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른 무렵에 썼던 메모를 바탕으로 다시 쓴 글입니다. 요즘의 서른은 아직 젊고 어린 느낌이지만 제가 서른을 지날 때만 해도 서른을 앓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 같아요. 감안하고 읽어주시길.
나이 서른을 넘어가는 일이 딱히 두렵진 않았다.
가수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나 최영미 시인의 <서른, 잔치는 끝났다> 같은 데서 전해지는 서른의 독특한 감성을 애써 부정하거나 외면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서른이 된다고 해서 껍질을 벗고 변태를 하는 것도 아니고 피카츄에서 라이츄로 진화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먹던 대로 한 살 더 먹을 뿐이었다. 덤덤한 성격이라 원래 그렇게 나이를 앓거나 계절을 앓는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가끔 그저 오늘을 앓을 뿐.
서른이 되려던 때 나는 미국 유학을 결정했다. 장학금과 생활비를 받으며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고 떠나기로 했다. 십 대와 이십 대를 지나 삼십 대까지 학생으로 남을 수 있다는 건 축복이기도 저주이기도 했다. 소식을 들은 아는 동생이 누나 진짜 갈 거냐고, 서른에 나가다니 정말 용감하다고 말했다. 공부 마치면 환갑 되는 거 아니냐고 따뜻한 덕담도 해줬다. 가정법원 판사였던 참 사람 좋고 따뜻했던 아는 오빠는, 사람들은 다들 네 나이에 이혼하러 오던데 너는 대체 언제 결혼을 할 거냐며 다정하게 웃었다.
세상엔 아홉수란 것이 있었고 실제로 많은 친구들이 아홉수를 넘기지 않으려고 서둘러 결혼을 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둘 사이에 의견이 맞는다면 딱히 나쁠 건 없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당시에 사귀던 친구가 있었는데 나보고 유학을 안 보낼 생각이라고, 결혼을 하자고 했었다. 웃으면서 말하기에 웃으면서 들어 넘겼다. 결혼 상대로까지 생각해 준 건 고마웠지만 그 앞 문장이 너무나 엉망진창이어서 농담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실은 그 말을 듣고 그에게로 뻗어있던 마음을 조금씩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사랑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주저앉혀서는 안 되는 거니까. 아무리 농담으로라도, 내가 애써 이룬 걸 그렇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없애겠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거니까. 뭣보다 당시의 나는 결혼 생각이 콩알만큼도 없었다.
그렇게 서른을 맞았다. 계란 한 판이 되었다는 얘기를 계란 두 판만큼 들었던 것 같다. 일 년 뒤에는 배스킨라빈스가 된다고도 했다. 계란 한 판이라든가 아이스크림까지는 뭐 그냥 숫자라고 생각하면 괜찮았는데, 크리스마스 케이크에 비유하는 인간들은 좀 짜증이 났다. 스물넷에 가장 잘 팔리고 스물다섯도 그럭저럭 팔리지만 스물여섯부터는… 뭐 그런 류의 다소 정신 나간 소리였다. 예수님께서 들으신다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너는 내 생일파티에 절대 오지 마라 하실 소리. 아니 팔리긴 뭐가 팔려요. 그런 걸 농담이라고 입에 담다니 너님의 쪽이 팔린 줄 아셔야죠.
학교 앞에 아지트처럼 자주 들르던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유학 떠나기 전에도 그곳에서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나는 그곳의 더덕 막걸리와 대왕 계란말이를 무척 좋아했다. 계란 한 판을 거의 다 써서 만드는 계란말이였는데, 누구든 그 계란말이를 보면 인생은 꽤 살만하다고 여길 법한 그런 황홀한 음식이었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두툼하고 압도적인 크기,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귀티 나는 비주얼, 안에 보석처럼 박힌 양파며 당근, 파 같은 채소들의 예쁜 색감과 씹히는 감촉, 입에 넣으면 따뜻하고 폭신하고 부드러운 식감까지 그야말로 소박하면서도 사치스러운 메뉴였다. 모두들 너무 좋아하는 안주라 꼭 시키곤 했는데, 정작 그걸 만드는 주인 언니는 만들기 힘든 메뉴라며 주문을 받을 때마다 한숨을 쉬었다. 계란물을 조금씩 보충해 풀어가며 몇 번이고 둘둘 말아 모양을 잡고, 천천히 잘 익도록 불 조절을 하며 시간까지 왕창 써야 하는 메뉴였기 때문이다. 주방 공간이 그렇게 독립적으로 딱 나뉘어 있지는 않아서, 밖에서 통화를 하다 다시 들어오면 카운터 너머로 주인 언니가 계란말이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란들과 싸워 이긴 자의 표정으로 언니가 벽돌만 한 계란말이가 든 팬 앞에 서 있었는데, 그 옆에 계란 한 판이 모두 껍질로 변해 있는 모습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계란 한 판이 모두 하나의 계란말이로 뭉치다니, 그야말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일이었다.
‘저 계란들이 각자 쓰였다면 프라이가 몇 개고 삶은 달걀이 몇 개에 오믈렛이 몇 개야? 그리고 또… ‘
그때 생각했다. 서른이란 건 계란 한 판을 서른 가지 방식으로 요리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 계란을 주면 프라이팬에 부치거나 라면에 톡 까서 넣을 줄만 알았던 십 대에서 벗어나 다양한 레시피가 쌓여가는 것. 그게 바로 나이를 먹는 일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다.
‘삶은… 계란(Life is… an egg)’이라는, 듣자마자 상대의 등짝을 후려갈기고 싶은 소리도 있지만 인생이란 건 결국 자기에게 주어진 계란 한 판 같은 거다.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로부터 조리법을 배워가고, 나름의 조리법을 만들어보고, 자기가 선택한 방법들로 다양한 요리를 만들어 내는 일. 그게 인생이다. 다양한 삶의 가능성은 그 끝을 알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인생이라는 일정한 시간이 주어진다면 그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지가 중요해진다. 계란도 딱 한 판이 주어진다면 결국 그걸 어떻게 써서 어떤 요리들을 만들어 내는지가 중요한 것처럼.
인생과 계란 한 판의 비유가 꽤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달걀이라는 식재료가 가지는 무한한 가능성 때문이기도 하다. 손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맵시 있는 타원형 안에 하나의 삶이 응축되어 들어있는 달걀. 인간들은 이 작고 동그란 알을 가지고 정말 무수한 요리들을 만들어 냈다. 달걀 하나를 꺼내 손에 쥐고 있으면 기분이 간질간질하다. 깨질까 봐 조심스러워 그런 것도 있지만, 손안에 작은 우주가 들어있는 느낌 때문이기도 하다. 얇은 껍데기 안에는 끝없는 잠재력이 몸을 작게 웅크리고 들어 있고, 우리가 달걀을 톡, 하고 깨는 순간 그 앞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열린다.
달걀은 삶을 수도 구울 수도 부칠 수도 끓일 수도 살짝 익힐 수도 있고, 휘저어 부풀리거나 달걀물로 사용하거나 다른 것들을 엉기게 하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홀랜데이즈나 마요네즈처럼, 주재료의 맛을 돋보이게 할 소스에 사용되기도 한다. 인간의 삶의 모습과 역할이 제각기 다양하듯이, 달걀은 제 역할을 찾아 여기저기에 자신의 껍질을 깨고 들어간다. 삶은 달걀이나 오믈렛처럼 그 자체로 든든하고 따뜻한 끼니가 되기도 하고, 스크램블드 에그처럼 자신의 몸을 으깨어 우리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한 형태로 에너지를 채워주기도 한다. 계란 장조림, 그 매끈하고 짭짤한 밑반찬이 있다면 우리는 몇 번이고 밥그릇을 비울 수 있다. 달걀은 밀가루를 묻힌 재료를 옷처럼 감싸 안아 노릇노릇 군침도는 전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브리오슈나 할라 겉면에 얇게 발려 그 황홀한 고동색 광택을 책임지기도 한다. 죽이며 국에 풀려 들어가면 고소하고 보드라운 맛을 더하고, 예쁘게 부쳐져 김치볶음밥 위에 놓이면 화룡점정이 이런 거지 싶고, 짜파게티 위에라도 올라가면 밋밋해 보이던 검은 면 덩어리가 즉각 새로운 요리로 업그레이드 된다. 달걀은 동그랑땡 반죽이 흩어지지 않게 꼭 붙들어주면서 아무도 모르게 뒤에서 핵심 역할을 하기도 하고, 구름 같은 머랭, 달콤하고 찐득한 에그 타르트, 천국같이 달콤한 크림 브륄레처럼 전면에 나서서 엄청난 존재감으로 우리를 홀리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이 꼭 우리들 사는 모습 같다.
서른이란 건 계란 한 판을 서른 가지 방식으로 요리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이 떠올랐을 때 나는 실제로 내가 아는 달걀 요리가 몇 가지나 되는지 하나씩 적어가며 꼽아보았다. 서른 가지에서 몇 개가 부족한 리스트가 만들어졌지만 빈칸은 곧 채워졌다. 외국 생활을 하면서 새로운 달걀 요리의 지평이 사르륵 열렸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람들을 알게 되면서 그만큼 새로운 요리들을 알게 되었다. 수란(poached egg)과 수란을 이용한 에그 베네딕트(Eggs Benedict), 오야꼬동, 크리스마스 무렵에 마시는 에그 노그(egg nog), 키쉬(Quiche)와 프리타타(frittata), 중국식 에그 드랍 수프(egg drop soup), 에그 인 헬(Eggs in Hell) 같은 요리 하나하나에 외국 친구들의 얼굴이 하나둘씩 들어있다. 살면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알아가면서, 각자가 좋아하는 요리법과 음식들을 서로 나누면서 우리의 삶은 더 풍성해진다.
공자님은 서른을 이립(而立), 즉 스스로 서는 나이라고 했는데, 사실 나는 서른에 스스로 서지 못했다. (실은 아직도 대체로 누워있다.) 대신에 부지런히 깨지고 열심히 배웠다. 보드랍고 따뜻한 흙에 뿌리내리고 편안히 영양분을 오물오물 먹던 집을 떠나 가족도 친구도 없는 외국 땅에서 독거 언니가 되는 일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그때의 나는 달걀 껍질을 깨느라 애쓰는 병아리 같았다. 껍질처럼 나를 둘러싸고 있던 단단한 고정관념을 깨느라 부리가 얼얼했다. 예를 들면 살색은 살구색과 동일한 단어가 아니라는 것, 한국 사람과 결혼하고 싶다는 말은 인종주의적인 말이라는 것, 여성 동료들에게 Hi ladies! 라고 부르는 것은 실례가 될 수 있는 말이라는 것 같은. 세상엔 정말 다양한 사람들, 내 상상을 넘는 삶의 방식들이 있었다. 시야가 조금씩 넓어지면서 나라는 인간 안에 아직 버릴 것도 고칠 것도 조심할 것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못난 생각을 고치고 뾰족한 마음들을 내려놓으려고 애썼다. 그렇게 톡, 톡, 달걀껍질을 깨고 틈으로 비쳐 드는 햇살에 눈부셔했다. 낯선 땅에 혼자 실뿌리를 내리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고 고달팠다. 하지만 달걀 껍질이 깨지는 순간 그 앞에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지듯이, 그렇게 껍질을 깨느라 애쓴 시간들이 분명 내 삶의 가능성을 새로 매만졌으리라 믿는다.
박사과정 첫 해에는 학교 기숙사에서 살았는데, 불가리아에서 온 츠베토미라, 말리에서 온 무소코로, 대만에서 온 페이(Pei)와 훼이(Fei), 이렇게 다섯이 한 아파트를 썼다. 무소코로는 방에 문제가 있어서 다른 아파트로 옮겨갔지만 가끔 다섯이 같이 모여 소소한 것들을 나눠 먹으며 고단한 외국 생활을 서로에게 위로받곤 했다. 요리를 좋아하고 잘하는 친구도, 그럭저럭 굶지는 않고 살 수 있을 정도의 친구도 있었는데 우리의 훼이는 칼질부터 서툴렀다. 그러다 손가락 잘린다고, 계란 쥐듯이 손끝 모아서 말으라는 얘기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결정적으로 훼이는 계란을 잘 못 깼다. 계란 프라이에 그렇게 소소하게 껍질을 추가해서 칼슘을 보충하더니, 결국엔 포기하고 줄곧 삶은 달걀을 만들어 먹는 귀여움을 선보였다. 생각해보면 어렸던 내가 학교 교과서에서 배운 가장 첫 요리(라기보다는 조리법)도 삶은 달걀이었던 것 같다. 달걀이란 그렇게 가장 쉬운 조리법으로도 누군가의 배를 채워주는 마법 같은 존재였다.
이제 마흔이 넘은 나이에 그동안 알게 된 계란 요리가 몇 가지나 더 늘어났는지 꼽아보자니, 이제는 음식을 보는 관점이 꽤 달라진 나를 느낀다. 오믈렛 하나로도 마흔 가지 요리가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같은 오믈렛을 만들어도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서 수백 가지 오믈렛이 나올 수 있고, 또 누가 어떻게 만들어주는가에 따라서 정말 특별한 오믈렛이 만들어진다는 것. 그 차이를 소중하게 여기느냐 아니냐도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얻을 수 있는 선물 같은 관점이 아닐까. 10대나 20대의 나는 수식어나 관형절이 별로 붙지 않는 대표적 조리법들을 생각했었다. 달걀프라이, 스크램블드 에그, 삶은 계란, 이렇게. 하지만 작은 차이 하나하나가 참 다르고 소중하고 특별하다는 것을 그간 살면서 많이 배웠다.
신혼 시절의 나는 노른자 위에 참깨를 톡톡 뿌려 만들어주는 그 사람의 계란 프라이가 왠지 특별하게 느껴져서 좋았다. 그런 거다. 같은 계란 프라이라도 내 아이가 때록때록한 눈으로 “엄마, 내가 해 보고 싶어어-“하고는 프라이팬 위에 조심조심 깨뜨려 만든 첫 계란 프라이의 특별함, 재료 같은 것도 치즈 오믈렛과 버섯 오믈렛을 다른 것이라고 생각해 줄 수 있는 그런 관점 말이다. 음식보다는 그걸 만드는 사람에 더 눈이 가고, 주연과 조연이 다 중요하고 예쁜, 좀 더 넉넉해진 그런 마음.
그리고 한편으로는 달걀 요리 자체보다 그 안에 담겼던 사랑과 그리움이 더 크게 떠오르는 걸 느낀다. 엄마가 계란을 풀어 간장과 고춧가루, 매실청을 조금 넣고 나중에는 그 위에 치즈를 한 장 얹어서 밥반찬으로 만들어 주시던 매콤짭짤하고 녹진한 스크램블드 에그의 맛. 우리가 올망졸망 어렸을 때 오므라이스 네 개를 만들어서 위에다 케첩으로 각자의 이름을 써서 주시던 기억. 그리고 도시락 반찬으로 안에 맛살이나 동그란 프랑크 소시지를 통째로 넣고 돌돌 말아서 만드시던, 그래서 썰어내면 색이랑 모양이 정말 예뻤던 그런 엄마표 계란말이 같은 것들. 음식의 물성 그 자체보다는 안에 든 마음이 더 크게 보이는 눈도, 차곡차곡 먹어 온 나이가 나도 모르게 슬며시 주머니 안에 찔러 넣어 준 선물이지 싶다.
이제 나는 그리운 엄마 계란빵을 떠올리면서 계란을 통째로 넣은 나만의 계란빵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준다. 나의 엄마가 나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사랑을 나중에 내 아이들도 기억하도록, 도시락을 쌀 때는 겉면에 메시지를 적은 삶은 달걀을 넣거나 모양틀로 예쁘게 찍어낸 달걀을 넣는다. 가족의 생일 아침에는 띠 동물을 표시한 계란 프라이를 만들어 미역국과 내기도 한다. 독일의 큰 명절인 부활절에는 아이들과 꼭 색색의 달걀을 만들어 숨기고, 아이들이 신나게 찾게 해 준다.
작고 동그란 계란에는 이렇게 사랑의 마음이 속속들이 담겨 입으로 전달되고, 그 추억이 우리를 살찌운다. 계란 요리의 추억 하나 없이 나이를 먹는 사람은 아마도 드물지 않을까. 좋은 사람들과 더불어 삶을 열심히 살고 나면, 십 년 뒤의 내가 아는 계란 요리법의 가짓수는 또 그 안에 든 사람만큼 이야기만큼 더 늘어나 있겠지.
나는 오늘도 계란 한 판의 나이를 지나 계란 두 판의 나이로 부지런히 걷고 있다.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정치철학 박사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 응원의 메세지나 문의를 아래 댓글창에 남겨주세요. 댓글을 남겨주시면 작가님께 메세지가 직접 전달이 됩니다.
ⓒ 구텐탁코리아(http://www.gutentagkorea.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