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어쩌다 ‘베를린’
우연히 내 삶으로 들어온 베를리너 라이프
# 2016년 12월 말
“와~ 그럼 벤츠 타고 맥주에 소시지 많이 먹을 수 있겠네? 하하”
지금 생각하면 참 무식한 발언이었다. 웃자고 한 얘기였으나 또 딱히 농담만도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의 나에게 독일이란 나라는 딱 그 정도의 이미지였을지 모른다. 많이 덧붙인다 하더라도 축구 강국, 나치와 제2차 세계대전, 통일의 역사, 베를린 국제영화제, 몬테소리와 발도르프 등으로 알려진 독일 교육 등이었으리라. 독일이란 나라가 그러했으니 베를린은 말할 것도 없다. 몇 해 전 하정우와 한석규, 류승범 등이 출연했던 영화 ‘베를린’의 장면들이 덧씌워지면서 유럽의 강국 독일의 수도의 강인한 인상보다는 어쩐지 잿빛의 음울한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 도시였다.
2016년과 2017년의 경계에 서 있던 어느 날, 남편의 베를린 주재 발령 통보가 날아들었다. 그로부터 한 달여 전 남편이 ‘독일도 괜찮아?’라고 물었을 때 나는 별생각 없이 좋다고 말했다. 몇 년 안에 해외근무 가능성이 있긴 했지만 독일은 사실 리스트에 전혀 들어있지 않던 나라였다. 그럼에도 앞뒤 따지지 않고 ‘좋다’라고 했던 건 당시 어떤 식으로든, 어디가 됐든 뭔가 출구가 필요하던 시점이었기 때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20여 년 가까이 쉼 없이 직장생활을 했지만 그즈음 나는 미래의 내 ‘일’에 대한 고민이 깊은 시기였다. 방송작가 일을 시작으로 여성 종합 매거진 에디터로, 경제 매거진 기자로, PR 마케팅 회사의 콘텐츠 제작자로 나름 가능한 선에서 동선을 넓히며 삶의 방향성을 고민하며 살았지만 더 본질적인 가치, 미래지향적인 잡에 대한 갈증이 심했다.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의 삶이 내 미래를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예상치 못한 많은 경험들이 나에게 답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이도 저도 다 떠나 현실의 무게를 좀 내려놓으면 뭔가 보이지 않을까, 더 솔직히 저 밑바닥에서는 그냥 쉬고 싶다, 그런 생각들이 충만했었다. 베를린이 아니라 혹 ‘듣보잡’ 그 어디였더라도 당시 나로서는 ‘오케이’를 외칠 이유가 넘쳤다.
막상 베를린행이 결정되고 보니 그제야 당황스러웠다. 적잖은 경쟁률을 뚫고 베를린 근무가 결정됐으니 어깨춤이라도 췄어야 하는데, 그때의 복잡한 심경은 차라리 솔직한 반응이었다. 독일어라고는 신승훈 노래 가사에 나오던 ‘이히 리베 디히’ 밖에 모르는 내가, 독일에 대해서는 남들보다 더 잘 알 것도 없던 내가 앞으로 3년을 독일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나. 안 봐도 비디오인 일에 치어 바쁠 남편과 나만 바라보고 있을 아이,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알 수 없으니 외국 생활의 낭만은 남의 이야기였다.
실제 출국일까지 무려 7개월이라는 한국에서의 준비 기간 동안 나는 이미 독일이란 나라가, 아니 남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굳어버린 머리는 몇 개월 째 계속되는 독일어 공부에도 좀처럼 진전이 없었고, 당장 비자부터 시작해 준비해야 할 수많은 서류들이며 아이 학교 입학을 위한 지원, 원격으로 거처를 알아보는 일 등 정착을 위한 사전 과정부터 골머리가 아팠다. 그에 비하면 두 달 정도 걸리는 해외 이사 준비는 애교 수준.
그러나 대가 없이 주어지는 소득이 어디 있을까. 그 고단한 과정을 견디고 나면 온통 장밋빛 까지는 아니더라도 내 인생에 한 줄기 신선한 빛쯤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어떤 설렘은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다.
<오늘의 깨달음>
기대를 절망으로 바꾸는 것도 설렘으로 바꾸는 것도 결국은 나의 몫이다.
작가: 어나더씽킹 in Berlin/공중파 방송작가,종합매거진 피처 에디터, 경제매거진 기자, PR에이전시 콘텐츠 디렉터, 칼럼니스트, 자유기고가, 유럽통신원 활동 중, ‘운동화에 담긴 뉴발란스 이야기’ 저자
현재 베를린에 거주. 독일의 교육 방식을 접목해 초등생 남아를 키우며 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 고민합니다.
본 글은 어나더씽킹 in Berlin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 구텐탁코리아(http://www.gutentag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