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항암을 마쳤다. 요즘은 콩국수와 돼지 목살과 두리안에 빠졌다. 잘 먹으니 항암도 잘 버티나 보다. 애가 많던 비타민 C 요법 클리닉은 다른 데로 옮기기로 했다.
여덟 번째 항암을 마쳤다. 뮌헨은 이번 주 내내 비가 오고 기온은 20도 안팎이다. 다음 주부터는 계절의 여왕이라 불릴 여름 날씨가 귀환한다. 기온은 30도를 넘지 않고, 습도는 적은. 얼마나 쾌적하고 좋을 것인가! 그런데 요즘 내 체중은 항암 시작 전보다 2~3킬로가 늘었다. 아직은 50킬로 대에 머물고 있지만 체중계에 올라설 때마다 조마조마하다. 이게 다 우리 언니 때문이다. 언니는 뮌헨에 온 이후로 매일 유튜브를 끼고 산다. 두 가지를 죽어라 파는데 그중 한 가지가 요리다. 쌍둥이인 언니는 나와 달리 뭐든 적당히 하는 법이 없고 한 우물을 파는 스타일. 대충 먹어도 될 텐데 레시피에 목숨을 거심. 결론은 내가 잘 먹고 있다는 뜻이다. 언니가 요즘 밥상에 자주 올리는 건 돼지 목살. 가격도 좋고 고기도 좋고 기름기도 없다며 하루 건너 목살 파티. 얇게 썰어온 거라 위에 부담도 적다. 단백질이 풍부한 닭가슴살은 잘게 썰어서 간장 데리야끼로 해준다. 내가 먹어본 가장 맛있는 닭가슴살 레시피로 등극!
나는 면을 좋아한다. 요즘 매일 생각나는 건 냉면과 콩국수. 독일에서 냉면을? 국수를? 엄청 쉽다. 면과 냉면 육수는 물론 콩국물까지 한국 슈퍼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시아 마트가 근접성도 좋고 가격도 싸지만 나는 한국 슈퍼를 이용한다. 믿을 수 있고, 한국 슈퍼의 발전을 위해서. 아파 보니 알겠더라. 한국 슈퍼가 가까이 있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없는 게 없다. 사 먹는 건 몸에 안 좋다고? 아파보시라. 생각나는 건 한국 음식뿐이고, 그렇다고 모든 메뉴를 언니에게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 국수 한 번 안 삶아본 사람인데. (한국에서는 친정 엄마와 이태리 형부가 요리 담당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국수까지 잘 삶으신다. 유튜브 만세!) 나는 온면을 좋아해서 콩국물이든 냉면 육수든 따듯하게 데워서 면을 말아먹는 반면 언니는 일편단심 새콤 매콤한 비빔면 주의자.
독일은 과일이 싸다. 싸기만 한가. 신선하고 맛있다. 과일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면 말 다한 거 아닌가. 독일만 그런 건 아니고 유럽이 다 비슷할 것이다. 한국이 비현실적으로 과일 값이 비싼 나라에 들겠다. 과일 말고 채소도 싸다. 뮌헨은 외식비가 비싼 도시 중 하나라 집밥을 먹는 게 건강에도 좋고 가정 경제에도 도움이 된다. 빵, 치즈, 햄, 살라미, 마멜라데(잼)와 요구르트가 대부분 저렴하다. 지난번 백혈구 수치가 떨어져 두 번이나 항암을 쉰 이후로 고기도 자주 먹고 있다. 그때 이후 금기는 와인, 맥주, 커피 3인방. 쿠헨과 아이스크림은 수술 전에 끊었다. 와인과 맥주는 시부모님과 식사를 할 때 한두 모금 마신 적이 있고, 커피는 주말에 마셨는데 항암 기간 중에는 백해무익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
다양한 과일을 매일 먹을 수 있는 것도 언니 덕분이다. 마트에서 장보기를 나만큼 싫어하던 사람이 독일에 온 후로 매일 슈퍼에 출근 도장을 찍고 있다. 독일어는 못하지만 영어와 이태리어가 되니 불편함을 못 느낀단다. (뮌헨은 영어가 잘 통하고 이태리 가게나 이태리 사람들도 많다.) 내가 좋아하는 과일은 참외와 복숭아와 체리. 참외는 한국에서만 먹을 수 있지만 복숭아와 체리는 여기서도 실컷 먹을 수 있다. 체리는 올봄에 많이 먹었고, 복숭아는 지금이 제철이다. 애기 수박도 자주 먹는다. 한국 수박보다는 덜 달지만 물 대신 수분 섭취용으로 좋다. 열대 과일 중에서는 자타 공인 과일의 왕 두리안과 내 맘대로 퀸으로 등극시킨 파파야가 최고다. 비타민 C가 풍부한 파파야는 독일 슈퍼에서 구할 수 있고 가격(4.99€)도 저렴한 반면 두리안은 아시아 마트에서 냉동으로 판다. 단백질이 많다. 가격은 비싼 편(작은 팩 하나에 9.99€).
여덟 번째 항암을 하고 온 날. 오후 산책 때 10km를 걸었다. 항암은 아침 8시 반부터 12시까지 세 시간 반이 걸렸다. 처음에만 책을 펼쳤다가 대부분의 시간은 졸았다. 인간의 의지로 물리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잠은 마취처럼 스며들었고 아프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항암이 끝나면 산부인과 로비로 내려가서 열치료를 받기 전에 언니가 싸 준 샌드위치를 먹는다. 견과류나 씨앗을 뿌린 통밀빵에 크림치즈를 바르고, 바나나와 얇게 자른 사과에 치즈 한 장도 끼워준다. 보기에도 영양가가 많고 맛도 고소하다. 샌드위치와 따듯한 차 한 모금으로 몽롱한 정신을 챙긴다. 항암 때 그렇게 자고도 열치료 때 잠이 오냐 하면 온다. 집에 와서도 점심을 먹고 또 자고. 항암을 잠으로 이기고 있다고 우겨도 되겠다. 항암 받는 날 하루만 유독 그렇다.
요즘은 항암을 할 때 나 혼자 간다. 아침엔 남편이 차로 데려다주고, 돌아올 땐 트람과 지하철 우반을 갈아타고 온다. 동선이 익숙하고, 우반과 트람을 합쳐봐야 20분 남짓이라 체력적으로도 부담이 없다. 무엇보다 언니가 같이 와서 여섯 시간 이상을 기다리는 게 마음에 걸려서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뿐인가. 집에 가자마자 점심을 준비해야 한다. 지금은 내 항암 시간에 집에서 쉴 수도 있고, 유튜브를 보며 공부도 하고, 내가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점심을 준비해주니 좋다. 아이 하교 시간도 그 무렵이라 더욱 안심이 된다. 엄마가 항암 중인데 이모가 집에서 점심을 챙겨줄 수 있는 아이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나 역시 상상도 못 했다. 내가 혼자서 항암을 다닐 수 있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뮌헨 종양센터의 자료를 보다 놀란 사실이 있다. 환자들에게 권하는 운동 중에 산책은 안 쳐주더라는 것. 조깅, 자전거 타기, 수영 등은 있던데. 이런 공룡 같은 사람들. 그럼에도 내가 살 길은 산책뿐이라 굳게 믿는다. 독일 사람들처럼 태어나면서 수영을 하고, 걷자마자 자전거를 타고, 자나 깨나 조깅을 하던 몸이 아니라서. 갑자기 무리를 할 수 있는 나이나 형편도 아니고. 항암이 끝나는 9월까지 내 목표는 이렇다. 매일 10km/15000보/2시간. 보폭을 크게 하고, 물동이를 이고 걷는 것처럼 걸으려 노력한다. 이번 주부터는 요가도 시작했다. 일주일에 세 번 1시간씩. 무리가 되지 않도록 언니가 세심하게 맞춤 동작을 알려준다. 어깨와 목의 긴장을 풀고 다리 힘을 키우는 동작들도 좋다. 요가가 끝나면 30분 정도 누워서 쉰다. 어제는 1시간이나 꿀잠을 잤다.
8월부터 비타민 C와 강황 요법도 다른 곳으로 옮길 계획이다. 열치료와 미스텔 테라피를 받고 있는 자연요법센터 담당 의사인 뵐펠 Wölfel 샘 쪽으로. 왜 진작 물어보지 않았을까. 비타민 C는 주사액으로, 강황은 알약으로 복용한다고 한다. 할아버지 의사이신 뵐펠 샘의 첫 질문은 이랬다. 강황액이 무척 비쌌을 텐데요? 당연히 비쌌다. 그런데 대우는? 매번 재던 혈압도 자주 빼먹고, 지난번에는 두 가지 요법 소요 시간을 평소 1시간에서 30분으로 또 줄였다. 그러지 말라고 부탁을 했는데도. 어찌나 급하던지! 빨리 해치우고 보내려는 환자가 된 기분. 어제도 비타민 C 요법을 갔다가 양팔에 두 번씩 주사 실패, 항암 포터 두 번 실패. 다시 정맥 주사로 돌아와서 일곱 번만에 성공. 책도 폰도 안 보고 숨만 쉬며 버텼다. 이렇게는 힘들지. 접수처에 7월 말까지만 하고 쉬겠다고 했다. 남은 요법은 앞으로 세 번. 웃으며 마무리하고 떠나는 게 목표다.
- 작가: 뮌헨의 마리
뮌헨에 살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북 <프롬 뮤니히><디어 뮤니히><뮌헨의 편지> 등이 있습니다.
- 본 글은 마리 오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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