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떠나기 전까지 체력을 70%까지 끌어올려 하루에 8킬로를 걷던 내가. 오늘 보건소에서 두 번째 코로나 테스트를 하고 보건소 앞 공원을 걷고 돌아와 녹초가 되었다.
어찌 부종뿐이랴.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보건소에서 코로나 테스트를 위해 임시 천막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 춥고 진이 빠졌다. 코로나 테스트는 두 가지였다. 코 안 테스트를 할 때는 나도 모르게 한 발을 뒤로 뺐다. 그러면 검사가 어렵습니다. 입 안 테스트를 할 때는 물러서지 않았다. 하루 뒤 음성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자가격리를 마치기 전날에도 코로나 테스트를 또 받아야 한다. 이 코로나 테스트를 오늘 다시 받았다. 부종 때문에 더 이상 산책을 미룰 수 없어서다. 테스트를 받고 다음날 음성을 받으면 오전과 오후 각 1시간씩 산책이 허락된다. 지금 나는 다시 환자 모드다. 체력이 하나도 없다. 아랫배 부종도 안 낫고, 한 번도 없던 변비까지 생겼다. 출국하기 직전까지 체력을 70%까지 끌어올려 하루에 8킬로를 걷던 내가. 보건소에서 코로나 테스트를 하고 보건소 앞 공원을 걷고 돌아와 녹초가 되다니.
어찌 부종뿐이랴. 장시간의 비행과 시차는 나를 수술 직후의 허약한 상태로 되돌려놓았다. 첫 사흘은 밤낮으로 먹다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으슬으슬 춥다가 난방 매트를 높이면 금세 더웠다. 이후 나흘간은 진정한 불면의 밤이 찾아왔다. 뜬눈으로 세웠다. 팔짝 뛰다가 돌 것 같았다. 눈만 감으면 헛것이 보였다. 악몽을 꾸는 일이 거의 없는 편인데 잠이 들었나 싶으면 악몽 때문에 식은땀을 흘리며 깼다. 심약해졌나. 다행히 지난밤에는 잠을 좀 잤다. 귀국 후 8일 만의 극적인 변화다. 시차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 그런 건 없다. 잠이 오면 자고 안 와도 순응하며 기다리기. 시차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자가격리는 언니네에서 한다. 원래는 친정 엄마를 언니 집으로 모시고 내가 엄마 집을 쓰려고 했다.
보건소에서 고령이신 친정 엄마를 배려해서 언니 집에서 자가격리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유도 없이 입맛을 잃었다. 시차와 장거리 비행이 원인 같았다. 그토록 그립던 엄마의 음식도 소량 밖에는 못 먹는다. 나는 소식도 괜찮은데 가족들과 친구들은 걱정이 크다. 활동량이 없어서 많이 먹는 게 오히려 별론데. 원래 있던 이명 현상도 심해졌다. 병을 달고 가게 생겼다. 올 때는 프랑크푸루트를 경유했다. 프랑크푸루트에서 대기 시간은 6시간. 힐더가드 어머니가 사 주신 비행기표는 알고 보니 비즈니스! 통도 크신 어머니. 그런 얘기를 진작 안 해 준 남편은 뭔가. 비행 스케줄표를 보고 알았다.
강철체력의 소유자인 남편은 두 번 나에게 물었다. 왜? Warum? 진심 궁금해서. 내가 도착한 후 기진맥진했다니까. (왜 기진맥진하지?) 이런 남편과 살 때의 비애감. 그리고 내가 입맛을 잃었다고 했을 때. (왜?) 엄마가 해 주는 음식 먹고 싶다고 난리 치며 떠난 게 언제라고. 아침에 출근한 남편에게 톡으로 나 더는 뮌헨에서 못 버티겠어. 갈 거야, 한국! 그렇게 해서 갑자기 비행기표도 끊었는데. 언제 가고 싶냐고 묻길래 자기 생일 지나고 했더니, 생일 다음날로 끊어줬는데. 그런 내가 내 침대, 내 욕실, 이자르강 산책길 운운하며 징징거리고 있으니.
아이는 내가 뮌헨을 떠나기 전에 오래 벼르던 문제를 어떻게든 마무리하려고 벼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고양이. 안 돼! 다음은 강아지. 안 돼! 삼세 번은 햄스터! 이건까지 노 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이 승! 파파는 물어보나 마나다. 아이가 원하는 건 뭐든 다해 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이미 물밑 작업이 있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말이 나오자마자 수족관 사이즈의 집부터 만들어지는 게 수상해 않나? 햄스터 대신 쥐과로 3마리를 입양한 건 내가 한국에 도착한 후였다.
카타리나 어머니와 오토 아버지는 출국 직전 주말에 남편과 아이와 바바라와 같이 찾아뵈었다. 암 발병 후 눈물 바람으로 반드시 건강한 모습으로 두 분을 찾아뵙겠노라 했던 다짐은 훌륭하게 지켰다. 어머니는 기뻐하셨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셨다. 너 괜찮냐? 똑같은 질문에 답은 달랐다. 그때는 아뇨, 저 안 괜찮아요. 이번엔 네, 저 괜찮아요. 그때처럼 그분의 손을 마주 잡고 소리없이 눈물을 흘릴 때. 처음은 차가운 슬픔의 눈물이었고, 두번째는 뜨거운 기쁨의 눈물이었다. 어머니와 같이 슈탄베르크 호숫가로 산책도 나갔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 가볍게 걷는 내 모습에 어머니가 다시 기뻐하셨다. 그날은 사진도 찍었다. 기쁜 날은 기념하는 법이지!
출국 전날 아이가 말했다. “엄마, 한국에 가면 할머니랑 많이 놀아줘. 할머니 외롭다. 이모야랑 이모부가 일하러 가면 엄마가 할머니랑 같이 밥도 먹고 드라마도 보고 그래.” 아이들은 모르는 게 없다. 그럼 이참에 엄마도 숟가락 하나 얹어볼까? “너두! 힐더가드 할머니께 매일 전화드리는 거 잊지 마.” 나는 아직 약속을 못 지키고 있고, 아이는 지키고 있다.
- 작가: 마리 오
뮌헨에 살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북 <프롬 뮤니히><디어 뮤니히><뮌헨의 편지> 등이 있습니다.
- 본 글은 마리 오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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