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위해 울어주는 이가 있다. 나는 안 울어봤다. 태어나기 전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엄마 뱃속에서 평생 흘려야 할 눈물을 다 흘려버렸나. 태어난 후로는 울어본 기억이 없다. 남을 위해서든 나를 위해서든.
우리 병실에는 나를 포함하여 여섯 명의 환자가 있었다. 세 명의 할머니와 20대 아가씨 한 명, 서른 살가량의 새댁 한 명. 자세한 사정은 모르지만 턱이 부러져 수술을 받았다는 20대 아가씨는 성 소수자인 것 같다. 이런 내밀한 사정을 어떻게 알았냐 하면 그녀가 내 맞은편 침대에 있기 때문이다. 수술을 앞두고 매일 밤낮으로 전화를 하는 바람에 귀가 있는 한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야 그녀의 일에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그녀의 사생활을 듣지 않으려 귀마개를 할 수는 없으니까. (참고로 나는 성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없다.) 서른 살가량의 새댁은 내가 좋아하는 친구다. 그런 사람 있잖나. 보면 그냥 좋은 사람. 물론 그녀의 부산 사투리가 한몫한 것도 부인하지는 못하겠다. 부산 영도에 산다니 더 반가웠다. 영도 토박이 내 친구 K가 생각나서. 솜털 보송하던 서른 살 남짓 새댁이 퇴원한 날은 슬펐다. 병실에서 유일하게 말을 주고받던 사이였는데. 애기 새댁이 떠나던 날은 햇살마저 좋았다.
세 할머니는 모두 팔순이시다. 한 분은 불만이 많으시고 매사에 투덜대셨다. (병원에서 가장 먼저 퇴원시키더라!) 두 달 전에 무릎 수술을 받으셨는데 인대가 빠져서 다시 수술을 받으러 오셨다. 그 정도면 할머니의 불만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할머니는 내 맞은편 중앙에 계셨는데 할머니답게 남의 일에 관심이 많았다. 할머니 양 옆 20대와 30대가 커튼을 치고 폰만 들여다보고 있으니 자연히 할머니의 관심이 맞은편에 있는 중년의 나에게 쏠린 것도 자연스럽다. 적당히 무시하고 못 본 척하다가 퇴원하시는 날에야 말을 나누었다. 내 라인의 입구 쪽 할머니는 허리를 못 움직이셔서 하루 종일 누워계신다. 그런데도 늘 웃으신다. 밤낮으로 뽀시락 거리며 과자를 드셔서 맞은편 새댁이 잠 못 들고 힘들어했다. 그런 할머니를 간호사들이 찡그리지 않고 돌봐드리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내 옆의 할머니는 매서운 눈빛을 가지신 분이다. 한국의 시어머니 하면 떠올릴 만한 인상이다. 머리를 박박 깎고 계셔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가 왔을 때는 며느리 되시는 분이 같이 있었다. 뇌수술을 하셔서 코로나임에도 예외적으로 보호자가 있는 케이스였다. 온화한 표정과 목소리를 가진 며느리는 내 나이 정도였는데 예의가 바르고 무례하지 않아 좋았다. 문제는 내가 오고 이틀 후 그녀가 떠났다는 것. 우리 병실에서 가장 오래 입원 중인 할머니의 무료함이야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내가 할머니의 무료함을 덜어드릴 의무는 없지 않나. 내 코도 석 자인데. 그런 오지랖 떨며 살다가 내가 암까지 걸린 거 아닌가. 나는 할머니와 커튼을 반쯤 치고 거리두기를 했다. 할머니의 기대는 이해 된다. 며느리가 떠나면 또래로 보이는 나와 이야기도 나누며 무료함을 덜고 싶으셨겠지. 저 여자가 뭐하다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도 하셨을 것이다.
나라고 왜 모르겠는가. 할머니의 마음. 내게도 팔순을 바라보는 노모가 있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찬송가 비슷한 노래를 트신 적이 있다. 보청기를 쓰시는 분이라 이해는 되지만 침대 바로 옆에서 찬송가를 듣는 것은 고역이었다. 음악만큼 호불호가 심한 것도 없지 않나. 가만히 있으면 매일 그러실 것 같아 용기를 냈다. 커튼을 살짝 걷고 부드러운 표정으로 부탁을 드렸다. 어머니, 음악 들으셔도 좋은데 소리만 조금 줄여주실래요? 말씀드리고 나서 스스로 감격했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구나!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고 평생을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다. 할머니의 반응? 바로 꺼버리심. 그리고 며칠 후였다. 누운 자세로 TV를 보시려면 내 커튼이 반쯤 걷혀야 해서 항상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할머니는 내 커튼의 반이 불만이었다. 왜 답답하게 커튼을 치고 사는지. 밥 먹을 때 얼굴 보고 얘기도 못하게. 식판을 펴고 책을 읽고 있는데 내 식판 위에 TV 리모컨을 탁 소리 나게 놓고 가셨다. 뭐지? 이 행동은? 말없이 일어나 리모컨을 TV 아래 냉장고 위에 올려두고 왔다. 화는 안 났다. 생각보다 무례한 분이시구나 싶었지만.
복도를 걷다 보면 자주 보는 환자들이 있다. 대부분 연로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대부분이지만 젊은 환자들도 제법 있다. 간호사들이 어느 특정한 병실에 들어서며 늘 하는 멘트도 들었다. 욕 하지 마세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웃음이 났다. 어떤 짜증도 화도 묻어나지 않고 팩트만 전하는 목소리. 저렇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표현할 수도 있구나. 듣기 좋았다. 어느 사십 세 가량의 남성 환자도 인상적이었다. 링거 폴대를 끌고 걷는 그의 발걸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하고 불안해 보였다. 문제는 그가 잠시도 침대에 붙어 있지 못하는 타입이라는 것. 틈만 나면 병실을 나서려는 환자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감시하는 간호사들의 실랑이. 환자는 1층의 편의점에 가야 한다고 우겼다. 간호사들은 안 된다고 했다. 넘어지면 큰일 난다고. 어느 날 기어이 감시망을 피해 편의점에 다녀온 환자분. 어이가 없어 웃던 간호사들 손에 하나씩 들려지던 음료들. 그날 오후 옆 침대 할머니께 곱게 썬 오렌지를 드렸다. 할머니의 눈빛이 금세 부드러워지심. 팔순 할머니의 마음을 힘들게 할 이유는 없다. 좋은 게 좋을 때도 있으니까. 저녁 때는 친정 엄마가 보낸 콩나물과 김가루와 총각무도 나눠드렸다. (사실은 병실에서 음식을 나누면 안 된다.)
한국에 와서 세 명의 언니들이 나를 위해 매일 울어주었다. 육촌 언니이자 뮌헨의 조카 엄마인 선희 언니는 매일 전화와 톡으로 안부를 물었다. 날 위해 뭐라도 해 줄 수 있는 게 행복이라는 선희 언니. 부산의 전통 시장을 뒤져 귀하디 귀한 늙은 호박 두 통을 구해 푹 고아 보내겠다는 언니. 내가 퇴원하면 서울에 와서 내가 먹고 싶어 하는 샤부샤부를 같이 먹자는 언니. 내 부종과 불면증이 낫는다면 그것은 언니의 사랑과 정성 덕분일 것이다. 부산의 Y언니는 나를 생각하며 매일 10km를 걷고 있다고 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그토록 걷기 싫어하던 언니가 나를 위해, 나의 회복을 기원하며 하루에 2만 보를 걷는다고. 퇴원만 하면 가자미 미역국을 끓여 한 달음에 달려오겠다는 Y언니의 눈물과 사랑이 오늘도 나를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고 나를 걷게 한다. 서울에도 있다. 나의 J언니. 내가 좋아하는 콩나물 비빔밥을 해주겠다고 목을 빼고 기다리는 언니. 내 소식을 듣고 내가 힘들까 봐 날마다 울던 언니.
또 있다. 청국장에 김치에 퇴원하면 맛있는 거 사 먹이라고 돈까지 보내신 보살님. 자신은 안 만나고 가도 좋으니 부디 잘 회복하라는 고마운 보살님. 내 치료비를 걱정해주는 친구 K도 있다. 의료보험이 살아있고 국립병원이라 병원비도 얼마 안 나오는데. 농담으로 불로초를 가져오라 했더니 미리 준비한 뜨거운 삼계탕을 들고 한달음에 달려와 주던 내 친구 Y. 멀리서 휴가를 내서라도 얼굴 보러 상경하겠다는 친구 M. 무슨 일이 있겠거니, 묵묵히 내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 주는 오랜 벗들. 나를 위해 고향집에서 매일 108배를 하신다는 우리 삼촌. 강렬한 의지로 내가 떨쳐 일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신다는 우리 고모. 새벽마다 날 생각하며 눈물 흘리시는 우리 샘. 매일 현미밥과 국과 나물을 보내시는 친정 엄마와 코로나로 얼굴 한 번 못 보는데도 병원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친언니의 노고는 말해 무엇하랴. 나는 무슨 복이 이리도 많나. 고마워서 또 눈물짓는 병원의 새벽 5시.
(글 안 쓸 땐 언제고 갑자기 무슨 글을 이리 자주 쓰냐고? 지루해서 쓴다. 지루함을 이기려고 쓴다. 병원의 하루가 너무 길어서. 병원의 내 밤은 당신의 낮만큼이나 길어서.)
- 작가: 뮌헨의 마리
뮌헨에 살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북 <프롬 뮤니히><디어 뮤니히><뮌헨의 편지> 등이 있습니다.
- 본 글은 마리 오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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