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기숙사 방 침대에 누워 밖을 바라보면, 어디론가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보였다.
저 비행기에 몸을 싣고 한국으로 당장 돌아가면 좋겠다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했는지 모른다.
초라한 공항과 눈보라, 차디찬 바람과 더러운 거리.
이곳에 발을 디딘 8년 전, 베를린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다.
20대 후반, 엄마가 쓰러지시고 온 가족은 초비상에 걸렸다.
생사를 오가는 가운데서 우리 엄마는 기적처럼 건강을 되찾으셨고, 나는 꼬박 한 달 동안 엄마 곁을 지키며 그 당시 하던 일과 미래의 꿈을 전부 내려놓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전 남자 친구를 용기 내 아빠에게 소개해드렸고, 아빠는 느닷없이 우리 둘의 결혼을 허락하셨다. 어리둥절한 채로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독일에서 박사과정을 하게 된 당시 남자 친구 (현 남편)는 베를린 공대와 연구소에 보낼 서류들을 꾸리고, 남은 공부를 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20대 끝자락에도 고작 라면 끓이기, 달걀 프라이밖에 하지 못하던 나는 회복 중인 엄마를 대신하여 눈물 콧물 쏙 빼며 요리와 집안일을 배웠다. 결코 의도된 바는 아니었으나 이 일 년간 살림 수준이 꽤 업그레이드되었다.
우리 둘의 결혼은 순식간에 진행되었고, 나는 어느새 두 개의 큰 트렁크와 함께 베를린 학생 기숙사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무슨 배짱으로 베를린행을 선택했던 건지 그 시절의 내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세상 쫄보인 나는, 한국땅을 떠나 먼 곳으로 유학을 결심한 주변 사람들을 내심 존경하고 있던 터. 이런 내가 남편을 따라 순순히 베를린으로 발걸음을 돌린 것은 어떤 이유였는지 나도 알 길이 없다. 그리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어’라는 강적과 맞닥트리게 된다. 평생 관심 없던 독일에 와있는 것도 기가 찰 일인데, 독일어가 웬 말인가? 처음엔 낯선 것들도 남편과 함께 하니 하나같이 신기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하지만 남편이 연구소로 출근하기 시작하자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돌이켜보니 하필 1월, 겨울에 도착해서 독일 사람들이 더 불친절하게 느껴진 것 같기도 하다.(이들은 날씨가 맑은 여름이 되면 대부분 굉장히 친절해진다.) 몇 군데 어학원을 둘러본 후, 저렴한 편인 학원 한 군데를 등록했다.
매일 출근하는 남편을 따라 나도 매일 학원을 가리라 결심하고 ‘독일어 집중반’을 등록하고야 만다. 매일 오후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 주 15시간을 독일어를 공부하는데 쏟게 된 것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한 지인의 도움으로 독일어 문법책 앞쪽을 조금은 훑어보기도 하고 온라인 강의를 들어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 ‘이게 정말 언어라고?’ 내지는 ‘이런 말을 알아듣는다고?’라는 의문만이 쌓여갔다. 그리고 그 이상하기 짝이 없던 독일어가 진짜였음을 학원을 다니며 깨닫게 되었을 때 오히려 나는 충격에 휩싸였던 기억이 난다. 보통 독일어 레벨은 A1(A1.1, A1.2), A2(A2.1, A2.2), B1(B1.1, B1.2), B2(B2.1, B2.2), C1, C2로 나뉜다. C레벨로 들어서는 순간 독일어 능통자로 인정해주며, 이는 대학을 지원할 때 (예체능을 제외한 일반 전공) 필요한 어학 수준이다. 그리고 나의 레벨테스트 결과는 의심의 여지도 없이 A1.1였다. 잔뜩 얼어서 참여한 첫 수업에서는 참 다양한 나이대와 국적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10대부터 40대까지, 미국인, 이탈리아인, 중국인, 일본인, 홍콩인, 이슬람인, 슬로바이카인, 브라질인 등.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학원을 다니던 5개월 동안 단 한 번도 같은 반에서 한국인을 만난 적은 없었다.
매정한 선생님은 내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첫 수업에서부터 오직 독일어로만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을 듣는 유럽권 학생들은 언어가 비슷해서 인지 아니면 감이 좋은 건지 선생님의 설명과 질문에 곧잘 반응하며 선생님이 원하는 대답을 (혹은 아닐 수도 있는 대답을) 척척 해냈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다른 학생들이 하는 다이어로그 또는 행동들을 눈치껏 따라 하기 바빴다. 알파벳을 읽는 방법부터, 알파벳이 내는 소리까지 하나도 익숙한 것이 없었다. 첫 수업 후 나는 절망했다. 나의 뇌는 더 이상의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로 똘똘 뭉쳐, 낯선 독일어를 밀어내기에 바빴다. 만 28세의 나이로 세상 어려운 언어를 머릿속에 집어넣는 작업은, 단단히 굳은 돌을 정으로 하나하나 쪼는 작업과 별반 다름없었다. 수업시간에 눈은 뜨고 있고 귀는 열려있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한 채 교재에 답을 채워 넣었다. 한국인의 고질적인 문제였다. 정확히 이해를 하지 못해도 교재의 빈칸은 곧잘 채운다는 것과 모르는 것을 절대 질문하지 않고 속으로 삭힌다는 것.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태연히 던지는 다른 나라의 학생들과 달리 나는 언제나 주눅이 들어 입도 한 번 뻥긋하지 못했다. 우스운 꼴을 당하기 싫어서. 무시당하기 싫어서. 잘 몰라도 아는 척, 어려워도 이해한 척 그렇게 시간이 흘렀나 보다.
그래도 수업이 끝나면 곧장 대학교 도서관이나 집으로 달려가 그날 배웠던 것을 몇 시간이고 복습했다. 가슴 뿌듯한 순간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독일어 공부로 인해 대부분 나는 실망했고 우울했고 주저앉았다. 3개월 정도는 그 모든 괴로움을 꾹 눌러 담으며 학원을 꼬박꼬박 나갔다. 하지만 A2.2로 들어서는 순간 나에게 위기가 찾아왔다. 왜 내가 독일어를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고, 독일이 너무 싫었다. 내 마음을 속시원히 보여줄 곳도 없었고, 이 모든 것을 누군가에게 독일어로 설명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몇 번씩 학원을 빠지기도 했다. 일말의 양심은 있어 선생님께는 오늘 아파서 못 간다는 둥 여러 핑계를 대가며 집에 우두커니 누워있었다. 울기도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날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던 나는 선생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 미안한데 나는 더 이상 독일어를 배우지 못할 것 같아. 너무 힘들어….”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겨우 참으며 선생님의 눈을 보지도 못하게 중얼거렸다. 그때 그녀는 (나보다 한 두 살 많았던 젊은 여자 선생님이었다.) 내 손을 꼭 잡으며 이야기해주었다.
” 조금만 더 해보자. 내가 더 도와줄게. 잘하고 있어! “
그제야 나는 선생님의 두 눈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따뜻한 눈빛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 나는 네가 얼마나 열심히 과제를 해오고, 준비해오는지 알고 있어. 너는 정확한 문장을 말하기 위해 집에서 미리 준비해오거나 외워오잖아?
다른 학생들은 틀린 문법으로 대충 말하는데 넌 그렇지 않아. 그리고 나는 너의 그런 모습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해.”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선생님의 격려에 나는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그리고 좀 더 공부해 보겠다고 선생님께 약속을 했고, B1.1까지 딱 5개월을 채운 후, 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다. 여전히 나는 잘 알아듣지 못했고 잘 말하지도 못했지만 더 이상 학원을 다닐 수는 없었다. 독일어 학원에서 느끼게 되는 중압감과 스트레스가 나를 옥죄여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운이 좋았다.
저렴한 학원은 딱 그만큼의 아웃풋이 나오기 마련인데, 내가 만난 선생님은 열정이 넘쳤고 젊었고 대학에서 정식으로 언어 교육학을 전공한 분이었다. 학원을 그만둔 후에도 그녀와 종종 웟츠앱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 또한 학원을 그만두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 당시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기꺼이 나의 과외를 도맡아 주었다. 평소에 내가 궁금하고 헷갈렸던 부분을 콕 짚어 알려주거나 함께 박물관 관람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등의 시간은 독일어에 대한 막연한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어떻게든 독일어를 내뱉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 때문에 적잖게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지만 꽤 특별하고 근사한 선물 같은 시간이었음은 틀림없었다. 그렇게 몇 달을 함께 독일어 공부를 하다, 선생님은 그녀의 꿈과 사랑을 찾아 홀연히 스페인으로 떠났다. 자연스레 그녀의 부재와 함께 나의 독일어 공부에도 공백기가 생겼다.
잘됐다 싶었다.
내 인생에 독일어 공부는 여기까지라 생각하고 손을 놓기 직전, 이미 오랜 시간 동안 유학을 해오던 주변의 1.5세들이나 유학생들이 나를 볼 때마다 자꾸 독일어 공부 이야기를 해대기 시작했다. 독일어 공부는 처음 시작하는 일 년이 중요하다느니, 나중에 다시 잡기는 힘들다느니 그런 말들이 들려올 때마다 아쉽게도(?) 나는 쿨하게 한 귀로 흘리지 못했다. 이 또한 운명이었나. 나는 다시 국가에서 운영하는 교육 센터 (Volkshochschule/폭스 호흐 슐레)에서 제공하는 독일어 강의를 신청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경쟁률이 꽤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선착순에 들어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다. 나의 독일어 수준은 여전히 A1.2에 머물러있었고 여전히 어려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독일어로 듣고 말하는 것에 예전보다 익숙해져 있음을 깨달았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중요한 내용을 들어도 금세 까먹거나 어버버버 이야기하는 정도는 여전했지만 독일어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시간은 흘러 그해 연말이 되었고 눈물을 머금고 달려갔던 1년 간의 공부는 독일에서의 삶 속에 꽤나 굵은 나이테로 남게 되었다.
베를린 살이 2년 차가 되자 아주 조금씩 조금씩 독일어가 눈으로, 귀로 들어오기 시작했고 입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놀라웠다.
집으로 날아오는 모든 편지, 공문서 심지어 광고까지도 독일어로 쓰여있다면 죄다 붙잡고 해석해보았고, 우연히 내 귀로 들어온 생소한 단어는 사전을 뒤지고 뒤져서라도 찾아내야 직성이 풀렸다. 어쩌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독일어 스터디 그룹을 만들고 독일어를 공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자발적으로 독일어를 붙잡았다고 하기엔 꽤나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독일어가 나를 놓지 않았다고 해야 하려나. 독일어는 지독히도 나를 붙잡아댔다.
알고 보니, 언어는 단순히 글과 문자가 아니라, 문화이며 역사이고 고유한 삶이자 습관이었다.
나는 이제 한 아이의 엄마로서 또 다른 궤도에 올라 새로운 영역의 독일어를 배우고 이 시기에 맞는 삶의 형식을 배워나가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독일어는 끝나지 않은 숙제이며 독일인을 이해한다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그들이 나를 받아주고 인정해주려는 노력만큼 나도 그들의 언어를 끊임없이 배워나가고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아무런 계획도, 어떠한 확신도 없이 무턱대고 날아온 베를린이라는 장소와 이곳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야만 했던 독일어 -이처럼 복잡 미묘하면서도 철저히 규칙을 따르는 언어가 또 있을까?- 는 나에겐 운명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언어를 문법에 따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언어라는 ‘도구’를 이용하여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깨닫고 있다.
지금도 독일어가 술술 나오는 날보다 한 단어 한 단어가 목에 걸린 듯 턱턱 막히고 부딪혀 나오는 날들이 훨씬 더 많다.
하지만, 아무쪼록 작은 실수에도 발발 떨며 후회하고 자존심 상해하지 말고, 그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언어로 이해하고 그들의 언어를 빌어 어느 정도 이야기할 수 있음에 감사하려 한다. 그 정도 마인드가 독일어 쫄보에겐 딱 적당할 것이니.
- 작가: KIRIMI/KiRiMi 일러스트레이터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삶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득 영감을 받아 무작정 기록해보는 진솔한 이야기.
- 본 글은 KIRIMI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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