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엄마로 불리고 싶었건만
대학 때 호감을 느꼈던 친구가 어느 날,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물었다.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내게 그녀는 “난 ‘밥 많이 먹는 엄마’가 될 거야” 했다. 그 말에 난 펑퍼짐한 몸 빼 바지를 입고 양은 냄비에 밥을 비벼 우적우적 먹는 엄마가 단번에 그려져서 웃었다. 세월이 많이 흘러 밥은 뭐 그렇게 많이 먹지 않지만, 엄마가 되었다. 친구는 엄마가 됐을까? 솔직히 엄마가 되리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엄마는 아무나 되나? 범접하기 어려운 신성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세 번 유산 후, 두 아이를 낳았다. 첫 아이를 건강하게 임신하기 전, 엄마가 되고 싶어 얼마나 안달했는지 모른다. 아이만 가질 수 있다면 뭐든 하겠다는 간절한 기도도 매일 드렸다. 이상하리만치 임신부가 눈에 잘 띄었다. 한편으론 질투심에 분노가 치솟기도 했다. 엄마가 된 여자가 아이 키우면서 힘들다고 쏟아내는 모든 불평이 그저 부럽고 육아의 힘겨움을 한 번이라도 경험하면 소원이 없겠다고까지 생각했다. 띠로 아이를 매고 다니거나 부모 손 잡고 다니는 아이만 봐도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남편이 TV에 나온 아이에게 눈길만 주어도 가슴이 철렁했으니까.
내가 가진 모든 것과 바꾸더라도 엄마로 살게 된다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정말 그랬다. 새벽에 확인한 임신테스트기 두 줄의 환희, 초음파로 들은 심장소리, 280일 임신 동안 매달 가서 확인하는 태아의 성장, 그리고 출산의 두려움이라는 엄청난 과정을 거쳐 엄마가 되었다. 아무나 쉽게 될 수 없는 신성한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엄마가 된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를 꼽으라면 단연코 아이가 빛나는 성취에 포함된다. 엄마는 위대하고 모성은 빛난다면서 정작 아이만 전담해서 키우는 엄마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구조를 볼 때 씁쓸하다. 남자 군대 3년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힘들다는 것을 누구나 인정하면서 가산점은커녕, 경력 단절이라는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출산을 경험한 이후, 난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진통이 시작된 날, 분만실로 들어가면서 벗어놓은 신발을 다시 신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무섭고 두려웠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이 떠오를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제발 한 번만 살려달라고 평생 찾을 하나님을 그 날 가장 많이 찾았다. 고통 속에선 나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확인함과 동시에 고통의 강을 건너 생명을 품에 안은 순간엔 엄마라는 사람이 얼마나 위대한 존재인지 감히 표현하기조차 어려웠다. 한편으론 ‘엄마도 나를 이렇게 힘들게 낳았겠구나’ 12년 동안 다섯 번이나 출산한 엄마가 떠올라 슬펐다.
생각해보면 그렇게 겁 많은 내가 둘이나 낳은 일은 기적이다. 세상엔 목숨 걸고 할 만한 일이 그리 흔하지는 않으니까. 조셉 캠벨은 처녀에서 어머니가 되는 과정은 영웅이 되는 과정과 같다고 했다. 엄마는 모두 영웅이다. 엄마가 되는 일은 캠벨이 말하는 영웅과 비유할 만큼 엄청난 일이다. 출산은 길어도 하루에서 이틀이면 끝나지만 한 아이를 사람답게 돌보는 일은 영웅 할아버지에 비유해도 부족하다. 엄마가 되어 자유를 박탈당하고 그것도 모자라 시간과 애정을 들여 키워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신감을 느끼기에 충분하지 않을까?
천명관 소설 <고령화 가족>에서는 유독 밥 먹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밖에서는 천대와 멸시를 받고 돌아온 자식에게 엄마가 해준 밥은 사랑이고 에너지다. 사회적 잣대로는 지지리도 못나 보이는 주인공에게 그런데도 끊임없이 밥은 먹었냐며 묻고 매끼 고기를 구워 먹이는 엄마는 아무나 못 한다. 주인공 마지막 대사는 이렇다.
“나는 한 인간의 삶은
오로지 이타적인 행동 속에서만 완성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돌보고 자신을 희생하며 상대를 위해 무언가를 내어주는 삶이다”
지금껏 살면서 맡은 역할 중에서 이토록 이타적인 역할도 없다. 시간 관리 철저한 이기적인 내가 3년이라는 어마어마한 시간을 줄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감내한 일은 한 인간으로서 엄청난 도약이다.
자신감은 결국 안에서 나온다. 외부의 인정을 바라기 이전에 스스로 면류관을 씌워주자. 엄마 경력 인정해주지 않는 사회 탓도 하지 말자. 그 사이 봄꽃보다 더 예쁜 아이는 훌쩍 자랄 테니까. 봄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순식간에 흩날리면 왠지 모를 슬픔이 느껴진다. 자녀가 품을 떠날 때도 비슷한 슬픔 일지 모른다. 세월이 흐르면 순리대로 부모 품을 떠나 자기 인생을 살아갈 테니까. 아이 곁에서 꽃구경 실컷 하는 특권을 누리는 중이다. 생명을 키워내는 엄마로 살면서 인생 최고 면류관인 이타적인 인간으로 오늘도 성장 중이다.
작가: 김유진 / 에세이스트, <엄마라서 참 다행이야>저자
한국에선 가족치료 공부 후 부모 교육을 했으며 현재 마더코칭연구소를 운영하며 2016년 여름부터 독일에 삽니다.
본 글은 김유진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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