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에서 보낸 설날
밀가루 종류는 뭐가 이리 많은 거야?
같이 조깅을 하는 친구가 설날에 맛있는 음식 해서 같이 먹자고 제안을 해주었다. 매일 혼자 밥을 해 먹는 것에 질릴 만큼 질렸고, 쾰른에 유일하게 아는 한국 사람, 친구이기에 같이 명절 느낌이라도 내보자는 제안에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친구는 수육을 하겠다고 하였고, 나는 동그랑땡과 호떡을 하여 친구네 집으로 토요일 점심에 찾아가기로 하였다. 호떡은 호떡믹스가 집에 있었기에 새로 사야 하는 재료가 없었지만 동그랑땡은 친척들과 함께 모여 모양만 만들어 보았지 직접 하나부터 열까지 만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재료부터 일일이 찾아보아야 했다. 왜 굳이 동그랑땡을 하려고 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그저 단순히 나에게 있어서 명절 하면 떠오르는 음식 중 하나여서 일까? 아니면 명절 음식 중 그나마 혼자 해볼 수 있겠다 싶은 음식이어서 일까. 그렇게 동그랑땡으로 주제를 정하였는데 아뿔싸, 두부가 들어가는 음식인걸 깜박했다. 지난주에 아시아 마켓을 갔을 때 순두부를 제외한 두부들이 모두 품절이었었기에 지금 아시아 마켓을 다시 가본다 한들 새로 물건이 들어왔을지도 의문이었기에 인터넷에 “두부 없이 동그랑땡 만들기”를 검색하였다. 그리고는 간 고기, 당근, 파, 계란, 그리고 밀가루를 메모하고 바로 집 앞 슈퍼에 들어갔다.
부끄럽지만 나는 평생 밀가루를 어디에서도 사 본 적이 없다. 빵이나 케이크를 만들어 본 적도 없고, 면을 직접 만든 적도 없으며, 그 흔한 전마저 안 만들어 봤으니 밀가루가 필요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강력분, 중력분, 이런 단어조차 모르는 나의 상태를 아는 사촌오빠로부터 “쿠키 만드는 밀가루 말고 빵 만드는 밀가루를 사야 해!”라는 말을 듣고 그 말만 믿고 슈퍼로 향한 나였는데 집 앞의 작은 슈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다양한 밀가루가 나를 반길 줄은 몰랐다. 이건 뭐 차라리 강력분, 중력분이라고 적힌 밀가루 봉지가 더 반가울 것 같았다. 곡물에 따라 일단 가루들의 종류가 나뉘고 졌고, 그 가루들은 또다시 다양한 숫자로 나뉘어 있는 이 밀가루 코너에서 나는 절망감마저 느끼기 시작했다. 밀가루 없이 만들까, 잠시 고민도 하였지만 이왕 만들어 보는 거 제대로 해보자 싶어 요리조리 봉지에 있는 그림들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Type 405는 쿠키 그림이, Type 550에는 빵 그림이 그려져 있다는 것이었다. 주저하지 않고 바로 흰색의 Type 550이라고 적힌 밀가루를 챙겨 슈퍼을 빠져나왔다.
다양한 밀가루에 당황하여 찍은 사진들
집에 돌아와 재료를 손질하기 전 조금 전의 당황스러웠던 밀가루와의 만남을 정리하기 위해 밀가루에 관하여 찾아보았다. 우선 저 봉지에 적힌 숫자들은 100g당 미네랄 함유량이었고 저 숫자가 높을수록 한국에서 말하는 강력분의 쓰임새로 향하는, 글루텐이 높아지는 밀가루라고 한다. 역시 그림에서 내가 알아낸 것과 같이 405는 쿠키, 타르트, 케이크, 파이, 스콘, 머핀과 같은 것을 만들 때 사용되는 밀가루였고 550가 부침개나 수제비 등에 사용이 적합한 다목적 밀가루였다. 마지막으로 제빵용은 800번 때나 1,000번 때의 숫자를 가진 밀가루가 제격이라고 한다. 일단 알맞은 밀가루를 고른 것에 환호성을 지르며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재료 손질 후 동그랑땡 준비 완료
단순히 기름 냄새나는, 그나마 만드는 것이 단순해 보였던 동그랑땡 그저 그거 하나 만들려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이게 이렇게 힘들 줄은 몰랐다. 당근이고 파고 양파고 다지는 데에만 시간이 엄청나게 소요되었다. 간 고기 500g을 샀기에 두부 대신 야채를 고기 양만큼 넣기 위해 야채를 다지고 또 다졌다. 싱거울 경우에는 초장이든 간장이든 찍어 먹으면 되지만 짜버리면 먹을 방법이 없을 것이란 생각에 소금과 후추를 살짝만 넣고 야채와 고기가 잘 섞일 수 있도록 열심히 반죽을 하였다. 샌드백을 치듯이 3-4분을 찰지게 반죽하고 난 후 우선 하나만 맛이 괜찮은지 확인할 겸 밀가루를 묻히고 계란을 입힌 후 구워서 먹어보았다. 내가 너무 소금에 겁을 먹었었나 보다. 간이 전혀 되어 있지 않아 소금과 후추를 팍팍 넣고 다시 반죽을 한 후 하나를 더 만들어 먹었다. 처음 것보다는 조금 나아진 것 같지만 그래도 밍밍한 건 여전했다. 그래도 이젠 초장에 찍어먹으면 딱일 것 같았기에 더 손대지 않고 동그랑땡 모양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프라이팬에 한 번 구울 정도의 양, 6개 정도씩 밀가루를 올려놓은 접시에 만들어 놓은 뒤 팬에 기름을 두르고 하나씩 계란물을 입혀 구웠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동그랑땡의 크기는 커지고 모양도 못나졌지만 그래도 끝까지 하여 약 40개의 동그랑땡을 만들었다. 동그랑땡만 만들어도 이렇게 허리며 다리가 아픈데 명절 음식이라고 1년에 두 번씩 사람들은 어떻게 그 많은 음식들을 만들 수 있었던 건지 감탄만이 나올 뿐이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내가 만든 동그랑땡은 고기완자 같은 맛을 한 생긴 건 동그랑땡인 그런 음식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날 저녁식사는 40개 중 10개의 동그랑땡으로 해결하였고 나머지는 다음 날 친구 집에 가져가기 위해 이쁘게 통에 담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동그랑땡 굽는 모습들
토요일 점심때가 되어 미리 만들어 놓은 동그랑땡과 호떡을 챙겨 친구네 집으로 갔다. 친구는 김치에 수육에 쌈장까지 손수 만들어 테이블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치까지 직접 담가 먹을 수 있다는 게 가장 놀라운 부분이었고, 사 먹는 쌈장보다 더 맛있는 쌈장에 두 번 놀랐다. 친구, 그리고 친구의 남자 친구와 함께 우리는 밥을 먹었고 배가 터질 때쯤 친구의 남자 친구 분께서 만들어 놓은 케이크로 마무리를 지었다. 케이크는 초코 베이스에 바나나와 생크림이 들어간 것이었는데 독일어로는 “Maulwurf Kuchen”이라고 일명 “두더지 케이크”라고 했다. 두더지가 땅을 팠을 때 생긴 흙구덩이와 케이크의 모양이 비슷해서 지어진 이름이라는데 우습기도 하고 처음 본 케이크에 신기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내 입에는 독일에서 지금껏 먹은 케이크 중 제일 맛있었다! 남은 케이크 중 반을 집에 싸서 가지고 올 만큼 맛있었으니. 생일마다 일본식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고집부렸었는데 만약 두더지 케이크이라면 생일 케이크로 둘 중 무엇을 고르면 좋을지 고민이 될 정도였다.
우리만의 명절을 느낀 한 끼
친구 덕분에 온전히 혼자 명절을 보내진 않게 되었다. 잠시였지만 같이 맛있는 음식도 먹고 같이 웃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참 즐거웠다. 항상 챙겨주는 그 따뜻한 마음에 고마움을 가득 느끼며 올 한 해도 그녀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 가득하길 빌며 집에 돌아왔다. 음력으로도 새해가 밝았다. 부디 올해는 무사히 별 탈 없이 평범한 하루하루가 이어졌으면 좋겠다.
- 작가: 몽글맹글
의식의 흐름대로 쓰는 걸 좋아합니다. 쓰면서 정리합니다. 주로 독일에서의 일상 및 매일의 삶 속에서 언젠가 기억하고 다시 꺼내보고 싶을 작고 소중한 일들을 기록합니다. - 본 글은 몽글맹글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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