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으로 기억되는 겨울’나 떨고 있니?’
저기압으로 인한 저혈압 증세들, ‘기상병’ 부르는 변덕스러운 독일 날씨
2018년 11월 초 어느 날
요즘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그 대상이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대화의 내용이 대개 비슷하게 흘러간다. 이런 식이다. ‘겨울이 시작됐어, 오후 4시 반만 돼도 벌써 어두워, 5개월 넘게 이럴 텐데 걱정이야, 그래도 올해는 작년보다 낫지 않아? 11월인데 춥지도 않고 비도 거의 안 오잖아, 올 가을이 길고 따뜻해서 진짜 행복했지, 겨울이 빨리 지나가면 좋겠다.’
날씨 이야기야 나라를 불문하고 영원한 화젯거리지만, 독일에서 겨울은 단순히 ‘추운’ 계절 그 이상의 의미다. 한파 불어 닥치는 서울보다 평균 기온은 높을지 몰라도, 잿빛 하늘에 추적추적 내리다가 그치기를 반복하는 비, 햇빛을 거의 보기 어려워 우울하고 음산한 분위기가 5개월 이상 지속된다. 이 시기, 사람들은 모두 검은색 계통의 옷을 입고 발목까지 올라오는 신발을 신은 채 비를 맞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걸어 다닌다. 어쩌다 반짝 해가 보이기라도 하면 다들 햇살이 잘 비치는 곳으로 몰려들어 참새들마냥 나란히 나란히 앉아 볕을 쬔다.
독일에 온 후 힘든 겨울나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사실 직접 겨울을 나보기 전까지는 뭔가 기대감이 있었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설렘이었을 수도 있고,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다들 겁을 줄까, 하는 호기심도 있었던 까닭이다. 한번 겪어보니 괜한 엄살이 아니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겨울 시즌에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얘기도 종종 들었는데, 그 또한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겨울뿐만 아니라 독일 날씨는 사시사철 변덕스럽기로 유명하다. 비가 쏟아지다가도 쨍한 햇살이 내리쬐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잔뜩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는다. 비가 왔다 개었다 추웠다 더웠다를 반복하니 사람들은 늘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비하는 ‘여러 겹’의 옷차림을 선호한다. 머리에 꽃 꽂은 사람처럼 왔다 갔다 하는 날씨를 일 년 넘게 겪고 살다 보니 매일 아침 그날 날씨를 체크하는 게 일상이 됐다. 집을 나서는 그 순간의 날씨만 보고 옷차림을 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옷차림만 어려운 게 아니라, 날씨 탓에 없던 ‘병’도 생겼다. 어느 날부턴가 비행기 이착륙 시 고도 차이로 인한 증상처럼 귀 한쪽이 먹먹해지는 증상이 반복되기 시작한 것. 처음에는 단순히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는데,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비슷한 증상을 겪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누군가는 그보다 심하게 이명이 들리는 증상이 있는 경우도 있었고, 두통을 심하게 앓는다는 사람도 있었다. 한인 커뮤니티에도 독일에 살게 된 후 이유를 알 수 없이 아프고 늘 피곤하고 무기력하며 수면시간이 길어지는 등의 증상을 호소하며 원인을 궁금해하는 글들이 많이 올라와있었다.
이에 대해 의학적, 과학적으로 분명히 밝혀진 바는 아니고 독일 내에서도 여전히 논쟁거리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는 저기압과 그에 따른 저혈압이 원인이라는 분석이 많은 게 사실. 잦은 비와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대기 중에 산소 함유량이 낮아지는 저기압이 자주 발생하고 이로 인한 혈압의 변화로 두통이나 현기증, 소화불량, 귀가 먹먹해지거나 이명 현상 등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기압, 기온, 습도, 바람 등 급격한 기상 변화에 따라 몸의 조절 능력이 떨어지는 이른바 ‘기상병’인 셈.
횟수는 줄었지만 여전히 가끔 귀가 먹먹한 증세를 겪기도 하는 나는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는 겨울이 시작되면 비타민D를 강박적으로 챙기고 독일 사람들이 그러듯이 해가 나오면 일부러라도 볕을 쬐러 나가는 등 나름의 대처를 하고 있다. 적당한 양의 카페인이 혈관 수축을 도와준다며 매일 커피 한잔을 권하는 이도 있고, 밝은 실내조명과 적절한 실내 온도 및 습도 유지, 꾸준한 운동이 필요하다는 ‘경험적’ 처방들도 분명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요즘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독일 겨울에 대한 경험이 만들어낸 심리적 이유도 있지 않을까. 멋모르고 맞았던 작년 겨울과 달리 올해 겨울을 맞는 나의 자세는 이미 심리적으로 위축돼 있는 것처럼. 어쨌거나 독일에서 맞는 두 번째 겨울은 이미 시작됐다. 오후 4시 반이면 해가 지고 5시면 이미 깜깜해지니 긴긴밤을 잘 보내기 위한 아이디어가 필요할 때. 독일이 칸트와 쉴러, 괴테와 니체, 쇼펜하우어 등 대문호와 철학자들은 물론, 베토벤, 바흐, 헨델과 같은 위대한 음악가들을 배출한 데는 사색과 사유를 가능케 한 독일 날씨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그럴듯한 분석도 본 적이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겨울밤, 와인 한잔 마시며 일기라도 한편 써야 하려나.
<오늘의 깨달음>
11월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드는 생각, ‘내년 4월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어차피 지날 거라면 가능한 즐겨보자.겨울이 길면 봄이 더 찬란할 거야.
- 작가: 어나더씽킹 in Berlin/공중파 방송작가,종합매거진 피처 에디터, 경제매거진 기자, PR에이전시 콘텐츠 디렉터,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유럽통신원 활동 중, ‘운동화에 담긴 뉴발란스 이야기’ 저자
현재 베를린에 거주. 독일의 교육 방식을 접목해 초등생 남아를 키우며 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고민합니다.
- 본 글은 어나더씽킹 in Berlin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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