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동전
작은아이가 공터에서 놀다가 동전을 주웠다. 남편은 길에서 동전을 줍지 않는다. 어려운 분들이 주워 갈 수 있게 놔둬야 한다는 주의다. 하지만 아이가 애써 자랑하려고 가져온 걸 다시 바닥에 놓아두라고 하긴 좀 그랬다. 네가 가져온 이 동그랗고 반짝이는 물건이 뭔지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음아, 이거 뭔지 알아?”
“코인.”
그러자 옆에서 남편이 한 마디 거들었다.
“우와, 1센트도 아니고 2센트 짜리네?”
아이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자기가 훌륭한 일을 했나 보다 하는 오묘한 표정으로 서 있다.
“이걸로 나중에 슈퍼마켓 가서 아이스크림 사 먹을까?”
그러자 아이 얼굴에 해님이 떴다. 그 표정이라니. 작디작은 눈동자에 기쁨과 놀라움이 걸리는 순간을 목격하는 일은 늘 즐겁다. 자기가 주운 이 동그란 물건이 그런 힘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고는 굉장히 애지중지하기 시작했다. 손에 쥐고 어쩔 줄 모르며 어루만진다. 잘하면 뽀뽀도 할 것 같은 분위기다.
“더러울 수 있으니까 일단은 주머니에 넣어서 가자.”
아이는 중간중간 멈춰 서서 몇 번이고 주머니를 확인하며 돌아와서는 깨끗이 비눗물에 씻어 말렸다. 그리고 이 동전이 나에게 가져다 줄 달콤한 미래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엄마, 슈퍼마켓 언제 열어?” (독일 남부는 주말에 대체로 모든 상점이 문을 닫는다.)
“엄마, 아이스크림 말고 위버라슝 (Kinder Überraschung, 달걀 모양 초콜릿) 사 먹을까?”
그런 2센트짜리를 여러 개 모아야 아이스크림도 초콜릿도 사 먹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이미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눈치였다. 이번의 제대로 된 경제관념 알려주기는 이렇게 실패. 하지만 아이는 동전이 가진 힘을 알게 되었으니 한 발자국 뗀 셈이다. <이해의 선물>에서처럼 은박지로 싼 버찌 씨를 내미는 그런 귀여움 폭발하는 동심은 이번 일로 혹시 벗어나게 되는 걸까.
첫째는 가게에 진열된 물건들 앞에 쓰인 숫자의 의미를 이해하고 있지만, 둘째는 가게에 갈 때 준비물이 지갑이라는 것(요즘은 안타깝게도 마스크가 추가됨) 정도만 알고 있다. 길을 가다가 빵집이 문을 열었는데 엄마가 지갑을 안 갖고 있으면 몹시 속상한 얼굴로 엄마에게 호통을 친다.(동네에 정조 임금님 때부터 빵을 구워 온 베이커리가 있는데 일주일에 나흘만, 그것도 정해진 시간에만 연다.) 아마 아이들은 내 지갑에서 언제든 돈이 솟아나는 줄 알고 있을 것이다.
경제관념이 있는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으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것, 그렇기에 아이들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신경 써서 만들어 주고 싶은 것이 바로 경제관념이다. 나는 내 아이들이 경제관념만큼은 이 엄마를 닮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어렸을 때 정기적으로 용돈을 받진 않았다. 하지만 필요하다고 하면 부모님은 언제든 돈을 주셨다. 내가 그다지 물욕이 없는 아이였기 때문에 별 말없이 믿어주시는 편이었던 것 같다. 크게 부족함 없이 자란 것은 감사한 일이나 두 가지 면에서 부족함이 생겼다. 첫째는 규모 있게 용돈을 쓰면서 내 생활을 스스로 꾸리고 계획하는 경험의 부족, 둘째는 돈은 언제든 부모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착각하며 자랐다는 것. 즉, 내게는 독립이라는 관념이 부족했다.
대체로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고 부지런히 알바를 해서 술값을(음?) 벌긴 했지만 나는 성인이 되고서도 한참을 부모님의 지원에 기대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돌아보니 그것이 제일 부끄럽다. 부모님은 늘 내가 돈을 벌기보다는 공부를 더 하길 바라셨다. 돈 걱정 없이 크기를 바라셨던 그 마음의 온기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엄청난 행운인 것도 알지만, 그 큰 사랑이 오히려 나의 경제관념에는 독이 되었다. 나의 경제관념은 안일하기 그지없었고, 지금도 대체로 그렇다. 일단은 숫자 개념이 굉장히 없어서 지금도 누가 몇 평 넓이의 집에서 한 달에 얼마를 쓰며 살고 있느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한다. 한 달 수입이 얼마고, 고정 지출이 얼마고, 그런 개념은 외우려고 노력해도 당최 머리 안에 들어와 박히지가 않는다. 대신에 궁상맞음과 알뜰함의 경계를 걷는 일엔 자신이 있다. 옷도 신발도 도저히 회생이 불가할 때까지 입고 신는다. 내가 물건을 사들이는 일에 취미가 있었다면 아마 우리 집은 쫄딱 망했을 거다.
그래서 이번 생은 망한 경제관념을 가진 나는, 아이들이 어렸을 때부터 독립을 생각하고 자기 삶을 계획할 수 있는 아이로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유로 두 가지를 생각하고 있다. 하나는 용돈을 주는 일, 다른 하나는 18세에서 20세를 부근으로 완전히 독립을 시키는 일. 독립과 관련해서는 다른 글을 한 편 더 쓸 생각이고, 이번 글에서는 용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용돈이 필요하다
사람마다 아이들에게 주는 용돈에 대한 입장이 다르겠지만, 나는 용돈이 ‘경영과 소비의 경험 쌓기, 취향 만들기, 그리고 관대함의 연습’이라는 세 가지 면에서 꽤 괜찮은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면 귀여운 수준의 기본금을 용돈으로 주고, 빨래며 쓰레기 버리기, 설거지 같은 집안일을 나이에 맞는 선에서 가르쳐 주고 그에 맞는 금액을 추가적으로 주는 방법을 생각하고 있다. 이후에 정말 독립해서 혼자 살 수 있도록 필요한 기술과 능력들을 천천히 배워 나간다는 의미도 있고, 집안일이 돈으로 환산될 수 있는 가치임을 알려주고 싶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린 시절부터 작게나마 일주일을, 한 달을, 몇 개월을, 스스로 소비하고 꾸려가는 경험을 하게 하고 싶다.
필요한 걸 부모가 알아서 턱턱 사주는 건 피차간에 편할지 몰라도 사실 소중한 배움의 기회를 날려먹는 일이다. 나는 이 작은 아이들이 그 조그만 머리로 나에게 뭐가 필요한지 생각해 보고 물건을 구입해 보게 하고 싶다. 그게 색연필 한 자루가 됐든 꽃 한 송이가 됐든 아니면 젤리 스물여섯 봉지가 됐든. 탕진을 해도 어릴 때 소규모로 말아먹는 경험을 해 보는 게 출혈이 적다. 오늘 까까를 흥청망청 사 버리면 내일부터 한 달간 내가 사고 싶을 때 살 수 있는 간식은 없다는 사실을 배우면 좋겠다. 갖고 싶은 물건이 생기면 오래 계획하고 차근차근 모아서, 결국 그 물건을 갖게 되는 기쁨도 알게 되면 좋겠다. 나는 아이들이 결핍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또 내가 이 물건을 사는 것이 나와 이 세상에 어떤 의미를 갖는 일인지 알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결국, 소비할 때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벌지 않고도 살 수 있지만 사지 않고 살긴 어렵다. 인생을 산다(live)와 물건을 산다(consume)가 우리말로 다르지 않은 건 그래서 내겐 꽤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그 사는 행위, 소비하는 행위를 통해 작게나마 자신의 취향을 만들어가는 즐거움을 알았으면 한다. 사람을 그릇에 비유한다면 취미나 취향은 그 그릇에 새겨진 무늬와 같다. 그 무늬로 다른 그릇과 구별되고, 그 무늬 덕분에 그릇이 한결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취미도, 취향도, 결국 내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적절한 돈이 있어야 생겨나는 법이다. 호기심을 느꼈을 때 방해받지 않고 그리로 가 볼 수 있는 것, 그리하여 그것을 취미며 취향으로 빚어갈 수 있는 것은 사실 큰 축복이다. 여러 옵션을 두루 섭렵하며 개의치 않고 실패해 볼 수 있는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1년에 단 서너 번 영화를 볼 수 있는 사람이 제3세계 영화나 독립 영화에 취미를 가질 수 있을까. 컴퓨터 조립에 흥미를 가지려면 마음껏 풀었다 조여도 좋을 오래된 컴퓨터라도 하나 주어져야 하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자신만의 음악 취향을 키워 가려면 적어도 그 월정액 낼 용돈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작은 시도들을 통해 취향에 맞는 물건을 구입하고 소중히 사용하는 법,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 내 호기심을 납작하게 짓누르지 않고 그리로 신나게 뛰어가 보는 법을 천천히 배웠으면 한다. 나는 사실 공부 못 하는 건 참아도 취향 안 맞는 건 못 참는 성미라서 앞으로 아이들과 패션이라는 화두를 갖고 치를 대전이 두렵다. 요즘도 첫째가 단추를 목까지 꼭꼭 채우는 모습에 내적 비명을 지르고, 둘째가 새마을 운동 당시 마을 이장님 같은 패션으로 유치원에 간다고 고집 피울 때 마음속 기도가 절로 나온다. 그래도 자유롭게 시도하길 바라며 참아 본다. 마음에 안 든다고 엄마의 취향을 고집하면 아이는 아마 꽤 오래 스스로 실패해 볼 시간을 갖지 못할 것이고, 사실 그게 실패인지 아닌지를 내가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아이가 스스로 용돈을 모아 거적때기를 사 오는 날을 나는 살짝 기대하고 있다.
마지막은 용돈을 통해 관대함이라는 미덕을 연습하는 일이다. 이 아이디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읽다가 마음에 심어뒀다. 사실 예로부터 재물이라는 것은 인격 수양에 방해가 되는 것으로 여겨지곤 했다. 논어에서도 이(利)에 밝은 것은 소인(小人)의 특성이고, 불교에서도 색불이공 공불이색, 즉 세상 만물이 공허한 것이라고 했다. 최영 장군님께서도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는 사람이 덕이 있으려면 돈이 좀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하신 거다.
니코마코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버지 이름이기도 하고 아들 이름이기도 해서 설이 좀 나뉘기도 하지만, 통상 <니코마코스 윤리학>은 아빠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들인 니코마코스에게 들려주는 조언으로 알려져 있다. 그 안에는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미덕과 피해야 할 악덕들이 세세히 나열되는데, 돈에 관련된 미덕으로 ‘관대함, 혹은 관후함’이라는 미덕이 있다.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좀 있어서 그 돈을 쓰면서, 어릴 적부터 관대함이라는 덕을 습관처럼 갈고닦아서 지니라는 얘기다. 나는 이 이야기가 꽤 솔깃했다. 그래서 내 아이가 생기면 용돈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덕을 갈고닦을 재료로서의 용돈.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관대함이라는 미덕을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아리스토텔레스가 들려주는 돈 잘 쓰는 법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덕에 관한 논의에서 항상 중요한 것은 적절한 중간, 즉 중용을 끊임없이 연습하는 일이다. 이리로 치우치기도 하고 때론 저리로 치우치기도 하지만, 균형을 잡을 수 있게 잘 연습하면 결국 그 균형점이 습관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서 그 사람의 덕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관대함이라는 미덕은 방탕함과 인색함이라는 양 극단의 사이에서 중용을 이루었을 때 빛나는 덕이다.
기원전에 살던 귀족 할아버지가 하신 말씀을 무슨 성경 말씀처럼 받들어 읽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돈이라는 게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너무나 중한 주제인 만큼, 아리스토텔레스가 돈에 관해 들려주는 조언들을 조금 들어 봐도 재밌을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방탕한 사람,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고 관대한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관대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아래의 인용문들은 본문 그대로가 아니라 발췌해서 재가공한 것들임을 밝혀 둡니다.)
관대한 사람은 고귀한 일을 위하여 주며, 올바르게 주는 사람이다. 줄 만한 사람에게, 줄 만한 양을, 줄 만한 때에 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고통을 느끼지 않으면서 주는 사람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은 때론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한다. “줄 만한 사람에게, 줄 만한 양을, 줄 만한 때에” 주라니. 이건 마치 “고사리나물 어떻게 하는 거야?” 하고 물었을 때 “응, 푹 불려서 삶은 다음에 갖은양념 적당히 넣고 잘 버무렸다 달달 볶으면 되지.”라고 대답하는 엄마를 볼 때의 느낌이다. 그래도 “줄 때 기쁜 마음으로, 고통 없이 주는 사람”이라는 부분은 알 것 같다. 우리에게는 모두 그런 경험들이 있지 않은가. 내 돈을 쓰면서, 특히 타인에게 쓰면서도 행복하고 뿌듯하고 기뻤던 경험. 돈 참 잘 쓴 것 같다, 그렇게 느껴지던 경험들.
관대한 사람은 주는 일과 취하는 일을 올바로 하는 사람이다. 당연히 취할 곳에서 마땅한 양을 취하는 사람이다.
나는 이 부분이 좋았다. 관대하다고 하면 주는 쪽으로만 이해하기 쉬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취하는 일을 올바로 하는 것도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당연히 취할 곳에서 마땅한 양을 취하라” 한다. 즉 내가 가치 있게 노동을 했으면 그 대가를 적절히 받는 것이 돈에 있어서 미덕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세상에는 인연이나 친분에 기대어 너무나 당연하게 타인의 능력과 시간을 내 것처럼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열정 페이라는 고약한 소리로 젊은이들의 찬란한 시간과 빛나는 재능을 가책 없이 꿀꺽 삼키려는 어른들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아이들이, 당연히 취할 곳에서는 똑 부러지게 마땅한 양을 취하는 사람으로 자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미덕이라는 말에도 십분 공감한다.
친한 사이에 일을 부탁할수록 감사의 마음을 제대로 표시하고, 합당한 보수를 제공하는 게 기본이라는 사실을 나도 참 뒤늦게 깨달은 편이다. 내가 먼저 마음이 우러나서 흔쾌히 해 주면 몰라도, “우리 사이에 이런 것도 못 해주냐”는 말은 세상을 살면서 딱 듣기 싫은 말 중 하나다. 당연히 여기지 말고 제대로 부탁해야 한다. 또, 그저 기회를 얻는 것이 기뻐서 돈에 관한 질문을 주저하거나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아야 한다. 이것은 사실 사회에 이미 점을 찍고 자리를 잡은 어른들이 제대로 된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젊은 놈이 벌써부터 돈만 밝히고 쯧쯧”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그게 당연한 거다.
관대한 사람은 그 재물로 남을 돕고자 하므로 자신의 소유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줄 만한 사람들에게 주어야 할 때에 줄 것을 지니고 있기 위해서.
관대한 사람이 곧 부유한 사람은 아니며, 오히려 부유하기가 쉽지 않다. 관대함이란 주는 액수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성품에 달려 있다. 즉, 자기 재산 정도에 따라 당연한 일에 재물을 쓰는 사람이 관대하고 관후한 사람이다.
관대한 사람은 막 주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소유물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꼭 필요할 때 좋은 곳에 쓰기 위해서.
또 꼭 돈이 많아야 관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자기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고, 그 정도에 따라서 당연하고 좋은 일에 재물을 쓰는 사람이 바로 돈에 대한 미덕을 갖춘 사람이다. 예를 들면 평소에는 얼마 안 되는 용돈을 꽤 소중히 여기지만 친구가 곤란해할 때 선뜻 자기가 가진 동전을 내어줄 수 있는 아이, 거리의 음악가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했을 때 기쁘게 감상한 후 다가가서 소중한 동전을 넣고 오는 아이, 이런 아이라면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가 흡족해하지 않을까.
관대한 사람은 올바르지 못하게 소비하는 일이 있으면 괴로워한다. 또 취해서는 안 될 데서 취하지 않는다. 어디서 어떻게 취하는지를 문제 삼지 않고 어디서든지 무턱대고 취하는 사람은 방탕하거나 인색한 사람이다. 그들은 가난해야 할 사람을 부유하게 하며,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으며, 아첨하는 자나 쾌락을 주는 자에게 많은 것을 준다.
이 부분도 참 좋았다. “올바르게 소비하지 못하면 괴로워하고, 취하지 않아야 할 곳에서는 취하지 않는 것.”
나부터 연습해야 할 부분이고, 아이들에게도 꼭 알려주고 싶은 부분이다.
요즘은 특히 올바른 소비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고 있다. 어떤 식으로 돈을 벌고, 또 어떤 식으로 돈을 쓰며 살 것인가. 아이들과 함께 자라며 부지런히 연습할 수 있다면 좋겠다.
아이에게 바라는 것들
경제관념이 제대로 박히지 않은 내가 아이들에게 그런 걸 가르치고 또 좋은 경제관념을 가지기를 소망한다는 일이 참 역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마음과 다짐을 담아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쓴다.
나는 아이들이 부자가 되기보다는 돈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돈을 가치 있게 쓰고 소중하게 다루되, 세상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들도 많음을 알았으면 한다.
자라면서 아이들은 친구가 입은 멋진 옷, 타인이 가진 멋진 물건에 혹하게 될 것이다. 실은 엄마도 최근 발을 들인 반짝이는 인스타 세상에서 매일 눈으로 침을 뚝뚝 떨어뜨리며 다닌다.
하지만 두른 것의 가치보다는 내 안에 든 것의 무게를 신경 쓰는 사람이면 좋겠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 욕망보다는,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에게 딱 알맞은 물건을 선물하고 싶은 깜찍한 마음에 더 열심히 돈을 버는 사람이면 좋겠다.
나는 아이들이 물건을 함부로 사지 않고 내가 만들어 내는 쓰레기에 민감한 사람이면 좋겠다.
나의 경제 규모에 맞고 내 취향에 부합하는 질 좋은 상품을 구입할 줄 아는 그런 눈 밝은 사람이면 좋겠고, 한 번 산 물건을 함부로 쓰레기통에 넣지 않는 책임감 있는 사람이길 바란다.
늘 새 것에만 혹하지 말고, 오래된 물건에 깃든 시간과 추억이 만드는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
알뜰하게 살되 필요한 사람들에게 기꺼이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면 더욱 좋겠다.
가격을 세심하게 비교하고 쿠폰을 쓰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그렇게 알뜰하게 장을 보고는 출구 옆에 마련된 기부 코너에 오늘 산 것 중에서 제일 좋은 것 몇 가지를 남겨 놓고 오는 사람이면 좋겠다.
우리가 사는 생태계가 이어져 있듯이 돈의 생태계도 이어져 있음을 알고 그 그물을 어그러뜨리지 않는 사람, 돌고 도는 돈의 사슬을 선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먹고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많은 이들이 있음을 알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늘 겸손했으면 좋겠다. 그 많은 이들 중 일부는 아마도 경제활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에, 버는 돈으로 함부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실 이 모든 바람은 내 아이가 자신이 필요한 돈을 벌어서 자기 삶을 꾸려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린, 몹시 오만할 수 있는 바람이다. 내 아이가 커서 어떤 사람이 될지 나는 모른다. 경제 활동에 영 소질이 없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삶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로크가 말했듯 마르크스가 말했듯 어려서부터 땀 흘려 일하고 그것에서 인간다움을 찾는 인간이 가장 먼저 되기를 바란다.
나와 남편은 둘 다 연구하고 글 쓰는 사람들이기에 앞으로도 딱히 재산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일확천금은 늘 마음속으로만 꿈꾸기에 둘 다 로또를 사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인간들이기도 하다.
많은 돈을 물려줄 순 없어도, 아이들에게 돈의 가치를 알고 단단한 경제관념을 물려주는 일은 열심히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돈 걱정 없이 크는 아이보다는 적절하게 돈 걱정하며 크는 아이로 키워보려고 한다.
그것이 결국에는 장차 세상에 나갈 아이의 걱정과 두려움을 줄일 수 있는 길이라고 믿기에.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정치철학 박사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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