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치즈라면 환장했다.
하지만 한국에서 먹었던 치즈는 숙성된 맛이라기보다는 그냥 짭짤하고 고소한 맛이었다. 지금은 우리나라에도 각종 치즈류가 다양하고 풍성해졌지만 어렸을 때 먹었던 치즈는 딱 두 종류, 체다 슬라이스 치즈 아니면 모차렐라였기 때문이다. 전자는 가공 치즈, 후자는 비숙성 치즈다. 15년 넘게 해 온 외국 생활이 그리 만만치는 않지만, 그래도 치즈 러버로서 외국살이의 장점이라면 무엇보다 치즈가 싸고 풍부하다는 것. 한국에서 장을 볼 때면 치즈와 버터의 가격에 굉장히 공손한 자세를 취하게 된다.
어렸을 때 <초원의 집>을 정말 좋아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런저런 것들을 손수 만들어 먹던 이야기에 특히 폭 빠져들었는데, 그중에서도 버터와 치즈를 만드는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크림을 절구질해서 버터를 만들고, 당근으로 색을 낸 뒤에 딸기와 잎사귀 모양의 틀로 예쁘게 찍어내던 이야기. 또 크림을 걷어낸 우유를 데워서 레닛을 담가 뒀던 물과 소금을 넣어 섞은 뒤, 통에 담아 누름돌로 눌러 둥그런 치즈를 만들어 차곡차곡 쌓아두던 이야기. 그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절굿공이에 묻어 나온다던 버터 알갱이의 맛을 상상했고, 정말 저렇게 보름달처럼 둥근 치즈를 보고 싶다고 생각하곤 했다.
미국 마트에서 처음 만난 치즈 섹션은 모험과 신비가 가득한 세계였다. 세상에 이렇게나 치즈의 종류가 다양했다니. 이제 유럽에 와서 살고 있으니 치즈 섹션은 행복과 콜레스테롤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나에게 달려오는 세계다. 읽기도 힘든 각종 언어들로 쓰인, 유럽 각지에서 모인 치즈들을 보면 그냥 행복하다.
필라델피아에 살 때는 이탈리안 마켓 안에 있는 오래된 치즈 가게들을 참 좋아했다. 그 안에 들어가면 주렁주렁 매달린 치즈, 나무통에 든 치즈, 두툼한 껍질을 입고 동글동글 쌓인 치즈, 그렇게 눈과 코로 확 들어오는 치즈들의 향연이 너무나 근사했다. 갓 만든 매끄러운 모차렐라가 뽀얗게 유청에 담겨있는 모습이 얼마나 유혹적이던지. 샘플 인심도 후해서 이것저것 먹어보면서 입맛에 맞는 치즈들을 고를 수 있었다.
그렇게 체다와 모차렐라 말고 많은 이름들을 위장으로 배웠다. 포슬포슬 시큼한 고트 치즈, 텁텁하고 짭짤한 페타, 밀도 높은 쫀쫀한 생크림 같은 마스카포네, 맛은 비슷하지만 비지 같은 질감의 리코타, 한국에도 팬이 많아진 브리와 까망베르(그렇게 먹어댔지만 구별 못한다), 부드럽고 녹진한 묑스테르, 미국에서 안주로 많이 먹던 잭 삼 형제 – 콜비 잭, 페퍼 잭, 몬테레이 잭 – , 훈제 향이 매력적인 하우다(고다), 처음에 보고 두부인 줄 알았던 파니르. 톰과 제리에 나오던 구멍 난 치즈 이름은 에멘탈이라는 걸 알게 됐고, 그릴드 치즈 샌드위치엔 프로볼로네를 도톰히 넣고 파스타에는 페코리노 로마노를 덩어리째 사서 갈아 뿌려 먹게 되었다. 아찔한 맛으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블루치즈 계열은 이젠 너무나 좋아한다. 만체고에 푹 빠져서 끼고 살았던 적이 있고, 최근에는 까만 트러플이 박혀 대리석처럼 보이는 트러플 치즈와 고소한 구름을 먹는 듯한 카이막 치즈의 맛에 반해 있다.
독일은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치즈 문화가 조금 약한 편에 속하지만 (옆 나라에서 다양한 치즈들을 숙성시킬 동안 이 인간들은 맥주만 줄창 숙성시켰지 싶다) 내가 사는 바바리아 지방에는 브로트 자이트(Brotzeit, 영어로 직역하면 bread time)라는 전통적 음식 문화가 있어 치즈가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브로트 자이트는 부담 없이 즐기기 좋은 간단한 스낵형 식사라고 생각하면 되겠다. 빵과 버터, 각종 치즈, 햄이며 살라미와 달걀, 빛깔이 예쁜 순무와 통째로 절인 작은 오이, 렐리쉬 같은 걸 플래터에 파이팅 넘치게 주르륵 늘어놓고 먹는 건데, 여러 종류의 치즈가 널려 있어야 하므로 아예 마트에서 다양한 치즈들이 한 팩으로 든 제품을 팔기도 한다. 유럽에 살다 보니 미국과는 치즈를 대하는 자세에서 가끔 차이가 느껴진다. 일단은 여기저기에 치즈를 아낌없이 섞어 요리 재료로 쓰는 미국에 비해 유럽에서는 치즈 그 자체를 독립된 음식으로 즐기는 경향이 더 큰 것 같다. 또 한 가지 차이는 가공 치즈류에 대한 생각. 이곳의 치즈 섹션에는 가공 치즈류의 점유율이 정말 보잘것없을 만큼 현저히 낮다. 치즈 맛 물건이 아닌 진짜 치즈들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는 것 같달까.
어쨌든 아무리 독일이 유럽 내에서 치즈 문화가 좀 약한 편이라고는 해도 치즈 문화가 잘 숙성된 스위스와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같은 나라와 이웃하고 있어 치즈를 이용한 요리에도 꽤 진심이다. 내가 맥주 빼고 독일에서 가장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은 캐제 슈패츨레(Käsespätzle)다. 고급스러운 맥 앤 치즈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올챙이국수 모양의 갓 만든 쫀쫀한 슈패츨레에 쭉쭉 늘어나는 에멘탈 종류의 치즈들을 섞고 그 위에 바삭하게 구운 얇은 양파를 잔뜩 얹어낸다. 한 숟가락 뜰 때마다 찐득한 치즈가 쭈우욱 늘어나서 보기에도 행복하고 입에 넣으면 농밀한 치즈 맛이 일품인 음식. 여린 파나 차이브를 잘게 썰어 섞으면 색감도 좋아지고 느끼함도 살짝 잡아준다.
독일 음식은 아니지만 몽글몽글하게 녹은 치즈가 스르르 접시 위로 내려앉을 때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게 되는 라클레트(Raclette)는 우리 꼬맹이들도 정말 좋아하는 우리 집 인기 메뉴다. 냄새를 맡기 약간 불편할 정도로 꼬롬한 냄새가 나는 치즈들을 쓰는데, 일단 녹이면 거부감은 사라지고 고소한 풍미가 작렬한다. 나중에 진짜로 스위스에 가서 정말 거대한 치즈를 긁어 만드는 라클레트를 먹고 싶다는 버킷 리스트가 있다. 그 마음을 숙성시키는 중.
가운데가 라클레트(사진출처: Hummingbird High), 양 옆이 캐제 슈페츨레
모든 치즈들이 숙성과정을 거치는 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모차렐라와 리코타, 파니르 같은 치즈들이 비숙성 치즈다. 이런 생치즈가 어린아이처럼 담백하고 보드라운 느낌이라면 숙성치즈는 일단 아이의 느낌은 아니다. 어른들로부터 살아온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맛이랄까. 사연 있는 처자, 뚝심 있게 살아온 시장 아줌마, 위기의 주부, 한없이 포근한 만인의 이모, 깐깐해 보여도 알고 보면 은근히 다정한 선생님, 곱게 늙은 할머니, 그런 느낌의 치즈들.
나는 치즈들을 맛보면서 떠오르는 사람들을 매치시키는 놀이를 종종 즐긴다. 이 놀이가 가능하다는 건 그만큼 치즈의 삶과 우리의 삶이 비슷하단 얘기다. 숙성의 정도에 따라 맛이 달라지고 깊어지는 치즈들을 우물우물 먹다 보면 숙성의 의미가 콜레스테롤과 함께 내 안으로 닿아 온다. 나는 어떤 환경에서 스스로에게 양분을 주어가며 어떤 질감과 어떤 맛으로 숙성되어 가고 있는 걸까. 나는 과연 익고 있는 건가 썩고 있는 건가.
사실 발효와 부패는 종이 한 장 차이다. 발효와 부패라는 각각의 길로 갈리는 지점은 굉장히 오묘해 보인다. 좋은 재료와 균이 적절한 환경에서 만나면 근사한 음식으로 발효되고 숙성된다. 더 맛있어지고, 보존성도 좋아지고, 대체로 영양가도 높아진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재료는 무참한 모습으로 썩어가고 인간을 해하는 음식으로 변한다. 그렇게 발효와 숙성에 적절한 환경을 만들고 유지하는 일은 엄청난 노력과 탐구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일이다. 우리 몸과 마음이 영양가 높게 숙성되려면 우리를 키우고 영감을 주는 환경이 적절하게 유지되어야 하듯이. 또 부단히 몸과 마음 안으로 자양분들을 열심히 챙겨 넣고 꼭꼭 씹어 잘 소화시켜내야 하듯이. 그래야 우리도 좋은 향기를 내며 맛있게 성숙된다.
발효와 부패, 그 아찔한 스펙트럼에서 안전한 경계를 탐색하고 깃발을 꽂아두는 일 역시 그리 호락호락한 작업이 아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브리나 까망베르는 흰 곰팡이가, 고르곤졸라나 스틸턴 같은 건 파란 곰팡이가 핀 치즈다. 누군가 대담하게 시도해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치즈를 먹게 되었고, 꽤 무시무시하게 생긴 블루치즈까지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할머니가 보셨으면 당장 내다 버릴 비주얼을 한 치즈를 나는 오늘도 냉장고 한쪽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치즈뿐 아니라 지금의 발효음식 문화는 사람들의 무수한 시행착오가 쌓여 숙성된 것이다. 발효와 부패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용기 있게 탐색해 온 수많은 사람들. 그래서 숙성된 맛을 즐길 때는 겹겹이 쌓여온 그 노력이며 시간들의 무게가 느껴져 약간 마음이 찡해질 때가 있다. 맛 중에서 가장 고마운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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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해서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 있다. 하루 지난 피자나 치킨의 맛을 생각해 보면, 시간은 이들 편이 아니다. 하지만 찌개나 카레 같은 건 하루가 지났을 때 오히려 맛이 깊어지기도 한다. 나는 갓 지은 따뜻한 밥에 하루 정도 지난 꾸덕한 카레를 얹어 먹는 걸 좋아한다. 찌개를 갓 끓여놓고 맛을 봤을 때, 아직 맛이 제대로 섞이지 않아서 미친 맛이 날 때가 가끔 있다. 이때 필요한 재료는 국간장이나 마늘이 아니라 시간이다. 뭉근히 끓이면서 조금 놓아두면 재료들의 맛이 서로 섞이면서 조화를 이뤄 괜찮은 맛을 내곤 한다.
어렸을 땐 고기는 무조건 굽는 게 맛있는 줄 알고 물에 빠뜨린 고기들에는 큰 감흥이 없었지만, 지금은 오래 끓여서 국물이 진하게 우러난 곰탕이며 설렁탕 사진에 심장이 격렬하게 반응한다. 심지어 굽는 고기도 간이 어느 정도 배게 숙성시켜야 더 맛있다는 걸 이젠 안다. 돌돔이라는, 입에 넣고 굴려가면서 돌돔, 돌돔, 하고 계속 발음해 보고 싶은 물고기는 숙성시키면 치즈맛이 난다고 한다. 우리는 대체로 갓 버무려 풋내가 나는 김치보단 잘 익어서 시원한 맛이 제대로 든 김치에 환장하곤 한다. 이렇게 어떤 음식들의 경우에는 맛을 내는 가장 중요한 재료가 시간일 때가 있다.
빵도 그중 하나다. 사실 아이들이 새처럼 짹짹거리며 입에 넣을 빵이나 쿠키를 당장 내놓으라고 파닥거릴 때는 퀵 브레드가 답이다. 그럴 때 나는 머그컵에 재료를 넣고 전자레인지에 돌려 단 2분 만에 후딱 초콜릿 케이크를 만들어 주기도 하고, 오트밀 쿠키나 머핀처럼 바로 구워 그 조그만 입에 밀어 넣을 수 있는 것들을 잽싸게 만든다. 하지만 시간이 좀 넉넉하고 여유가 있을 때는 발효를 시켜 천천히 만드는 빵을 좋아한다. 퀵 브레드 종류와는 다른, 구웠을 때 몰랑몰랑하고 쪽쪽 찢어지는 질감도 좋지만 제일 좋은 건 반죽을 발효시켜 놓고 집을 나와 산책을 하면서 얼마나 부풀어 있을까 기대하는 그 재미다. 돌아와서 빵틀이 좁다면서 터져 나와 열심히 부풀어 있는, 아기 엉덩이 같은 반죽을 보는 행복감. 엄마 미소가 절로 난다. 살아있는 반죽이 열심히 노력한 흔적이니 귀엽고 대견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살아서 알맞게 발효한 것은 때가 되면 잘 썩는다. 곱게 썩어서 다시 자연으로 간다. 미국 마트에 원더 브레드라는 식빵 브랜드가 있었다. 혼자 먹으려니 잘 줄지 않아서 처음엔 걱정했는데, 곧 이 브랜드 네이밍의 의미를 깊이 실감했다. 일주일, 이주일, 한 달이 지나도 썩을 기미가 안 보이는 게 정말 원더였다. 미생물도 안 먹는 빵을 내가 먹고 있다니. 내가 베이킹을 시작한 건 순전히 기숙사에 오븐이 있었기 때문이었지만, 사실 시판 빵의 그 놀라운 인위성에 살짝 겁먹은 탓도 조금 있었다. 쉽고 간편한 퀵 브레드로 시작해서 곧 이스트로 발효시키는 빵으로 관심을 넓혔고, 결국에는 천연 발효빵에까지 흥미가 생겨 사워 도우 브레드를 만드는 통밀종을 꽤 오래 키웠었다. 결국엔 다시 이스트로 돌아오긴 했다. 일정량의 사워 도우를 계속 써줘야 하는 사이클에 맞춰 통밀종을 키우려면, 나의 식생활과는 맞지 않게 너무 많은 빵을 구워야 했기 때문이다.
<시골 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를 쓴 와타나베 이타루 씨는 균을 손 많이 가는 자식 같다고 말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란 사랑해주고 아이가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인데, 빵을 만드는 사람이 균에게 해줄 수 있는 일도 그와 유사하다고. 애정으로 대하고, 균이 잘 자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천연 발효빵을 만들어 먹을 때가 딱 그랬다. 내가 돌보아야 할 반려동물이 하나 생긴 것처럼 그렇게 발효종을 관심 있게 살피고, 먹이인 밀가루를 주고, 톡톡 기포가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웃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들여 반죽을 만들고 또 구워낸 빵에서는 독특하고 매력적인 맛이 났다. 내가 정성스럽게 무언가를 키우고 숙성시켜 그걸 내 입으로 넣는 일은 꽤 재미있고 행복했다.
내가 요즘 만드는 빵 중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들이는 건 포카치아다. 오랜 시간 반죽을 숙성시켜야 맛이 좋은 포카치아는 소박하지만 담백하고 씹을수록 풍미가 있다. 심심한 맛인데 웬일인지 아이들도 엄청 좋아한다. 하루가 넘는 준비 과정을 거쳐 만들어 낸 것이 반나절만에 뚝딱 사라지면 살짝 허탈하기는 해도 역시 기쁘다. 내 포카치아 레시피의 가장 중요한 재료는 시간이다. 속성으로 만드는 포카치아도 있지만 역시 시간을 들여 천천히 숙성시킨 맛과 질감을 따라갈 수 없다. 시간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건 베이킹에서도 불변의 진리인 것 같다.
점심에 반죽을 시작하려면 아침부터 준비한다. 우선은 올리브 오일에 허브나 칠리를 넣고 살짝 따뜻하게 만들어 천천히 맛을 우려내 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아침나절이 지나 올리브 오일 안에 향긋하고 맵싸한 맛이 충분히 들었으면 가루들을 꺼내 반죽 시작. 먼저 소스팬에 물을 데워 아기 목욕물 같은 온도의 따뜻한 물을 준비해 이스트를 넣어주고 이스트가 좋아하는 설탕을 한 술 넣어준다. 10분쯤 지나면 이스트가 엄청 신나 하며 보글보글 부풀어있다. 이제 여기에 물과 밀가루, 소금을 더해 천천히 섞을 차례. 5분 정도 섞다가 잠시 젖은 수건을 씌워 15분쯤 쉬게 둔다. 그렇게 서로 좀 친해질 시간을 좀 준다. 그런 뒤에 다시 15분 정도 더 섞으면 반죽이 말랑해지고 보울에서도 잘 떨어진다. 요 단계의 반죽을 마음껏 주무를 때가 너무 행복하다. 아이들을 불러 아이들의 손때도 넉넉하게 묻힌다. 이제 앞서 만들어 둔 올리브 오일을 조금씩 흘려 넣어 반죽과 보울 벽면이 살짝 코팅되도록 해 두고 산책을 나간다. 산책을 하는 동안 나는 주로 쓰던 글을 곱씹곤 하는데, 그러면서도 중간중간 이 녀석이 얼마나 부풀었을까를 생각하면 마음이 간질거린다.
집에 돌아와 두 배 정도 부풀어 몸집이 커진 녀석을 만날 때는 늘 신기하고 놀랍다. 아유 이렇게 컸구나, 반죽을 살살 쓰다듬으면서 공기를 머금고 빵빵해진 그 감촉을 확인한다. 빵이란 녀석들은 분명히 이렇게 빵빵해져서 빵이라는 이름이 된 걸 거다. 이제 체조를 시킬 차례. 손에도 오일을 바르고, 포카치아를 구울 팬에도 오일을 바르고, 양손으로 반죽을 들어 올려 반죽이 자신의 무게로 천천히 팬 바닥에 늘어지도록 여러 번 반죽을 쭈우욱 늘여준다. 체조를 마친 반죽을 바로 팬에 밀착시켜 늘이려고 하면 탄성이 있어서 잘 안 된다. 이때 랩을 씌워서 15분 정도 두었다가 다시 늘이면 신기하게도 왠지 그 시간 동안 아이들이 맘을 바꿔서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다. 사각 팬 구석구석 반죽을 꼼꼼히 늘여 모양을 잡은 뒤에 다시 랩을 씌워서 하룻밤 냉장시킨다. 이 하룻밤 숙성의 차이가 맛을 크게 좌우한다.
다음날 아침에 꺼내보면 또 추운 환경에서도 애들이 열심히 몸집을 부풀려 놨다. 이제 열 손가락을 세워 꾹꾹 눌러 온몸에 보조개를 만들어 주고, 남은 올리브 오일과 굵은소금을 뿌린 뒤에 또 알맞게 부풀 정도로 기다린다. 이 빵 하나를 굽는 데에만 멈춰 기다리는 순간이 무려 여섯 번이다. 그러고도 마지막으로 나는 여기에 느긋하게 시간을 좀 더 보태는 편이다. 빵을 좀 더 장식하기 위해서. 올리브, 당근, 방울토마토, 허브, 레드 어니언과 미니 페퍼 등 가진 재료로 그때그때 그림을 그리는데 사실 상상력 빈곤으로 늘 비슷한 모양이 되곤 한다. 그래도 이렇게 모양을 내 가면서 한 텀 더 쉬어가는 시간이 즐겁다. 허브며 각종 부재료를 놓아 구우면 향기와 맛을 더해주기도 한다. 아이들도 재밌어한다.
사실 할 일은 많고 모든 일에 들일 시간은 늘 부족하다. 그렇기에 할라나 포카치아처럼 시간이 드는 빵을 구울 수 있는 건 한 달에 많아야 두 번 정도다. 하지만 그래서 더 즐겁고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되는대로 재료를 긁어모아 후딱 뭔가를 만든 뒤에 십분 내로 입에 밀어 넣는 순간의 만족감도 말할 수 없이 크지만, 이렇게 정성과 시간을 차곡차곡 쌓아 뭔가를 만든 뒤 그걸 천천히 음미하는 행복감도 그 못지않게 크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속성과 숙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며 경계에서 줄타기를 즐긴다.
(글이 너무 길어지는 느낌이라 한 번 자르고 가겠습니다. 다음 글에 계속.)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정치철학 박사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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