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에게 길을 물었다
내 삶의 결정권은 나에게 있다
퇴원 후 의사와 상담을 했다. 의사는 항암을 권했다. 남은 것은 내 선택 뿐. 그를 믿고 하라는 대로 계속할 것인가. 내가 내 건강의 주체가 될 것인가. 의사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삶의 결정권을 누가 쥐느냐의 문제였다.
뮌헨의 이자르강 산책길. 지난 주 폭설 후 5일째 눈이 녹지 않는다.
2월에 한국의 친구들과 줌 미팅을 한 적이 있다. 줌이라는 세계로의 첫발이었다. 내가 줌을 할 일이 있었어야지. 강의를 하는 것도 듣는 것도 아니라서. 줌으로 강의와 수업을 하는 친구들 덕분에 줌의 세계에 입문한 셈이었다. 친구들 얼굴도 보고 줌도 하고 일석이조. 서울과 부산과 그리고 뮌헨에서 옛 친구 4명이 동영상으로 만났다. 내가 암이라고 하자 물심양면으로 도와주고 걱정하고 마음까지 함께 해 준 친구들이었다. 단발머리 소녀 때 만난 사이다. 암 치료에 대해 열정적인 조언도 들었다. 자연치유로 암을 극복한 친구였다. 당시 나도 친구의 치유 과정을 지켜본 적이 있다. 철저한 식이요법과 매일의 침과 뜸, 규칙적인 산행. 친구의 투철하고도 굳센 의지에 매번 존경과 감탄을 보내면서. 친구는 수술도 항암도 없이 1년 반 만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친구의 사례 때문에 이 길을 선택했나? 그건 아니다. 내 마음이 강렬하게 원하는 대로 따랐을 뿐이다. 리스크가 큰 항암치료보다 리스크가 적은 쪽으로 최선을 다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항암을 하며 각종 부작용 때문에 일상생활을 영위하기 힘들거나 밀착 케어해 줄 사람도 없이 뮌헨에서 혼자 싸우는 것보다는 스스로 건강한 음식을 준비하고, 적극적으로 운동하고, 무리 없이 일상생활을 하며 스트레스 요인을 줄여나가는 쪽이 승산이 있겠다 싶었다. 암의 증상에 집중하는 항암치료보다는 암의 원인을 근본적으로 파악하고 음식과 생활 습관을 통째로 바꾸는 대처법이 장기적으로 나을 거라고 판단했다. 항암 치료는 암세포뿐 아니라 건강한 세포와 장기에도 손상을 줄 수 있고, 한 번 시작하면 멈추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시작하면 후회할 것 같았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 길을 선택하고 싶었다. 꼭 그래야 했다.
독일에서 수술을 담당했던 의사는 당연히 항암을 권했다. 방사선 치료는 권하지 않는다고 했다. 의사의 말은 이해하고도 남았다. 수술과 방사선과 항암은 세트로 현대 암 치료의 3대 개념 아닌가. 누군들 그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 내 의사가 항암을 권한 것은 당연하고도 옳았다. 그는 끝까지 자신의 직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나는 나의 담당 의사를 100% 신뢰한다. 그 역시 최선을 다해 암을 발견하고 빠른 조치를 하고 수술을 도왔다. 지금도 그에게 감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다. 의사와의 상담은 퇴원 후에 진행되었다. 그의 말대로 남은 것은 내 선택이었다. 그를 믿고 하라는 대로 계속할 것인가. 내가 내 건강의 주체가 될 것인가. 이것은 의사를 믿고 안 믿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내 삶의 결정권을 누가 쥐느냐의 문제였다. 의사에게 물었다. 제 항암의 성공률은 얼마인가요. 25%-35%. 그 어려운 항암을 성공할 가능성이 겨우 35%라고. 그것도 최대치가 그랬다. 내 방식대로 밀고 가면 절반은 넘을 것 같은데. 그것도 최소한으로. 의사에겐 미안했지만, 나는 내 길을 가기로 했다.
경험자인 친구의 조언도 귀담아 들었다. 국내의 검증된 단체에서 오랫동안 암환자들을 완치한 프로그램을 따라 하라는 말이었다. 예를 들면 식이요법과 풍욕과 냉온욕과 운동과 단식과 관장 같은 것. 이 방법은 고민이 필요 없고 따라 하기 쉽고 비싸지 않다는 장점이 있었다. 내가 매일 하고 있는 풍욕과 냉온욕도 친구의 조언에 따른 것이다. 그 두 가지는 지금도 정말 잘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는 내게 맞는 방식을 찾아서 나만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 큰 테두리에서 보면 결국 같은 길이 아닐까. 건강한 식이요법, 운동하기, 마음의 평화. 앞으로도 계속 한국을 떠나 뮌헨에서 살 가능성이 많으니까. 1-2년 단기간 하고 말 것도 아니라서. 살아있는 동안 계속 가야 할 길이기에. 친구가 들으면 서운할 수도 있겠다.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려운 길을 가냐고. 그런데 내겐 이 방법이 더 쉽고 즐겁다. 그래서 간다. 아무리 좋은 것도 억지로 하면 힘만 들고 스트레스가 될 수 있으니까.
뮌헨에 살고 있는 조카의 엄마인 친척 언니가 보내준 청국장 분말도 도착했다. 부산에 사는 언니가 주말마다 내려가는 시골집에서 직접 담근 된장과 청국장의 맛은 한국 슈퍼나 아시아 숍에서 사 먹는 된장과는 차원이 다를 수밖에. 된장에 청국장 가루를 넣어 끓일 때마다 언니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매일 보약이라 생각하며 먹는다. 독일에서 언니의 정성 가득한 수제 된장과 청국장을 먹는 호사라니. 언니와 나는 시골에서 옆집에 살았다. 우리 집을 나오면 언니 집이 있었다. 나보다 세 살이 많았던 언니와는 당시 국민학교도 같이 다녔다. 고향 마을에는 친척집들이 많았지만 언니와 가장 친하게 지냈다. 어릴 때 나를 자주 업어주던 언니의 마음은 나이가 들어도 변함이 없었다. 그토록 오랜 세월이 지났건만 한결같은 마음이라니. 언니의 속 깊은 정이 청국장 속에 날마다 새롭게 우러나오는 이른 봄날들.
1월에 친언니가 보내준 소포는 3주째 행방불명이다. 놀랄 일은 아니다. 재작년인가 연말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소포가 배달되었다는 공지도 없이 한국으로 반송되어 버린 사고였다. 이번에도 안내문도 없이 소포 박스가 사라졌다. 문제는 물어볼 곳이 없다는 것. 남편이 소포 번호를 추적해서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3주 전에 도착은 했는데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다고. 남편 왈,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나. 어쩐다, 그 비싼 우편료를 내고 보낸 소포일 텐데. 몇 번 겪으니 화도 나지 않는다. 무사히 한국이나 독일로 도착하기를 바랄 수밖에. 이럴 때 진짜 생각난다. 한국의 서비스 정신. 이럴 때 한국은 어느 우체국을 가서 문의해도 찾아줄 것 같은 믿음이 생기잖나. 독일은 아니다. 예전에는 늦어도 반드시 온다는 신뢰라도 있었는데. 코로나 탓도 있겠지. 속을 끓이면 뭐하나 나만 손해지. 암의 적은 스트레스라는 걸 매 순간 상기하며 산다.
스트레스 얘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얼마 전 기적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들은 사례라 함부로 옮기기가 조심스럽긴 한데, 너무 놀라운 이야기라 공유하고 싶어서 쓴다. 혹시라도 당사자 되시는 분이 이 글을 읽으신다면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 주시기를 바란다. 마흔 무렵에 암에 걸린 남자분이 있었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던 사람이었다. 몇 번의 수술 끝에 3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는 아내와 어린 두 딸이 있었다. 다정한 남편도 아빠도 되어 본 적이 없는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자 회한의 감정이 폭풍처럼 몰아쳤겠다. 자신이 가고 난 후 가족들이 살아야 할 날들을 생각하자 눈물도 앞을 가렸겠다. 어디서 그 많은 눈물이 숨어있었던 걸까. 한 달인가를 하염없이 울었다 한다. 울었다는 표현은 맞지 않겠다. 눈물이 절로 폭포수처럼 흘러넘쳤다니까. 단지 그뿐이었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밤낮없이 눈물만 흐르고 또 흘렀다 한다. 이후 아내의 권유로 마당을 걷고, 골목길을 지나, 두 달 후 암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일하며 살고 계시다고. 예전과 달리 다정한 남편과 아빠로, 가족들과 여행도 하며, 일도 무리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고 계시다고. 눈물은 그의 암을 녹이고, 업을 녹이고, 에고를 녹이고, 예전 생을 녹이고, 새로운 삶을 그분에게 선사했다. 이런 게 기적이 아니면 뭔가. 그러니 기적은 있다. 어딘가에 반드시.
시누이 바바라가 우리로 치면 한방과 자연치유법을 동시에 하는 의사를 소개해 주었다. 건강에 좋은 차 요법을 권한다고. 요즘 독일에서는 침도 보편화되고 있다. 이런 곳을 TCM(Traditionel chinesische Medizin)이라 부른다. 전통 중국식 치료법이다. 처음에는 이런 배려도 귀찮고, 내게 물어보지도 않고 약속을 정한 것도 언짢았다. 하필 그날은 날씨가 추워도 너무 추웠다. 지난주 폭설이 내린 후 며칠 동안 뮌헨에는 극강의 추위가 찾아왔다. 5일째 해가 나왔는데도 눈이 녹지 않았다. 밤에는 영하 15도 이하, 한낮의 기온도 영하 아래로 한참 떨어졌다. 오늘은 오전 산책을 나갔는데 기온이 영하 8도. 아마도 마지막 추위로 보인다. 내일부터는 영상으로 오를 예정이다. 그동안은 오후에 털모자를 쓰고 산책을 나가도 귀가 시렸다. 아참, 자연치료 의사는 내 맥과 혀를 살피더니 아랫배의 기운이 크게 떨어지니 2주간 약초차를 마셔보자고 했다. 차맛은 풀 맛이었고 가격은 착했다. 보름치가 39유로. 암을 착하게 만들자는 의사의 말에 나까지 착해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싱어게인 30호가 말했나. 그가 경연에 임하는 자세. 최선을 다한다. 좋은 무대를 만든다. 변명하지 않는다. 나도 그렇다. 최선을 다하고, 후회하지 않겠다.
가격도 맛도 착해서 약효마서 착할 것 같은 약초차!
- 작가: 마리 오
뮌헨에 살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북 <프롬 뮤니히><디어 뮤니히><뮌헨의 편지> 등이 있습니다. - 본 글은 마리 오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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