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여가의 완벽한 조화
부럽다 ‘워라밸’
일 년 연차만 30일, 병가는 별도라고?
2019년 7월 초 어느날
“’언더커버 보스’라는 TV 프로그램 알지? 그 프로그램 미국판이 방영될 때 어떤 CEO가 직원 포상으로 한 달짜리 유급 휴가를 보내줘서 미국에선 난리가 났었어. 그런데 말이야, 독일 사람들은 전혀 감흥이 없었어. 독일에선 한 달 유급 휴가가 그렇게 특별한 상황이 아니니까 그럴 수밖에.”
지난봄이었나, 미국인이면서 현재는 독일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H와 식사를 하던 중 그가 말했다. “정말? 그 정도야?” ‘독일이 유럽에서 가장 적게 일하는 나라이고, OECD 국가 중에서도 근로 시간이 최소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달씩이나 휴가를 간다고? 독일 사람들은 일 못지않게 개인의 삶을 중요하게 여긴다니, 눈치 보지 않고 긴긴 휴가를 갈 수도 있겠네. 그래도 설마, 모두가 그렇진 않겠지. 다 그렇다면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겠어?’ H에게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머릿속에선 많은 말들이 떠돌았다.
그리고 몇 달 후, 나는 H의 말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7월 초, 장장 7주가 넘는 긴긴 여름방학이 시작됨과 동시에 직장인들의 여름휴가 시즌이 막이 오르면서였다.
“우리는 15일 동안 이탈리아에서 보낼 계획이에요.” “저는 한 달간 아이슬란드에 있을 거예요.” “우리 가족은 방콕, 홍콩, 오키나와를 여행하고 3주 후에 돌아올 거야.”
옆집 사는 젊은 동거인 커플은 이탈리아로, 아이의 독일어 선생님은 아이슬란드로, 내 독일인 친구 가족은 아시아로 각각 짧게는 보름에서 길게는 한 달까지 휴가를 떠난다고 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듣자 하니, 주변의 많은 이들이 긴 휴가를 떠났거나 떠날 계획이었다. 2주는 차라리 짧은 편에 속했고, 3주 이상 가는 경우도 흔했다. ‘독일 사람들은 일 년 내내 여름휴가를 준비하는 것 같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었는데, 괜한 말이 아니었다. 그렇게 긴 휴가를 가려면 오랜 준비와 계획이 필요할 테니 말이다.
한국에선 꿈도 꿀 수 없는 이 상황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보편적 경우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꿈같은 일을 가능케 하는 것은 법적으로 보장된 긴 연차 때문이었다. 독일 직장인들이 일 년 간 사용할 수 있는 연차는 5일제 근무 기준으로 연 20일 정도인데, 보통 기업과 근로자 간 자율협상을 통해 정해지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연 30일 정도의 연차 휴가가 주어진단다. 이는 신입사원의 경우라 해도 마찬가지. 거기에다, 많은 기업들이 초과 근무 시간을 수당이 아닌 휴가로 쓸 수 있게 하는 ‘근로시간 저축 계좌제’를 운용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직장인들이 장기휴가를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연차 15일에, 최대로 붙여 쓸 수 있는 기간은 보통 일주일, 그마저도 누군가에게는 그림의 떡인 경우가 많은 우리나라의 상황을 생각하니 상실감마저 들었다. 모든 직원들이 빠짐없이 1인당 연차 30개를 다 소진하다 보니 같은 팀원들이 다 함께 모이는 날이 손에 꼽힌다는 말은 어찌나 현실감 없게 들리던지.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몸이 아플 때 전화 한 통만 하면 당당하게 결근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독일이다. 그것도 유급으로, 연차를 사용하지 않고 말이다. 연속 3일 이상 결근 시에만 의사의 소견서 제출이 필요할 뿐, 이틀까지는 ‘나 아파요’ 한마디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쉴 수 있다니, 시쳇말로 ‘이거 실화냐?’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악용하는 근로자들도 많다고 한다. 연차는 연차대로 장기 휴가로 쓰면서, 개인적으로 볼 일이 있을 때는 ‘병가’를 내는 식이다. 독일 정부에서 운영하는 실업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지인이 말하기를, 거기 모인 사람들의 90% 이상이 개인적 사유로 병가를 사용해본 적이 있다고 말했을 정도라는데, 솔직히 많은 직장인들이 뿌리치기 어려울 정도의 달콤한 유혹 아닌가?
최근 다시 H를 만났다. 그는 독일 직장인들에 대한 부러움을 쏟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업종에 따라서는 장기 휴가나 병가의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긴 한데, 대부분의 독일인들의 삶은 노동 강도가 엄청난 한국인들에 비해서는 분명 행복한 편이지. 근데 퇴근 시간 땡, 하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독일 직장인들도 근무 시간 중에는 진짜 집중적으로 일해. 출근해서 퇴근 때까지 거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 경우도 많고, 점심도 그저 때우는 정도로 넘기는 경우가 대다수지.”
짧게 일하고 많이 쉬지만 업무 효율성과 생산성은 높다는 얘기였다. (물론 독일 공무원들이 일하는 걸 보면 절대 동의할 수 없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반 회사’의 케이스인 것 같다.) 요즘 직장인들이 꿈꾸는 ‘워크 앤 밸런스’의 최종 지점이 바로 거기 아닐까. 독일에 있지만 철저히 한국식으로 일하고 쉬는, 한국 근로자 가족인 우리는 얼마 후 떠날 일주일짜리 휴가에도 이렇게 들떠있는 것을, 독일 근로자들의 방식으로 살면 어떤 느낌일까, 진심 궁금하다.
<오늘의 깨달음>
일 년에 30일씩 휴가 쓰면 어떤 기분일까. 진심 경험해보고 싶다!
- 작가: 어나더씽킹 in Berlin/공중파 방송작가,종합매거진 피처 에디터, 경제매거진 기자, PR에이전시 콘텐츠 디렉터,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유럽통신원 활동 중, ‘운동화에 담긴 뉴발란스 이야기’ 저자
현재 베를린에 거주. 독일의 교육 방식을 접목해 초등생 남아를 키우며 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고민합니다.
- 본 글은 어나더씽킹 in Berlin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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