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차 번호 HJ 88은 금지이다?!
-독일에서 배운 사과의 기술
독일에서는 자동차 번호를 스스로 정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지역차별 등의 이유로 사라졌지만 독일은 여전히 앞자리에는 지역 이니셜이 들어가고 뒤이어 자신만의 이니셜과 숫자를 결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도인 도시 베를린(Berlin)은 B, 하노버(Hannover)는 H, 뮌헨(Munchen)은 M 프랑크푸르트(Frankfrut)는 F, 라이프치히(Leipzig)는 L이다. 그렇다 보니 간혹 지나가다가 보면 도시명에 재치 있는 이니셜을 붙인 번호판을 발견할 때도 있다. (가령 슈투트가르트 S+ KY=SKY )
보통 이니셜과 숫자 하면 자신의 이름이나 생일을 떠올릴 것 같은데, 만약 88년생 현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면 불행히도..
HJ 88이라는 차 번호판을 쓸 수가 없다?!
독일에서는 자동차 번호판으로 금지하는 이니셜이 있다. NS, SS, KZ 등 바로 나치 시대를 상징하는 글자들이다.( 기본적으로 독일어는 단어가 워낙 길기 때문에 약어가 꽤 많기도 하다. )
먼저 HJ 88의 경우 HJ는 “Hitler Jugend”의 약자다. ‘히틀러 청소년단’이란 의미인데 나치 시절 나치즘 교육을 위해 설립된 단체다. 대부분의 독일 청소년들이 이곳에 가입했으며 아이들이 히틀러 유겐트 활동에 자부심을 갖도록 교육시켰다. 어렸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나치즘에 동화되도록 각종 놀이와 행사, 교재 등을 통해 철저하게 가르쳤다.
숫자 88은 알파벳에서 8번째 글자가 H인데, HH는 “Heil Hitler(하일 히틀러)”의 약자로 나치 시대 당시 인사로 쓰였으며 ‘행운을 빈다’라는 의미다. 숫자 84도 비슷한 의미로서 알파벳에서 8번째 글자 H와 네 번째 글자 D를 조합하면 “Heil dir” 마찬가지로 “너에게 행운을 빈다”라는 의미다. 또 18의 경우 알파벳 첫 번째가 A, 여덟 번째가 H인데, AH = Adolf Hitler 아돌프 히틀러를 뜻한다.
SS라는 약어는 독일 역사박물관이나 강제 수용소를 가면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약자이다.
Schutzstaffel(나치 친위대)의 약자이다. KZ 역시 비슷한 맥락의 단어인데 Konzentrations•lager(나치 강제수용소), NS는Nationalsozialismus(국가 사회주의, 나치즘)의 약자다.
독일은 각 주마다 법이 다르기 때문에 주마다 금기하는 번호판 규정역시 상이하지만 공통적으로 저 약어들은 들어간다. 자동차뿐만 아니라 만약 이러한 단어를 자신의 몸에 타투로 새겼다면 그것 역시 위법행위에 해당한다.
지금까지 다방면에서 독일인이 나치 시절에 대해 사과하고 보상하는 소식들을 접해왔다. 하지만 자동차 번호판에까지 나치즘을 경계하고 반성할 줄은 몰랐다. 독일인의 조직적이고 치밀한 민족성이 느껴졌다고 할까.
독일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나치 시절에 대해 공부한다. 다시는 이런 과오를 저질러서는 안 됨을 교육받는다. 나치는 국민적 트라우마와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 보니 대부분의 독일 친구들은 나치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를 피한다는 느낌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많은 이들이 내가 강제 수용소를 갔다 왔다고 이야기를 하거나 어쩌다 나치와 관련된 내용이 나오면 회피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어떤 경우에서든 독일인이 달갑지 않게 여기는 주제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국가적 차원에서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 보이면서 법적으로까지 조항을 만들어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들의 모습은 사과에 대한 올곧은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억압을 받았고 그들의 사과와 반성을 원하고 있는 상황 이기 때문에 독일인의 역사의식에 더 고개 숙연해지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진정한 사과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었다.
많은 독일 사람들이 사과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약간 부정적인 현상으로 발현되기도 하는데, 그렇다 보니 진짜 사과를 잘 안 한다. 미안하다는 말에 인색하다고 할까.
오히려 “실례합니다(Entschuldigung 혹은 Entschuldigen Sie)”는 자주 하지만 “미안하다(Tut mir leid)”는 별로 들어보지 못했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는 좀 다르지만 특히 관공서나 슈퍼, 매장 등에서 본인들이 잘못했어도 웬만하면 미안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알았다면서 일 처리를 해주면 감지덕지다. (서비스 강국에서 살다온 나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미안하다는 것은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
그들 입장에서 미안하다고 하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해 자신이 온전히 책임지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기 때문이다. 나치시대 요제프괴벨스의 속기사였던 품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 <어느 독일인의 삶>의 대목에서도 그들은 사과=책임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난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 져야 할 책임도 없죠.
혹시 나치가 결국 정권을 잡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독일 민족 전체에 책임을 묻는다면
그건 어쩔 수 없지만요. ”
어느 독일인의 삶/브룬힐데 품젤
사과를 잘 하진 않지만 한편으론 진짜 사과해야겠다고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진심으로 사과하는 것이 독일인이기도 하다.
모범적인 사과의 단계
잘못 인정-> 책임-> 보상-> 재발방지
라고 봤을 때 그들은 그 과정을 제대로 밝고 있었다. “진정한 사과란 무엇일까?”
꼭 국가적 차원에서의 거시적 관점이 아니더라도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대부분 잘못을 인정하는 단계까지는 나아가지만 책임에서 재방방지까지 이르는 것은 쉽지 않다. 자동차 번호 이니셜까지 스스로 발취해 금지하는 모습에서 나는 “사과의 기술”을 읽었다.
사과가 실패하는 이유는 미안하다고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 내 실수를 스스로 수긍했다면, 변명이나 합리화 같은 군더더기는 과감히 버리고 확실히 빠르게 상대에게 미안함을 표현해야 한다. 고백컨데 이렇게 글을 쓰는 나 역시 나의 잘못을 인정하기까지 꽤 고통스러워하는 부류의 인간 중 하나다. 쉽지 않은 일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반성하는 독일인의 국민성에 감동한 것도 있다.
나의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용기,
달라진 모습을 통해
사과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진일보함,
독일이란 나라를 통해
나는 ‘사과의 품격’을 배웠다.
작가: 여행생활자KAI
독일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는 여행생활자, 주변 살펴보기가 취미인 일상관찰자
본 글은 여행생활자KAI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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