰머리와 얼굴을 가득 채운 잔주름, 드문드문 번져있는 검버섯에 깃든 외로움을 어떻게든 가리고 싶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녀는 은퇴한 연금 수급자였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오후 이 시간이면 맥도널드에 와서 커피를 마신다고 했다. 내가 아는 독일의 어르신들은 추억이 깃듯 오래된 카페를 즐겨 찾는 경우가 많은데(라이프치히만 해도 기본 100년 이상 된 카페들이 꽤나 많습니다.) 왜 이 분은 하필 맥도널드에서 커피를 마실까. 문득 궁금증이 일었다.
“할머니 많은 카페 중에 왜 여기에 자주 오세요?”
“여긴 오면 아무도 날 모르잖아. 나 같은 늙은이들은 이런 데를 잘 안 오거든.
그런데 나는 그 점이 좋아. 여기 오는 젊은이들은 보기만 해도 활기차. 그렇지 않아?”
그렇게 할머니와 말문을 트게 됐는데.. 갑자기 처음 보는 내게, 심지어 자신의 말을 반도 채 못 알아들을 내게 지나온 인생을 얘기하셨다. 간호사였던 할머니는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 환자로 온 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는 정작 별다른 일이 없었는데, 그 남자가 퇴원 후 우연히 길에서 다시 마주치면서 사랑이 시작됐고 결혼으로 이어졌다. 관공서에서 일하던 남편은 성실했고, 그녀는 어느새 아이를 품에 안은 따뜻한 엄마가 되었다. 엄마를 늘 필요로 했던 아이들은 스스로 걷게 되었고 어느덧 성큼성큼 자라 엄마를 떠났지만, 그래도 남편이 있었기에 그 허전함을 달랠 수 있었다. 불행히도 5년 전 남편이 죽었고 자녀들은 다른 도시에 살고 있어서 자주 볼 수가 없다. 할머니의 자식들 역시 본인의 자식을 키우느라 바쁘다. 할머니는 내심 서운하지만 전적으로 이해한다. 요즘엔 맥도널드에 와서 커피를 마시고, 가끔은 저녁 6시 즈음 기차를 타고 종점까지 갔다 오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나의 짧은 독일어로 이해한 것은 이 정도이고 아마 더 많은 인생의 우여곡절이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는 젊은 날의 기쁨과 슬픔을 오롯이 기억하고 있었다. 열정으로 가득했던 20대의 간호사에서 홀로 맥도널드를 찾는 할머니가 된 세월이 잔인했다. 그 긴 인생이 이렇게 단 몇 분으로 요약될 수 있다니 허망했다. 주어진 인생은 짧았고 할머니가 이야기를 하시는 그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할머니가 몸을 실은 기차는 야속하게 종점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왜 처음 보는 내게 인생을 얘기하셨을까?
어쩌면 자신의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낯선 내가 더 편했을 지도 모른다. 가끔은 모르는 사람에게 속내를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다. 위로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냥 툭-다 끄집어내놓고 싶은 날, 누구에게나 그런 날이 있다.
아름다운 몸과 우아했던 기품이 자신을 떠났다며 한탄하는 할머니에게서 나는 여전히 ‘생의 빛’ 같은 게 느껴졌다. 늙어버린 할머니의 몸에는 아직도 젊은 날의 수줍은 아가씨가 살고 있었다. 쪼그라든 심장에도 가끔은 심쿵 거림이 찾아온다. 그 작은 실낱같은 빛이 지금의 그녀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할머니를 보며 인생에서 외로움과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란 것을 직감했다. 삶은 늘 외로웠고 앞으로도 외로울 것이다. 다만 내가 할머니에게서 느꼈던 그 작은 생의 빛이 외로운 우리의 길을 비춰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꺼지지 않을 그 생의 빛, 우리는 그 빛을 따라가야 한다. 늘 마음에 품고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간간히 다가오는 외로움과 두려움따위는 그 빛에게 잠깐 빚지어도 괜찮다.
– 그 이후로 가끔 같은 시간에 맥도널드를 찾았지만 할머니를 만나볼 수 없었다. 할머니는 잘 지내고 계실까? 늘 안온하시기를 조금은 덜 외로우시기를 바란다. 서로가 외롭지 않은 날 맥도널드에서 다시 한번 만나 뵙고 싶다.
- 작가: 여행생활자KAI
독일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는 여행생활자, 주변 살펴보기가 취미인 일상관찰자 - 본 글은 여행생활자KAI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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