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것 아니라 했지만 이토록 별났던 적은 없었다
코로나 기간 중 갑자기 받게 된 수술, 그날의 기록
4층 오후 3시 50분 격리병동에서 바라본 그날의 저녁 하늘은 웬일인지 경이롭기까지 했다.
현재 살고 있는 2 층집 창 밖으로는 건물 안뜰의 쓰레기통이나 앞집 창문 정도 보이는 게 전부였기 때문이었을까. 올해 들어 이렇게 높은 곳에서 하늘을 바라본 적이 있었나 싶었다. 어디가 끝인지 알 수 없는 흐린 회색 하늘 속으로 수줍은 분홍색이 적절히 녹아들었다. 너무나 다른 재질의 두 색은 스스로 섞이고 어우러져 경계조차 불분명했다. 병원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멋들어진 붉은 지붕의 건물들은 앙상한 나뭇가지들 뒤로 점잖히 앉아있었다. 바깥의 풍경이 현실이라면 침대에 누워있는 나는 허상인가 싶을 정도로 그 순간은 묘하게 어긋나고 뒤틀어져있었다.
격리 병동 4층 침대에 누워서 바라본 풍경
5일 전 즈음 사타구니 근처 동그란 무언가가 만져졌다.
손을 깨끗이 씻고 안간힘을 다해 눌러보았지만 아프기만 할 뿐 별 소득이 없었다. 하지만 고작 이 작은 여드름 하나 때문에 내 모든 생활이 엉망이 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내 몸의 불청객은 하루하루 잊혔고, 그동안 그 녀석은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기 위해 열심히 몸집을 불려 나갔다. 여느 주말처럼 오전에 장을 보는데, 걸을 때마다 불편감이 느껴졌다. 그래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고 그날 점심은 유난히도 쌀국수를 만들어 보겠노라며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비록 완벽하진 않았지만 만족스러웠던 쌀국수를 가족들과 함께 둘러앉아 먹기 시작한 그 순간, 두 눈이 뜨거움으로 욱신 욱신 쑤시고 속이 뒤집어질 것 같은 고통을 느꼈다. 순간 열이 38도까지 올랐다. 무언가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돌봐주지 않았던 그 여드름은 내가 모르는 새에 100원짜리 동전 크기 이상으로 커져있었다. 염증으로 인한 발열은 이 비극의 시작일 뿐이었음을 그때는 몰랐다. 다음날이 되자 그 옆까지 부어올랐고 급기야 걷기조차 힘든 시점에 다다랐다. 작게라도 움직일 때마다 고름으로 가득 차 충혈된 피부 끝은 다른 피부에 스치며 닿았고 어린아이처럼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눕지도 앉지도 못하게 된 상태로 응급실을 갈 생각은 고사하고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동네병원에 긴급 예약을 해야겠다 마음먹고 힘들게 잠을 청했다.
아픔에 몇 번을 자다 깼는지도 모를 비몽사몽 한 순간 문득 나를 공포에 몰고 갔던 그 아픔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그리고 바라본 그곳에는 말도 안 되게 혐오스러운 고름이 밖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소독을 하면서 열심히 짜 보니 걸을 만한 정도가 되어 월요일 오전, 병원에 급하게 예약을 했다. 수화기 너머 간호사는 당일 오전 10시 15분 예약 하나가 취소됐다며 나에게 운이 좋다고 하면서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의 동행은 금지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신 감사하다 말하고 전화를 끊고 나니 이 상황이 더욱 혼란스럽기만 했다. 아이는 진즉에 남편이 유치원에 데려다주었고, 예약시간이 되어 병원을 찾았다. 병원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남편과 핸드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두려운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그 와중에도 마스크 뒤쪽으로 나의 입은 여러 독일어 문장을 반복하여 끊임없이 읊조려야만 했다. 의사 선생님께 독일어로 이 모든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워밍업 과정이라 하면 되려나. 독일 생활 중 아플 때마다, 병을 설명할 독일어까지 준비해야만 한다는 게 서러워서 마음속으로는 몇 번이고 울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어느 정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있어 예전만큼 악이 써지진 않아 다행이지만 그래도 쉽지 않긴 매한가지이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린 후에 – 이 정도는 기본이다- 진료실로 들어갔다. 열심히 연습한 독일어로 나의 상황을 설명하고 환부를 보여주었다. 그녀는 심각한 얼굴로 나의 고름들을 바라보더니, 아주 심플하고도 우아하게 – 심지어 미소를 띠며- 말했다.
” 좀 늦게 오셨네요, 주말이라도 응급실 가시지 그러셨어요. 그래도 큰 병원 가셔서 수술하시면 돼요. 소견서(Ueberweisung/위버 바이 중) 써드릴게요.
정말 작디작은 (mini mini/미니 미니) 수술이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손바닥 두 배 크기의 작은 종이 한 장을 받아가지고 엉거주춤 병원을 나섰다. 락다운(Lockdown) 중이라 잠시 추위를 피할 만한 카페 하나 없던 남편은 밖에서 그저 오들오들 떨며 기다렸던 모양이었다. 나도 나지만 그의 모습도 참 안되어 보였다. 우리는 콜택시를 불러 가장 가까운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올해 9월인가, 병문안 때문에 들렀던 때와는 사뭇 다른 외관이었다. 지저분한 임시 도로가 사라진 것을 보니 길고 길었던 공사가 끝났구나 싶었다. 역시나 외래 접수를 받는 응급실(Erste Hilfe/에어 스터 힐페)은 꽤 근사한 모습으로 변해있었다. 통유리로 만들어진 문을 유유히 통과하기 전, 체구가 크고 굳은 표정의 남자분이 우리의 발걸음을 붙잡았다. 코로나 시기이기 때문에 보호자는 동반할 수 없단다. 그제야 통유리를 사이에 두고 안과 밖으로 헤어진 환자 그리고 그의 보호자들이 겹쳐 보였다.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었고 또다시 낯선 병동 안으로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간단한 수속을 밟고 피검사와 소변검사를 했다. 그 날은 운이 좋게도 베테랑 간호사님이 나의 혈관을 단번에 찾아 주삿바늘을 꽂아주셨다. 보통 세네 번은 기본으로 쑤시고 뻬고를 반복하는 독일 병원에서 노련한 간호사님을 만난다는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남편은 환자들과는 격리된 공간에서 다른 몇몇 보호자들과 함께 기다려야만 했고, 나는 병동 입구에 있는 대기실에서 접수 번호를 기다리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오랜 시간 동안 마스크를 쓰기도 했고 피를 뽑았기 때문인지 괜히 으슬으슬하고 당이 당겼다. 마침 가방에는 남편이 넣어준 초콜릿이 있었고, 작게 부순 두 조각의 초콜릿을 입 속에 차례로 넣었다. 초콜릿은 내 입 속에서 이리저리 굴려지며 운명을 다했다. 그들은 사라져서 잠시나마 내 몸과 영혼의 기쁨이 되어주었다. 앉아있기도 힘이 들 만큼 기다리다 지쳐 소파에 아예 누워버렸다. 웅크린 새우처럼 두 다리를 접고 한쪽으로 누운 채 다른 대기 환자들을, 대기실의 천장을, 창문을, 창밖 나뭇가지에 아슬하게 달려있는 단풍잎 하나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정확히는 내 이름의 성(Nachname/나흐나메)을 크게 불렀다. 벌떡 일어난다고는 했지만 환부 때문에 생각만큼 빠르진 못했다. 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던 대기 환자 한 분이 “환자 여기 있어요!'” 크게 외쳐주었고, 나를 데리고 가려던 의사분은 씩 웃으시며 말했다. “숨어계셨네요.” 민망함과 아픔으로 나의 얼굴은 일그러졌다.
기다린 지 한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것이다. 겨우 진료실로 들어섰다. 초음파로 나의 고름의 크기와 위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마스크를 통과해 흘러나오는 독일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때도 있었지만, 다행히 나를 위해 천천히 말씀해주시는 선생님들 덕분에 검사는 순조로이 흘러갔다. 하지만 그 결과는 결코 만만치 않았다. 피부 안쪽에 생긴 낭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전신마취가 불가피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게다가 한 시간 전에 내 식도를 타고 내려간 그 초콜릿 두 조각은 마취 전 6시간 공복에 적합하지 않았다. 심지어 수술 전 코로나 테스트는 필수였으며 하필이면 그때 나는 발열 증상과 두통 그리고 약간의 인후통이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소위 ‘코로나 의심환자’가 되어야만 했다. 방역복을 입은 검사관이 나타나 토하기 직전까지 면봉을 휘둘러 나의 점액을 채취해갔다. 그리고 당일 혹은 다음날 언제 수술이 잡힐지 모르는 상황에서 나는 ‘격리 병동’으로 휠체어에 실려 이동했다. 방역복과 얼굴 가림막으로 무장한 나이 지긋한 신사분이 동양 여자를 태운 휠체어를 끌고 가는 모습을 제삼자가 보았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괜히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렇게 병원 건물의 지하의 기나긴 연결 통로를 통과하는 동안 나는 이상하리만큼 단 한마디도 할 수없었다.
격리병동에 도착했다.
격리 병동의 간호사들은 나의 열을 재거나 어떤 소식을 전할 때마다 매 번 방역복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나 자신이 끔찍하고 위험한 무언가가 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또한 묘한 쾌감이 있었다. 어느 누구도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들이 괜히 신났다. 나도 참 철딱서니도 없지.
핸드폰의 바테리가 0%을 찍고 운명을 다하던 그 순간 극적으로 남편은 간호사를 통해 입원할 때 필요한 물건들을 넘겨주었고, 무사히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한 뒤 병실 침대 위에 일자로 누워버렸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노을 진 아름다운 저녁 하늘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시간이 멈춘 걸까, 공간이 닫힌 걸까. 누구 하나 없는 공허하고 텅 빈 넓은 격리병동에서 바라보는 풍경과 침대에 누워있는 나의 몸뚱이는 허상인지 꿈인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지끈거리는 두통 때문에 핸드폰을 볼 수도 없어 기나긴 대기 시간 동안 남편을 통해 넘겨받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정말 몇 년 만에 펼쳐보는 ‘책’인지. 그리 좋아하고 사랑했던 ‘종이책’을 진득이 두 손에 잡아 본 지가 꽤 오랜만이다 싶었다.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누군가 나를 급히 깨웠다. 저녁 5시쯤 나는 한 번 더 코로나 테스트를 받아야만 했다. 이전에 했던 테스트의 결과는 다음날 나오는데 나의 수술은 당일 오후 8시로 잡혔기 때문에 20분 만에 결과가 나오는 테스트(Schnelltest/슈넬 테스트)를 받고 결과가 음성 이어야지만 수술을 집행할 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번엔 기다란 면봉이 나의 왼쪽 콧구멍으로 돌진했다. 극강의 고통이었다. 왼쪽 눈에서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뚝 뚝 떨어졌고, 검사관은 “정말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를 연거푸 말하면서도 코를 뚫을 기세로 면봉을 찔러 넣었다. 그녀의 목소리, 말과 행동과 표정은 전혀 일관성이 없었다. 수술이고 뭐고 코로나 테스트 때문에 이미 내 정신은 망신창이가 되었다. 코를 풀었더니 피가 찔끔 나왔다. 어느 때보다 집으로 얼른 돌아가고 싶었다.
“음성이에요, 코로나가 아닙니다.” 해맑은 목소리의 간호사님은 방역복을 벗어던진 채, 환복 할 수술복을 가지고 병실에 들어오셨다. 오후 8시부터 환복하고 대기하란다. 아직도 두 시간이 남은 상황이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다가 오후 8시가 되기 5분 전에 남편과 가족들,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수술 소식을 알리고 수술복으로 갈아입었다. 얇디얇은 차가운 수술복은 입은 것도 아니고 벗은 것도 아닌 하찮은 로브 같았다. 이불을 두 겹이나 덮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친 나는 또 잠시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병실 문이 벌컥 열렸고, 나는 소스라치게 잠에서 깨어났다. “이제 수술하러 갈 겁니다. 당신은 코로나가 아니에요. 그래서 수술 후에는 일반병실로 옮겨질 겁니다. 짐들은 새로운 병실로 저희가 옮겨드릴게요.” 시계를 보니 밤 10시가 다 되었다. 남편에게 수술하러 간다고 연락도 못한 채 갑자기 들이닥친 두 명의 간호사님들의 지도 하에 나를 실은 병원 침대는 수술방을 향해 힘차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의식이 선명해질 즈음 공복에 의한 두통은 더욱 심해졌다. 수술 시작 직전까지 써야만 했던 마스크도 두통 유발에 큰 역할을 했겠지.
내 인생 두 번째 전신마취.
전신마취를 하는 건 언제든 너무나 공포스러운 일이다. 차가운 수술용 침대로 내 몸을 스스로 뉘이고 밝디 밝은 수술용 조명을 바라보았다. 하루가 참 길다 싶었다. 간단한 질문을 받고 집도의와 인사를 나누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덜덜 떨렸다. 왼쪽 주삿바늘로는 묵직하고 따가운 무언가가 밀려 들어왔고 그 뻑뻑함이 견딜 수 없게 싫었다. 호흡기를 쓴 뒤 숨을 들이마시고 뱉고를 반복했다. ‘하나, 둘, 셋…. 열..’ 열까지 세면서 호흡에 집중했지만 내 정신은 잔인할 만큼 선명했다. 마주한 벽에 걸려있는 벽시계는 밤 10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고 ‘… 열셋.’ 열세 번째 호흡과 함께 내 모든 의식은 마침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눈을 떴을 때, 마취과 선생님 두 분만 남아계셨다. “수술은 잘 됐어요. 고생하셨어요. 이제 일반 병실로 가야 하는데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지금 몇 시죠?” ” 밤 11시요.” 수술이 끝났다. 나는 살아있고 모든 것이 끝났다. 긴장이 풀리며 서러운 마음이 들었는지 마취가 덜 풀려 더욱 느려진 이상한 독일어로 두 분께 꺽꺽 울며 이야기했다.- 대체 왜 그랬는지 지금도 알 수가 없다.- 오늘 이 모든 걸 혼자 다 처리해야 했는데 힘들었다고, 남편도 병동에 들어오지 못해서 너무 무서웠다고 중얼중얼거리는 나에게, 선생님 중 한 분이 다가오셔서 따뜻한 눈빛으로 위로해 주셨다. 긴장감과 두려움이 부풀어 터질 듯 한 감정의 끝을 꼭 묶고 있었나 보다. 빵빵하게 부푼 풍선이 주둥이로 바람을 내뿜으며 방 이 쪽 저 쪽을 비행하듯이 나의 복 받힌 감정은 수술방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눈에 보이지 않는 비행을 하고 있었다.
밤 12시가 넘어서 2인용 일반 병실로 옮겨진 나는 끝까지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새로운 병실에 나의 짐은 없었다. 남편이 걱정할 텐데 싶어 안절부절 못하는 나에게 친절한 병동 간호사님은 전화기를 빌려주셨다. 남편은 기다리다 못해 지쳐 잠이 든 모양인지 전화를 아무리 해도 받지 않았다. 급기야 ‘독일어로’ – 현지인의 핸드폰을 빌렸으니, 한국어 자판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참 기가 막혔다. 너무 허기가 져서 초코 바닐라 푸딩 하나를 후루룩 목구멍으로 넘기고 침대에 누웠다. 새벽 1시가 좀 넘었으려나,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간호사님이 짐을 가져다주었다. 이미 다른 환자가 자고 있었기 때문에 바스락 거리는 비닐을 최대한 조용히 열어젖히며 핸드폰이며 충전기 그리고 갈아입을 옷들을 꺼내었다. 남편과 가족들, 친구들에게 수술 후 경과를 간단히 남기고는 드라마 한 편을 보고 새벽 2시가 넘어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다음날 새벽 6시 무렵 자고 있는 내 앞에 느닷없이 의사 선생님이 나타났다. 비몽사몽 한 상황에 그녀는 굉장히 빠른 독일어로 – 마스크를 통해 내뱉으며- 수술 과정과 결과를 설명해주셨다. 반 이상은 알아들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 부분을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니까… 고름은 다 제거를 했는데, 뭐가 문제라고 하셨죠?” 그녀는 바빠 죽겠는데 그걸 또 묻냐는 눈빛으로 나를 한 번 쏘아보더니 ” 피부요!” 하고는 나의 말문을 막았다. 그리고 퇴원 가능하니까 오전 10시쯤 퇴원할 수 있을 거라고 하면서 쌀쌀한 바람을 일으키며 나가버렸다.
‘그래, 이게 독일이었지, 어쩐지 다들 너무 친절하다고 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나는 다음 날 오전 9시에 갑자기 퇴원했다.
가장 먼저 진료받았던 의사에게 전해줄 수술 경위서와 보험처리 가능한 영수증이 들어있는 편지봉투를 손에 쥐고는 그렇게 느닷없이 나는 퇴원을 했다. 봉투를 전해주던 간호사님은 전날 받았던 코로나 테스트 결과에 혹시나 문제가 있으면 전화를 주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언제 퇴원하면 되냐고 물었더니 “지금! 지금 나가세요.” 라며 나를 쫓아내듯 밀쳐냈다. 내가 나가는 자리에 들어올 환자가 이미 대기 중인 줄 몰랐던 나로서는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도 몇 번이나 들어와서는 “아직 안 가셨네요.”를 남발하더니 급기야 마지막으로 짐을 들고나가려는 순간 새로운 할머니 환자가 들어오셨다. 미리 퇴원 시각을 알려줬다면 이런 민망한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싶으면서도 나의 독일어 실력을 탓해야 하는지 의심하고 있는 그 찰나가 참 야속했다.
남편과 함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고, 그토록 그리웠던 내 침대 위에 몸을 누였다.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모든 일들이 참 아득하게 느껴졌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퇴원 소식을 알리고 나니 뒤늦게 나의 수술 소식을 들은 사람들에게 속속히 문자나 전화가 도착했다.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다 지쳐버린 나머지 핸드폰을 멀리 밀어놓았다.
별것 아니라고 했던 그 작은 수술이 이렇게까지 날 힘들게 할 줄 몰랐다. 문득 코로나 기간에 몸이 아프거나 급하게 수술을 해야만 했던 주변 지인들의 얼굴이 하나 둘 떠올랐다. 그들에게 그저 몇 마디 말로 위로하고 기도하겠다고 쉽게 얘기하곤 했는데, 그들 또한 얼마나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냈을지 괜히 마음이 쓰였다.
건강이 최고라는 식상한 말이 가장 중요하고 소중한 원칙이 되어 가슴 깊이 박혔다.
동시에 베를린은 11월 말까지 계획되었던 록다운(Lockdown) 기간이 내년 1월 10일로 연장되었다. 이번에는 그 강도가 상향 조정될 전망이다. 모든 베를리너(Berliner)들이 기대하던 크리스마스의 아름다운 마켓과 행사들은 모두 무산되었다. 2020년도 이제 3주 남짓 남았다. 전 세계를 혼란과 공포와 고통으로 몰아갔던 올해는 시간이 흐르고 나면 어떤 식으로 사람들의 기억에 남게 될까? 부디 남은 시간 동안은 누구 하나 크게 아프지 않고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 위에서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흘러가면 좋겠다.
별것 아닌 것이 정말 별것 아니게 지나갔던 예전, 그 일상의 날들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작가: KIRIMI/KiRiMi 일러스트레이터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삶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득 영감을 받아 무작정 기록해보는 진솔한 이야기.
본 글은 KIRIMI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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