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 정답은 없다고
친구가 말했다
오늘도 해가 나서, 오늘도 걷고 읽고 먹고 쓴다. 살아야 할 이유 없이도 봄에는 꽃이 피고.
이번 주 산책길에 처음 만난 봄꽃들(위/가운데)와 지난 주에 만난 장미 정원의 봄꽃들(아래). 꽃들의 이름은 모르지만. 노란 꽃은 산수유, 너냐?
이번 주 월요일은 수술 한 지 만 두 달째였다. 그날은 약간 체한 듯 속이 불편하고 가벼운 몸살기가 있어 산책을 쉬었다. 수술 후 두 달을 버티느라 몸도 마음도 힘들었구나. 전기 매트 온도를 높이고 푹 쉬었더니 다음날 아침에는 나았다. 아이들(우리 아이 알리시아와 아이 친구 율리아나)가 산책 따라가는 걸 안 좋아해서 1주일에 두 번 데리고 간다. 요즘 뮌헨은 날씨가 좋아 나 홀로 산책도 괜찮다. 한국의 구정 전후로 들이닥친 한파가 물러간 후 매일 해도 나온다. 이번 주도 계속 맑음. 낮 기온은 15도까지 오른다. 독일에 살면서 이보다 반가운 일은 없다. 꽁꽁 얼었던 산책길이 마르는 것도 산책의 즐거움 중 하나다. 그사이 체중이 또 1킬로 줄었다. 현미밥과 청국장은 잘 먹고 있고, 수면의 질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데 한국 음식이 죽도록 그리운 것도 팩트다.
림프부종은 예상보다 회복이 더딘 편이다. 다리는 나았지만 아랫배의 부종은 안 빠진다. 혹시 부종이 아니란 말인가. 림프 테라피는 총 10회 중 6회를 마쳤다. 남은 4회는 한 달이나 지나서 3월 중순으로 잡혔다. 그 전에는 어렵다나. 아이고 참, 마사지사도 마음에 안 드는데 일정까지 안 따라준다.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고. 대기자 명단에 이름만 올려놓고 의료기 전문점에서 의료용 압박 스타킹을 주문했다. 내가 주문한 것은 두 종류. 허벅지까지 오는 롱스타킹과 아랫배까지 오는 팬티스타킹. 주치의에게 처방전을 받으면 무료다. 개인이 사려면 하나에 100유로가 넘는다고. 의료기 전문점에 직접 가서 치수를 재고 주문 제작하는 방식이다. 추워서 차일피일 미루다 늦어졌더니 테라피 매니저분께 혼났다. 롱스타킹은 금방 찾고, 팬티스타킹은 1주일 후에 찾았다. 최강의 탄력이라 신고 벗는 게 여간 일이 아니다. 괜히 ‘압박’이란 단어가 붙었겠나. 하루 종일 신고 산책까지 가는데 기분상으론 림프부종에도 꽤 탄력이 붙을 듯하다.
독일의 자연치료법에도 관심이 있어 알아보았다. 인터넷을 검색해서 찾은 의사를 남편과 방문했다. 고주파 열치료가 있어서 관심이 간 이곳은 건강보험 비적용 클리닉이었다. 상담을 하니 독일은 단독으로 열치료만 받는 건 안 되고 항암이나 방사선과 연계하거나 고용량 비타민 요법과 연계는 가능하단다. 다 좋은데 문제는 비용이겠지. 친절하게 주 2회 총 7주 견적을 상세하게 뽑아주심. 에누리 없이 만 유로. 우리 돈으로 천만 원을 웃돈다. 한국도 비싸다고 들었지만 예상대로 독일도 만만치 않구나. 남편을 먼저 내보내고 중년의 담당 여의사에게 쉴드를 쳤다. 항암 말고 어떤 자연치료를 받을지는 결정하지 못했고, 비용도 중요한 고려 사항이라고. 동서양을 불문하고 이럴 때 남편들은 비용 생각을 안 하고 얘기도 못한다. 여자들이 칼을 들고 두부 자르듯 정리를 해줘야지. 얼마나 오래 걸릴지도 모르는 일. 이제 스타트 라인에 선 나는 더더욱 신중해야 한다. 의사는 이해한다고 했다. 충분히 생각해보고 결정하라고. 당연하지. 돈이 있다고 한들 저건 너무하지 않나? 천만 원에 죽고 사는 청춘과 노년층이 얼마나 많은데! 그 돈이면 봄가을로 한국에 몇 번이나 날아갈 수도 있고.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는데. 한국에 못 가는 게 스트레스라면 그게 남는 장사 아닌가. (이 글 읽고 설마 송금하시겠다는 분은 없겠지? 돈이 있어도 안 하겠다는 뜻인데..)
열치료 좋은 줄 나도 안다. 고용량 비타민 요법도 나쁘지 않지. 모든 치료가 그렇듯 한번 시작하면 중도에 그만두기 어려우니까 그렇지. 내가 관심 있는 건 즐겁고 편하고 안 비싸고 일상에서 평생 할 수 있는 것. 그게 뭘까 자나 깨나 생각한다. 예를 들면 하루 한 번 풍욕, 하루 한 번 반신욕, 하루 한 번 10킬로 산책. (스쿼트는 몸이 좀 더 회복한 후에 하기로 했다. 배에 힘을 주고 제대로 한번 했다가 복부에 통증이 생겨서다.) 거기에 추가할 수 있는 건 사우나. 우리 집에서 가까운 뮌헨의 공공 수영장에 쾌적한 핀란드식 사우나가 있어서다. 가격도 괜찮다. 달 목욕 가듯 다니면 좋을 깃 같다. 도이치 뮤지엄 근처라 이자르 강을 산책하며 오갈 수 있어 접근성도 좋다. 로젠 가르텐과는 반대 방향. 오전 사우나, 오후 산책. 근사하지 않나. 이런 게 멋진 인생이지. 원래 사우나나 찜질방을 안 좋아하는데 그게 대수인가. 급하면 바꾸면 되지. 내가 아는 할머니 중에서 한국에서 매일 달 목욕을 다니시던 분이 계신데 연세가 팔순이 넘도록 건강하시던 기억이 난다. 주말이면 산을 좋아하던 내 친구 Y도 온천욕을 자주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건강하고 바람직한 습관 같다. 좋은 건 무조건 따라 하기!
주말에는 남편과 함께 오전 산책을 했다. 야채즙만 먹는 아침이 너무 싫어서 울적한 날이었다. 특히 주말 아침이면 더 그랬다. 나도 겉이 바삭하고 속이 촉촉한 독일빵 셈멜을 먹고 싶다. 향긋한 빵을 반으로 잘라 한쪽엔 크림치즈 위에 브리치즈를 올리고, 나머지 반쪽엔 계란 프라이를 올려서 먹고 싶다. 마멜라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거기다 부드러운 카푸치노 한 잔! 아침마다 야채즙의 쓴 맛 때문에 입맛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남편이 사무실로 출근하려다 말고 산책에 동반했다. 이자르강 수위가 왜 이렇게 낮냐. 지금쯤이면 눈이 녹아 강 수위가 오를 땐데. 남편이 혼잣말처럼 물었다. 나야 뭐 모르니 강물 위의 오리 떼나 날아가는 새들만 바라볼 밖에. 암환자인 나와 AI 분야 개발일을 하는 남편은 주말이 없다. 한 명은 산책을 하고 한 명은 출근을 한다. 둘 다 자발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예전처럼 주말이면 느긋한 아침을 먹고 이자르 강가에서 나는 산책을, 남편과 아이는 자전거를 탔으면 좋겠는데. 그럴 날이 곧 오겠지.
언니가 보낸 새 책들도 도착했다. 읽기가 없는 삶은 지루할 것이다. 뇌로 가는 자극들이 줄어들 테니까. 언니가 보내준 책 중에서는 걷기 책을 먼저 집어 들었다. 일본 의사가 쓴 책의 제목은 <병의 90%는 걷기만 해도 낫는다>. 일본 건강 관련 책답게 간결하고 두께가 얇았다. 한나절 걸으며 읽기에 딱 좋았다. 걷기를 찬양하는 책이니 걸으며 읽어주는 게 맞지. 그 전에는 눈이 녹지 않은 로젠 가르텐에서 <힐링 코드>도 읽었는데 의외로 걸으며 읽는 즐거움이 크다는 걸 알았다. 언니의 책과 함께 Y언니가 보낸 상황버섯도 도착했다. 물처럼 끓여먹으란다. 고맙다. 한국 가면 언니랑 온천천 많이 걸어야지. 마치 걷기 결사 동호회 회원이라도 되는 듯이. 사흘 동안 뮌헨 동물원까지 왕복 9킬로를 걸었다. 어제는 걷는 동안 내 친구 M과 통화를 했다. 내가 아이를 낳으러 한국에 갔을 때 만난 친구. 나와의 만남을 열렬히 반겨주던 친구의 모습과 변함 없는 마음을 기억한다. M아, 나 갑자기 살아야 할 이유도 의미도 헷갈려. 친구야, 살아보니 인생에는 정답이 없는 거 같아. 그냥 사는 거지. 친구의 말을 듣고 심오하게 붙들고 있던 글을 가볍게 올린다. 오늘도 해가 나고, 나는 걷고 읽고 먹고 쓴다. 봄꽃은 피고, 이 봄 나는 갑자기 살아야 할 이유가 필요하다 생각했다. 없다고 못 살 것까진 없지만.
- 작가: 마리 오
뮌헨에 살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북 <프롬 뮤니히><디어 뮤니히><뮌헨의 편지> 등이 있습니다.
- 본 글은 마리 오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 응원의 메세지나 문의를 아래 댓글창에 남겨주세요. 댓글을 남겨주시면 작가님께 메세지가 직접 전달이 됩니다.
ⓒ 구텐탁코리아(http://www.gutentag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