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노래가 주는 위로가 있다. 삶에 꽃과 노래가 없다면! 또 있다. 문어가 없다면 독일에서 나는 무엇으로 기운을 낼 것인가. 빅투알리엔 마켓에서 문어를 샀다. 덕분에 저녁 식탁이 풍성했다.
사흘째 비가 내렸다. 기온은 10도. 오월 날씨가 이게 말인가. 언니를 위해 거실의 난방을 높였다. 겨울에 언니가 보낸 파카도 다시 꺼내 입었다. 다행인 건 비가 하루 종일 내리지는 않는다. 금방 해가 나오기도 난다. 독일 사람들이 비가 와도 우산을 안 쓰고 의연한 이유다. 종잡을 수 없는 날씨를 알기 때문. 독일 사람들의 모자 딸린 방풍 방수 쟈켓도 한 몫하겠지. 오전에 일본 슈퍼에 갈 때도 비가 쏟아졌다. 남편이 아플 때면 일본 미소 된장을 국처럼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기 때문이다. 백신을 맞은 뒤엔 몹시 피곤하다 했다. 아침을 먹고 또 눕길래 언니와 나왔다. 살 건 많지 않았다. 남편용으로 미소 된장 몇 팩, 아이용으로 삼각김밥 몇 개. 집에 고추장이 떨어졌다며 언니가 샘표 고추장 한 통. 나? 나는 백신 맞은 팔이 조금 묵직할 뿐 특별한 증상은 없었다.
사람이 아프면 단순해진다. 모든 감각이 둘로 나뉜다. 몸이 편한가 안 편한가. 밥이 맛있나 안 맛있나. 잘 잤나 못 잤나. 음식도 단순해진다. 밥과 국만으로 충분한 날이 있고, 반찬이 몇 가지 있어서 더 좋은 날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아메리카노가 마시고 싶을 때도 있다. 그래서 생각해냈다. 텀블러에 뜨거운 물을 담아가서 에스프레소를 부어 마시는 방법. 라테나 카푸치노도 좋지만 우유가 섞인 건 더 이상 안 먹고 싶어서. 빅투알리엔 마켓의 로스팅 카페에서 테이크 아웃 에스프레소를 사서 나만의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마시던 날. 행복했다. 비가 오다 그치다가를 몇 번이나 반복하던 오후였다. 또 있다. 문어가 없다면 독일에서 나는 무엇으로 기운을 낼 것인가. 미꾸라지와 장어 대신 빅투알리엔 마켓에서 문어를 샀다. 저녁 식탁이 풍성했다.
꽃과 노래가 주는 위로라는 게 있다. 삶에 꽃과 노래가 없다면! 심심하고 지루하고 재미라고는 없을 것이다. 1.5kg의 대형 문어를 삶아서 저녁을 먹을 때였다. 율리아나 할머니가 전화를 주셨다. 뮌헨에 돌아온 걸 축하한다며 줄 것이 있으니 잠시 내려오라는 말씀. 문어를 먹다 말고 언니와 함께 뛰어내려 갔다. 1층 현관문을 열어놓고 기다렸다. 할머니가 들고 오신 건 작은 꽃이 만발한 다육이 화분과 마카롱과 딸기. 전날엔 율리아나 엄마 이사벨라의 전화도 받았다. 동료 중에 척추뼈에 암이 생긴 두 아이의 엄마가 있는데 잘 투병하고 있으니 나도 기운 내라고. 자기 엄마가 조만간 날 한번 보고 싶어 하신다고. 나도 할머니께 꽃을 드린 적이 있다. 한국에 가기 전날이었다. 빅투알리엔 마켓에서 장미를 사다 이사벨라에게 주었다. 율리아나 할머니께 전해 달라고. 인사 못 드리고 가서 죄송하다고. 한국 다녀와서 뵙겠다고.
금요일 밤에는 <유명가수전>도 보았다. 김연자라는 가수도 트로트의 세계에도 큰 흥미는 없었다. 조카의 엄마인 선희 언니가 요즘 한국은 트로트가 대세라며 한번 들어보라 했지만 한국에서도 <싱어게인> 돌려보기만 완주하고 왔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김연자 편은 정반대였다. 47년 관록은 함부로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이크를 올리고 내리고, 들었다 놓고, 던지고 받는 동작 하나조차 범상치 않았다. 시작을 메들리로 갈 때 흘러넘치던 흥과 끼. 열정으로 빛나던 그녀의 얼굴과 눈빛. 꾸밈 없고 솔직한 토크도 좋았다. 웃고 또 웃다가 아픈 것마저 잊었다. 자신을 미워했던 <아버지>를 위해 노래하던 정홍일은 감동이었고, 이승윤의 <아모르 파티>는 감동 이상이었다. Amor fati.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그 말. 나는 준비되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투병하는 나의 운명까지도.
- 작가: 뮌헨의 마리
뮌헨에 살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북 <프롬 뮤니히><디어 뮤니히><뮌헨의 편지> 등이 있습니다.
- 본 글은 마리 오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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