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통틀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독일인, 아너트 할머니! 눈처럼 새하얀 머리를 곱게 쪽지시고, 작은 금색 타원형 안경을 끼신 일흔 중반의 할머니는 우리 집 아래층에 사는 정다운 이웃이다. 주름을 따라 깊게 새겨진 미소가 온화하신 아너트 할머니는 독일 땅에서 외톨이와 같은 우리 가족을 살갑게 챙겨주셨다. 아이들 입학식이나 생일에는 작은 선물과 함께 5유로짜리 지폐를 곱게 접어 용돈으로 주시던 자상한 할머니. 그런 할머니를 아이들은 오마(Oma할머니를 정겹게 부르는 애칭)라고 불렀다. 토끼가 초콜릿을 가져다주는 부활절 일요일. 성 니콜라스가 아이들 신발에 초콜릿, 땅콩, 귤을 채워주고 간다는 12월 6일 밤. 이제는 아이들도 다 안다. 우리 집 문 앞에 초콜릿을 두고 가는 건 부활절 토끼와 성 니콜라스가 아니라 아너트 할머니였다는 사실을.
아이들에게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아너트 할머니는 든든한 울타리. 어학원 최고급반을 마치고 시험을 통과할 정도로 독일어를 배웠어도 말문이 생각만큼 터지질 않아 고민할 때, 할머니는 내 독일어 회화 상대를 자처해주셨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주로 화요일이나 목요일 아침 10시에 만나 할머니 댁 응접실에서 독일어로 이야기를 나눴다. 아너트 할머니를 통해 나는 그 어디에서도 접하지 못한 독일 특히 동독 이야기를 내밀하게 들을 수 있었고, 여행의 자유가 없는 동독에서 인생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할머니는 나를 통해 머나먼 나라 한국을 만나셨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끔 엉킨 실타래 뭉치 같던 마음이 훌훌 풀어질 때도 있었다. 길에서 낯선 이에게 당한 억울한 인종 차별이나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읊조리기라도 하는 날이면, 할머니는 늘 정성을 다해 내 마음을 보듬어 주셨다. 화요일 오전 10시, 독일어 회화 시간이라고 했지만 사실 아너트 할머니라는 따뜻한 언덕에 내 마음을 비비는 시간이었다.
할머니를 만나기로 한 어느날. 여느 때처럼 겅충겅충 계단을 뛰어 내려가 초인종을 눌렀더니 현관문 뒤에서 사과 두 양동이를 꺼내 보이신다. 할머니 과수원에서 가져온 낙과인데 이걸로 아펠무스(Apfelmus)를 만드실거라고. 도와달라는 할머니 말씀에 잠시 주춤했다.
‘아…. 아펠무스 만드신다고요…’
아펠무스는 푹 익힌 사과에 설탕을 넣고 갈아 만든 소스로 소시지와 맥주 못지않게 사랑받는 독일 대표 음식. 떠먹는 요거트처럼 조그만 용기에 담아 파는데 출출할 때,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건강 간식으로 많이들 찾는다. 따뜻한 우유에 밥을 넣고 끓인 죽과 같은 밀히라이스(Milchreise)에 듬뿍 얹어 먹는 방법도 인기. 독일 어린이들의 최애 메뉴 중 하나로 손꼽힌다. 어른들은 우리나라 감자전을 튀겨낸 듯한 카르토플푸퍼(Kartoffelpuffer)에 아펠무스 곁들여 먹는 것을 즐긴다. 크리스마스 마켓이나 지역 행사가 있는 곳이라면 카르토플푸퍼와 아펠무스를 파는 푸드트럭이 꼭 있고, 트럭 앞은 늘 문전성시. 직접 맛보지는 못했지만 “하늘과 땅” (Himmel und Erde 힘멜 운트 에르데)이라는 독일 정통 메뉴도 나름 유명하단다. 감자를 으깨 만든 매쉬드 포테이토에 동일 비율의 아펠무스를 섞어 먹는 것이라는데 이름이 거창하다. 사과는 하늘을, 감자는 땅을 상징한다나 뭐라나.
잡식에 입맛도 무던한 데다 음식 알레르기도 없음을 큰 복으로 생각하는 나. 허나 아펠무스! 이것만큼은 내게 넘지 못할 높은 장벽이다. 그냥도 먹어보고, 밀히라이스나 카르토플푸퍼랑도 시도해 봤지만 늘 첫 도전이 마지막 도전. 달콤하지도 그렇다고 새콤하지도 않은 데다 촉감은 크림처럼 부드럽다더니 내 입에는 서걱거리기만 했다. 그런데 다정한 아너트 할머니가 그 아펠무스를 같이 만들자고 하신다. 만들고 나면 같이 먹자고 하실 텐데… 살짝 겁이 났지만, 내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독일인, 아너트 할머니의 부탁이 아닌가! 당연히 두 팔을 걷어 부치고 도와드려야지!
허리와 무릎이 안 좋으신 할머니를 대신해, 왕년에 체력장 특급이었던 내가 힘을 좀 썼다. 우선, 양동이를 번쩍 들어 개수대 가득 사과를 쏟고 물을 받았다. 사과를 한 알 한 알 깨끗이 씻고, 한국식 돌려 깎기 신공을 발휘해 순식간에 껍질을 깠다. 뱀 똬리처럼 길게 늘어진 사과 껍질을 신기하다는 듯 들어 보이시는 할머니. 잘한다, 대단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신다. 내가 큰 칼로 햐안 사과 송이를 반토막 내서 할머니께 건네면, 할머니는 작은 과도로 잘게 잘라 커다란 냄비에 투척. 냄비에 설탕 두 국자와 계피 막대기 두 개, 물 한 컵을 넣고 센 불을 켜기까지, 할머니와 나, 손발이 척척 맞는다. 할머니가 내려주신 커피 한 잔을 마시는 동안 사과가 푹 익었다. 도깨비방망이를 꺼내 흐물거리는 사과 조각들을 갈았더니 황금색 소스가 되어 일렁인다. 아펠무스 완성!
“어서 먹어봐. 맛있을 거야.”
원하지 않았건만 역시나 영광의 첫 국자는 내 차지가 되었다. 아너트 할머니는 가장자리에 꽃무늬가 자잘하게 둘러져 있는 작은 그릇에 아펠무스를 담아 내게 건네셨다. ‘싫어하는 티 내면 안될 텐데… 맛있는 표정을 어떻게 짓더라…’ 긴장하며 작은 티스푼으로 아주 조금 떠서 입에 넣었다.
‘어? 맛있잖아.’
따뜻한 아펠무스는 강렬하진 않았지만 새콤하면서도 달콤했다. 크림만큼 매끄럽지는 않아도 서걱거리는 느낌 없이 부드럽게 넘길 수 있었고. 또 한 스푼을 떠 본다. 이번에는 티스푼 한가득. 여전히 맛있다. 그렇게 한 스푼, 두 스푼 먹다 보니 할머니가 내어준 그릇은 어느새 깨끗. 신기할 노릇이다. 집에 돌아가는 내게 할머니는 열심히 일한 대가라며 황금빛 소스가 가득한 잼병 서너 개를 한 아름 안겨주셨다. 평소 같았으면 ‘ 어휴, 이걸 어떻게 먹어…’라며 한숨 섞인 고민 했을 텐데. 오늘 처음으로 홈메이드 아펠무스를 보면서 ‘음, 이걸 어떻게 먹을까?’하는 맛있는 상상을 해본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를 스캔하며 궁합이 좋을만한 식재료를 찾아봤다. ‘어, 이거 괜찮겠는걸!’ 그릭 요거트를 꺼내 그릇에 담고 아직 따뜻한 아펠무스를 큰 숟가락으로 떠 얹어보았다. 살살 섞어 먹어보니, 맛이 꽤 좋다. 그동안 이 맛을 왜 몰랐지?
아이들의 편식을 고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함께 음식을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엄마 아빠와 함께 식재료를 다듬어 음식을 만들다 보면, ‘이건 맛이 없을 거야’라는 편견을 극복하고 나아가 편식을 개선할 수 있다고. 아이들이 어릴 때 나도 몇 번 성공해 본 방법이다. 어쩌면 내 ‘아펠무스 거부증’도 단순 편식이 아니라 편견이 근본적인 문제이지 않았을까? ‘이게 도대체 무슨 맛이람? 이유식 같은 걸 어른이 먹는다고? 감자전에는 사과가 아니라 간장이지!’ 하는 머리 깊숙이 박힌 고집 말이다. 과학적으로, 엄밀히 따지자면, 아펠무스 맛이 갑자기 좋아졌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펠무스가 맛있다고 느껴진 것은 좋아하는 아너트 할머니 덕분이겠지. 할머니와 함께 사과를 씻고, 깎아서, 끓이고, 갈아, 맛보고… 그렇게 함께한 따뜻한 시간이 내 편견을 사르르 녹여버렸을 것이다. 편견이 아니라 이제는 다정한 아너트 할머니와의 추억이 녹아든 아펠무스를 요거트에 버무려 또 한 술 떠 넣는다. 밍밍하던 아펠무스에서 은은한 단향이 입 안 가득 퍼져 나온다.
아펠무스도 맛있네.
- 작가: 오롱
<동독에서 일주일을> 공동저자. 한국에 나고 자람. 스위스, 미국, 독일을 거쳐 이제 막 영국에 정착. 언어, 문화, 정체성이 뒤섞인 콩가루 집안을 지키는 씩씩한 엄마.
- 본 글은 오롱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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