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 바람이 불면 어김없이 뜨근한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는 욕조가 그리워진다. 특히 조깅을 하고 지친 근육들로 집에 돌아오면 더욱더 욕조가 생각난다. 그래서 나는 자기 전에 계획에 없던 1인용 욕조를 아마존과 Ebay에서 찾아보았다. 역시나, 나 같이 혼자 살아도 어떻게든 욕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사람들이 있나 보다. 고무로 만들어진 아기용 수영장의 깊은 버전과도 같은 욕조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면 지금 샤워실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는 것과 동시에 Ebay에서 블랙프라이데이라고 준 5유로 쿠폰이 떠올라 아주 빠른 속도로 클릭 클릭을 하였다. 11월 26일에 결제를 하였는데 12월 2일에 도착 예정이라고 뜬 것을 보고 연말에 그것도 코로나까지 끼여 있는 아주 열악한 상황 속에 일주일 안에 도착한다니, 이 정도는 충분히 기다려 줄 수 있지, 생각하며 결제한 날부터 욕조만을 기다렸다.
결제하고 다음 날 아침, 내가 잠든 사이, 새벽에 판매자로부터 쪽지가 날아와 있었다. ‘네 주소가 우리 시스템 상에서 안 나와. 이거 확실한 주소 맞니? 다시 확인해줄래?’ 였는데, 이제까지 다른 택배들은 아무 문제없이 잘 받아 왔던 터라 이건 무슨 일이지, 생각하며 천천히 주소를 다시 알려주었고, 그렇게 쪽지가 5번 정도 오고 간 후에 배송이 시작되었다는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쪽지를 주고받으며 판매자에 대해 조금 살펴보니, 판매자는 독일어가 능통한 중국에 사는 중국인인 것 같았고, 물류 창고만 독일에 있는 듯했다. 그래서 쪽지는 중국 시간인 새벽에 보내는 것이었고, 사용하는 시스템도 그래서 뭔가 달라서 내 주소가 나오지 않았었나 보다 싶었다. 잠깐, 그럼 내 욕조는 중국산이겠구나..
12월 2일, 오후 3시 반쯤 로비로부터 인터폰으로 택배가 왔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다. 야호! 오늘 저녁에 조깅하고 돌아와서 바로 욕조 할 수 있게 미리 조립해놔야지, 생각하며 방에 도착해서 상자를 뜯었는데, 오잉 이게 뭐야. 뭔가 삼각대 같은 것이 나왔다. 놀란 마음에 다시 한번 상자에 붙어 있는 이름이 내 이름이 맞는지 확인하고 또다시 확인한 후, 상자 안을 자세히 살펴보니 ‘softbox lighting kit’ 라는 설명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뭔가 사진을 찍거나 유튜브를 제작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조명판 같았다. 이런 일은 또 생애 처음이라 구글과 네이버에 ‘Ebay 택배 오류’, ‘Ebay 택배 잘 못 옴’, ‘Ebay 택배 오배송’ 등으로 검색해 보았지만 나와 같은 경우는 거의 없나 보다. 대부분이 주소를 잘 못 적어서 생기는 일이거나 아예 판매자가 물건을 보내지 않고 잠적해버리는 사기를 당하는 경우였다. 허탈한 마음을 안고 주소 확인을 하던 담당자와의 쪽지에 답장으로 ‘나는 욕조를 주문했는데 다른 물건이 왔어. 이거 어떻게 된 거니? 내 욕조는 어디 간 거니? 이 물건은 어떻게 해야 하니?’라고 보냈다. 터덜터덜 조깅하러 나가서 같이 뛰는 분에게 물어보니 판매자에게 말하면 다시 보내줄 것이다, 아니면 Ebay에게 사기당했다고 말하면 환불받을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했지만 나는 환불 말고 욕조를 안전하게 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 울적한 기분마저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역시 여기 시간으로 새벽 4시쯤에 답장이 와 있었다. ‘그 물건 사진을 찍어줄 수 있니? 창고에 보여줘서 확인을 해야 해서 필요해. 그리고 욕조와 다른 물건이 같이 온 거니, 아니면 다른 물건만 온 거니?’ 그 많고 많은 심심한 사과의 인사말조차 없이 받은 물건의 사진을 찍어서 보내라니, 거기다 욕조를 못 받았다는 내 글은 제대로 읽은 건지, 이 물건 반품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얻고 싶던 정보는 하나도 못 얻어 답장을 읽고 난 후 왠지 모를 허탈함이 더 커졌다. 나는 바로 반환할 수 있게 테이프로 상자를 다시 붙여놓은 상태였기에 다시 테이프를 뜯고 상자를 열어 물건들을 찍어서 보내주었다. ‘여기 물건들의 사진이야. 욕조를 못 받았단다. 어서 나의 욕조를 주렴’ 욕조 받기 참 힘들다 싶을 무렵, 다시금 쪽지가 왔다. ‘물건들을 하나하나 포장된 속 상자까지 다 꺼내서 찍은 후 사진을 다시 보내줄래?’, 나의 참을성에도 슬슬 한계가 오기 시작했다.
어찌 되었든 욕조가 갖고 싶은 사람이 을이고 욕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갑이다. 나는 다시금 삼각대와 조명 역할을 하는 면 부분과 그 외 부품들을 꺼내어 일일이 사진을 찍었고, 거기에 더하여 박스에 붙어 있는 바코드 같은 것이 있다면 그것 또한 보내달라기에 모두 첨부하여 쪽지를 보냈다. ‘내가 지금 왜 이런 일까지 하고 있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구나. 그래서 내 욕조는 언제 받을 수 있는 거니?’
다음 날, 확인 완료와 함께 주말에는 창고가 일을 하지 않으니 다음 주 월요일에 바로 송부하겠다고 하였다. 이번에도 뭔가 다른 요구만 하며 나의 욕조에 대한 행방을 알려주지 않으면 Ebay에 신고를 할까 생각까지 하였는데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비켜 간 듯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택배 번호까지 받아내어 기다렸는데, 엄청 빠르게도 이틀 만에 왔다. 이틀 만에 도착이라니, 너무 빨라서 깜짝 놀랐다. 거기다 잘 못 온 물건은 다시 찾아갈 생각도 없나 보다. 테이프로 받은 모습 그대로 붙여놓고 반환하려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거 어디에 두어야 할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다.
한 번 당해서 그런지 괜히 이번에도 다른 물건일까 봐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걱정도 잠시, 박스를 여는데 고무 냄새가 엄청나서 이번에는 나의 욕조가 맞는구나 싶었다. 펼쳐두면 냄새는 금방 빠지겠지 생각하며 조립을 하려고 설명서를 펼쳤더니, 어머나, 모든 것이 중국어다. 그 흔한 영어조차 한 글자도 없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중국산, 진짜 중국산이 왔구나 싶었다. 구글 번역기의 도움을 받아가며 하나하나 맞춰나갔다. 공기 주입을 하면 고무 뚜껑으로 막기 전에 이미 공기가 반 이상 도로 빠져나가 버려 몇 번을 시도하느라 공기 주입하는 것이 꽤 힘든 난관이었지만, 그래도 얼추 모양새는 만들어졌다. 샤워실에 가져가 보니 샤워실 칸에도 딱 맞아서 신기했다. 물을 받기 전에 한 번 들어가 봤는데 생각보다 공간이 넓어서 잘 산 것 같다. 오늘 드디어 오랜만에 욕조에 몸을 담가 보는구나!
저녁을 먹고 대망의 욕조 타임을 가지기 위해 먼저 욕조를 물로 한 번 헹구고 따뜻한 물을 담았다. 유후, 욕조라니, 독일에서 욕조라니! 이런 사치가 어디 있냐며 혼자 만족하며 찌뿌둥한 몸을 담그고 오랜만에 때도 밀었다. 이제야 진짜 연말 기분이 든다. 밖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때까지 미는 이 패턴. 진짜 연말이다.
정말 이때까지만 하여도 바로 다음에 나에게 닥칠 일을 상상하지 못했다. 욕조 타임을 슬슬 마무리할까 싶어 욕조 밑 부분에 있는 물 빼는 호스를 살짝 풀었더니, 어머나, 물이 욕조 밖으로 나오면서 샤워실 바닥에 고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싶어 보니 욕조에 물이 가득 들어 있어 자체 무게가 무거워져 샤워실에 물이 빠지는 하수구를 이 고무 욕조 자체가 막고 있었던 것이다. 황급히 물 빼는 호스를 다시 잠그고 욕조를 옮기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정말 물은 식겁할 정도로 무겁다. 옴짝달싹하지 않는 욕조를 보며 망연자실하였다. 그러다 내 눈에 보인, 손빨래할 때 사용하는 빨간 양동이로 물을 퍼서 세면대로 날라 물을 버리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생각에 미쳤고, 그 후 나는 욕조에서 물이 거의 없어질 동안 물 퍼다 나르기만 수십 번을 하였다. 그리고 겨우 욕조가 움직여졌을 때 하수구 옆으로 욕조 자체를 옮겨 호스를 풀었고 그제야 물은 바닥에 고이지 않고 말끔히 다 내려갔다. 욕조에 몸을 담가 기분 좋게 푼 나의 근육들과 나의 정신은, 급작스러운 물 퍼다 나르기라는 노동으로 다시 지칠 대로 지쳐버렸지만, 좋은 교훈을 얻을 수 있었고, 이제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다행스러움의 큰 한숨이 내쉬어졌다. 다음부터는 하수구를 막지 않도록 조심해서 장소 선정을 해야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방에 욕조가 생겼다는 것이 뿌듯하고 기쁘다. 이제는 감기 기운 있을 때, 힘들 때, 근육통이 있을 때, 언제든지 물을 받아서 몸을 담글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 누군가가 내게, 이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음에도 다시 욕조를 주문하고 오배송되어 걱정하다 받고 조립하는데 낑낑대며 첫 타임에 양동이로 물을 퍼다 나르는 것을 다시 할 것이냐, 묻는다면 나는 한시의 망설임도 없이 할 것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기나긴 추운 겨울의 시작과 함께 나에게 온 고무 욕조여, 이번 겨울을 잘 부탁한다.
- 작가: 몽글맹글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걸 좋아합니다. 쓰면서 정리합니다. 주로 독일에서의 일상 및 매일의 삶 속에서 언젠가 기억하고 다시 꺼내보고 싶을 작고 소중한 일들을 기록합니다.
- 본 글은 몽글맹글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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