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시절식을 두루 챙기는 분이셨다.
설이면 좋은 쌀을 티끌 없이 갈무리해서는 방앗간에 가서 꼭 떡을 뽑아 오셨다. 엄마를 졸졸 따라 방, 앗, 간이라는 빨간 글씨가 한 글자씩 크게 쓰인 격자형 미닫이문을 드르륵 열고 들어가던 동네 방앗간. 그곳에선 꼭 외할머니 댁에서 나던 냄새가 났다. 시간의 냄새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옛 냄새가 고소한 참기름이며 콩가루 냄새와 버무려져, 문을 드르륵 열면 따뜻한 습기와 함께 코에 훅 하고 와 닿았다.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편안하면서도 마음이 두근거리는 냄새였다. 곧 맛있는 걸 잔뜩 먹을 수 있고 꼬까옷 입고서 사촌들을 만나 신나게 놀 수 있다는 걸 알려주던 냄새. 갓 뽑아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말랑말랑한 떡 몇 가락은 그냥도 먹고, 곱게 다진 파가 듬뿍 들어간 양념장에 찍어도 먹었다. 긴 가래떡을 불에 적당히 그슬려 젓가락에 꽂아 주시면 꿀에 찍어 먹기도 했다. 몰랑한 떡을 입안 가득 베어 물면, 쫄깃한 구름 한 점이 입안에 가득 든 것 같은 만족감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엄마는 남은 떡들을 꾸덕하게 말려 가지런히 썰어서 뽀얀 떡국을 만드셨다. 색색의 고명이 얌전히 올라간 떡국을 보면서 나는 흰 구름 위에 무지개가 뜬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 떡국을 한 그릇 먹어야 또 한 살을 먹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나이를 한 살씩 먹는 건 그렇게 무지개를 쫓으며 뜬구름을 잡아가는 일일까. 나이 먹는 데 두려움 없이 용맹했던 꼬꼬마들이 슬금슬금 두 그릇씩 먹어도 봤지만 나이는 얄짤없이 딱 한 살씩만 올라갔다. 나이는 그렇게 누구나 예외 없이 정직하게 한 살씩 먹는 것이었다.
추석에도 우리는 방앗간에 들렀다. 이번에는 눈처럼 하얀 쌀가루와 청자 같은 색감의 쑥가루를 빻아왔다. 엄마는 가끔 치자를 우려낸 고운 노란 물을 반죽에 입히기도 하셨다. 온 가족이 둘러앉아 까르르 웃으며 송편을 만들던 시간은 내 유년기의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된다. 뜨거운 물을 조심조심 부어 익반죽을 해야 했는데, 오래 치대 매끄러운 반죽을 만드는 일은 주로 어른들이 맡으셨다. 우리는 빨리 반죽을 만져보고 싶어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는 말에 처음에는 우리 사 남매 모두 정성을 들였지만, 얼마 안 있어 엉망진창이 되고 말았다. 미술시간에 쓰던 찰흙보다 더 보드랍고 따뜻하고 색이 예쁘던 반죽들. 토끼며 뱀, 돼지를 빚어 동물원을 만드는 자연주의파와 똥이나 우주선, 아메바 같은 것을 만드는 다다이즘파가 있었고, 엄마 아빠는 그런 우리를 웃으며 바라보셨다. 반달처럼 매꼬롬한 엄마 송편이 항상 제일 예뻤다. 우리 집 일을 거들어 주던 정애 언니는 콩을 넣고 꾹꾹 손가락 자국이 남도록 만드는 강원도식 송편을 빠른 속도로 빚어냈다. 언니네 고향에서는 쌀가루 대신 감자녹말로 반죽을 만들기 때문에, 쪄 놓으면 살짝 투명한 게 참 예쁘다고 언니는 항상 말하곤 했다. 각각의 개성이 지문처럼 꾹꾹 찍힌 떡들을 솔잎과 함께 쪄낼 때의 그 냄새란. 엄마가 참기름에 살짝 버무려 주신 갓 쪄낸 송편 속에서, 내가 만들어 넣은 희한한 모양의 송편을 찾아 입에 쏙 넣는 건 우리에겐 특별한 놀이이기도 했다. 그러다 입을 덴 것만도 한두 번이 아니다. 보름달이 뜨는 추석에 왜 반달 모양의 송편을 빚는지 궁금했던 어린 나에게, 아빠는 삼국사기에 들어있다는 옛날이야기를 일러 주셨다. 보름달은 어김없이 기우는 달이지만 반달은 비웠다가 차는 달이라고. 송편 많이 먹고 한 해 한 해 보름달처럼 차오르는 사람이 되라고. 나는 그렇게 엄마의 송편과 아빠의 이야기로 배를 채우면서 한 해 한 해 동그랗게 커 갔다.
엄마는 전날부터 음식 준비로 바쁘셨는데도 정작 나는 차려진 음식에 별 감흥이 없었던 날은 정월 대보름이었다. 빨갛고 노랗고 검은 곡식들이 들어간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을 엄마는 매번 손수 차리셨다. 말린 나물로는 호박고지, 시래기, 취나물, 고사리, 토란대나 고구마 순을 준비하셨고 여기에 도라지, 숙주, 콩나물이나 시금치가 그때그때 더해졌다. 어릴 적에는 잡곡이나 나물이 맛있는 줄 몰랐다. 그나마 입에 익은 말캉한 고사리나 꾸덕한 호박고지, 보드라운 숙주나물 위주로 입에 넣었고, 질기고 쓴 나물들은 그저 나물 종류를 다 챙겨 먹어야 한다니 몇 줄기 입에 넣었을 뿐이다. 밥도 부드럽고 매끈하게 꿀떡꿀떡 넘어가는 쌀밥이 더 좋았다. 음식보다는 내 더위를 친구들에게 어떻게 하면 은밀하고도 위대하게 팔 수 있을지 궁리하는 게 재미있었고 달님께 빌 소원이 급했다. 예나 지금이나 온갖 종류의 견과류에 환장하는 내가 대보름에 그나마 좋아했던 것은 부럼 깨기였다. 부럼은 아빠 담당이었다. 호두는 신문지를 두툼히 펴고 망치로 깨서 고소한 알맹이를 골라 입에 넣었고, 땅콩은 아그작 이로 깨물어 매끈한 알맹이를 추렸다. 땅콩이나 호두 껍질이 예쁘게 반으로 짝 쪼개지면, 언니와 나는 엄지 공주의 침대며 조각배로 책상 서랍에 소중하게 보관하곤 했다. 아빠는 우리 넷에게 가장 예쁘고 실한 땅콩을 하나씩 고르게 한 뒤 하나씩 철사에 꽂아 불을 댕기셨다. 땅콩이 잘 타면 그 해 운이 좋다고 했다. 내 땅콩이 잘 안 타고 불이 중간에 꺼질까 봐 늘 조마조마했지만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땅콩들은 우리의 환호성 속에서 항상 따뜻한 빛을 내며 활활 타고는 검게 스러졌다. 그렇게 나는 매년 무지개와 구름을 담은 떡국을 먹고 반달 같은 송편을 먹으면서, 또 땅콩에 붙은 환한 불과 그 불이 스러지고 남은 재를 보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을 배웠다.
엄마는 마당에 진달래가 곱게 피면 소쿠리에 송이송이 따 담아 화전도 만드셨다. 뒤집을 때마다 우와, 탄성이 절로 나왔다. 기름에 지져내 꿀을 살짝 바른 화전은 반짝반짝 너무 예뻐서 먹기가 아까웠다. 엄마 옆에서 진달래보다 향이 열 배는 좋은 라일락을 따다가 찹쌀 반죽에 꾹 박아 봤지만, 기대했던 라일락 향은 온데간데없이 소태처럼 쓰기만 했다. 내 구겨진 얼굴을 보며 웃으시다가도 엄마는 꼭 정색하며 당부하셨다. 암만 비슷해도 철쭉으로 화전을 만들면 큰일 난다고. 그렇게 나는 입술에 기름을 잔뜩 묻힌 채 엄마한테 진달래와 철쭉의 구별법도 배웠다. 단오 무렵이면 엄마는 이모나 동네 아주머니들과 같이 쑥을 캐다 향긋한 쑥떡이며 쑥버무리도 만드셨다. 엄마가 캐 온 쑥 봉지에 코를 박고 있으면, 온몸이 파랗게 물드는 것 같은 쑥향이 그렇게 좋았다. 향이 진동하는 그 따뜻한 떡을 먹으면 정말로 내 몸에서 향기라도 나서 나쁜 일은 물러가고 향기롭고 좋은 일만 찾아올 것 같았다. 복날에는 영계가 삼이며 대추, 찹쌀, 밤 같은 것을 불룩하게 품고는 뽀얗게 익어갔고, 그걸 잔뜩 먹은 우리들 배도 볼록하게 솟아났다. 엄마는 가을에는 꼭 잊지 않고 그 해 토란 맛을 보여주셨고 동지에는 나이 수만큼 새알심을 빚어 팥죽을 끓이셨다. 나는 그 팥죽이 당최 맛이 없어서 쫀득한 새알심으로만 배를 채우곤 했다. 연탄불이 꺼지지 않게 밤중에 연탄을 가는 엄마를 따라나서면, 오는 길에 뒷마당에 묻은 살얼음 낀 동치미 독에서 아삭한 무를 얻어먹기도 했다. 시절식은 아니었지만 겨울에 마루 한 자리를 차지하던 석유곤로 위에다 노릇노릇 볶아 주시던 콩 맛도 아직 잊지 못한다. (곤로는 일본어인 것을 알고 있지만, 나에겐 석유곤로라는 말 자체가 그 시절 그 곤로 위에 일던 아지랑이처럼 따뜻하게 일렁이는 추억이라 이 글에서는 바꾸고 싶은 마음이 없다.)
시간이 지나 동네 방앗간은 하나 둘 자취를 감췄고 대신 골목에는 베이커리며 제과점이 늘어났다. 약간은 촌스러운 듯한 구수한 냄새 대신 온 골목을 채우는 달콤한 빵 굽는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나는 곧 방앗간 냄새를 잊고 빵집 냄새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석유곤로에 불붙던 순간의 그 은근히 좋았던 매캐한 냄새도 방앗간 냄새와 함께 점점 사라졌다. 대신에 집집마다 하나 둘 보일러가 들어섰고, 쫀득한 떡보다는 살살 녹는 빵을 더 자주 만나기 시작한 내 혀는 한동안 석유곤로에 볶은 콩 맛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빵집에 열광하던 나는 유학길에 올라 빵을 주식으로 먹는 나라에 살게 되었다. 학교 기숙사 부엌에도 기본으로 오븐이 있었다. 나는 드디어 그 달콤한 빵 냄새를 내가 쓰는 부엌에서 낼 수 있었다. 좋아하는 빵이며 파스타를 맘껏 먹게 되어 처음엔 행복했지만 점차 그 행복에 비례해 집밥과 한식이 그리워졌다. 기름진 파스타며 스테이크가 맛은 좋았지만 소박한 반찬에 밥과 국을 먹을 때가 속이 편했다. 내 손으로 직접 해 먹어야 하니 빵도 파스타도 그리 신나는 건 아니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누렸던 그 찬란한 기억들은 모두 엄마의 어마어마한 수고 위에 놓인 것이었음을. 한식은 무엇보다 재료 손질에 품이 많이 들었다. 뭘 만들든 일단 마늘부터 까서 다져야 한다는 고단한 사실. 엄마는 마늘을 까면서 내게 종종 절구질을 시켰지만 손에 냄새가 밴다며 내가 마늘 까는 건 한사코 말리셨다. 그래서 마늘 까는 게 이렇게 귀찮은 일인지, 이 놈의 마늘 속껍질이 이렇게 들러붙어 잘 안 까지는 건지는 미처 몰랐다. 다진 마늘을 대량 생산해서 냉동실에 넣어 둘 때면 나는 청룡언월도를 잘 벼려둔 관우처럼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었다.
재료를 구하기도 쉽지 않고 요리에 들일 시간도 부족했던 외국에서의 첫 학기, 내 식탁에는 차츰 요상한 한식들이 올랐다. 우리말로도 정신이 사나운 철학책들을 외국어로, 외국인들의 속도로 읽고 글을 써 내려니 힘이 부쳤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급급했고 그저 남은 재료들을 상하기 전에 먹는 게 목표였다. 새로 접한 베이킹에는 주말 같은 때 시간과 공을 들였지만 한식은 대충 막 만들었다. 여기선 어차피 아무도 모를 텐데 하는 마음에 슬금슬금 된장국에다 만두나 떡, 브로콜리를 던져 넣었고, 계란물에 간장과 고춧가루를 조금 넣어 간을 하곤 했던 엄마표 계란말이의 혼종 오마주로 라면 국물을 조금 넣은 계란말이를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문제는 룸메이트들이었다. 누가 볼까 두려운 음식을 잽싸게 먹을라치면 귀신같이 나타나서 관심을 보였다. 좋은 냄새나네, 이 요리는 이름이 뭐야? 이거 만드는 법 가르쳐 줘.
한국에서 이런 개밥을 먹는다고 알려줄 수는 없었다.
두부부침, 김치전, 오이무침. 작은 거라도 제대로 만들어서 맛 보이고 싶은 마음에 하나둘씩 내 한식은 다시 제자리를 찾았고, 유난히 한식을 좋아하던 친구들 덕분에 나는 난생처음 내 손으로 미국에서 그녀들과 김치를 담그기 시작했다. 희한하게도 대만 친구보다 불가리아 친구가 한식에 열광했다. 한국 식당에서 너무 맛있는 수프를 먹었다며 나에게 만들어 달라고 외쳐대던 ‘야끼정.’ 그곳이 한식당이 맞느냐고, 그런 이름의 한식은 없다는 나에게 집념의 그녀는 결국 그 집 메뉴를 한 장 얻어와 보여줬는데 그건 바로 육개장이었다. 지금은 모두 가정을 꾸려 아기 엄마가 된 룸메이트들은 무엇보다 내가 만들어 준 한국음식으로 나를 기억하고 있다. 오랜만에 모여 친구네 집에 아기의 탄생을 축하해 주러 갔을 때, 불가리아 출신의 그녀는 놀랍게도 미역국을 먹고 있었다. 입이 떡 벌어진 내 앞에서 자기 요리 노트를 열어 ‘진민 두부(Jinmin’s Tofu)’라고 써 놓은 내 양념 두부부침 레시피를 보여주었을 때, 내 마음은 그야말로 두부처럼 말캉해졌다. 엄마한테 배운, 내가 가장 아끼는 레시피였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정작 고국에 잠깐씩 돌아가 있을 때면, 나는 엄마 집밥을 얻어먹느라 바빴다. 외국 친구들에게조차 내 음식의 기억을 선물하고 다녔건만, 부모님께는 내 손으로 정성스레 만든 밥상의 기억을 제대로 드리지 못한 몹쓸 딸이었던 것이다. 새로 마스터한 쿠키며 스콘이며 타르트 같은 것을 만들어드리긴 했지만, 좋은 식당에 모시고 가기는 했지만, 엄마한테 배운 반찬들을 소박하게 내 손으로 만들어 드렸어야 했다는 생각은 이렇게 나이가 들어서야 뒤늦게 들고 말았다.
시간이 흘러 독일에 살고 있는 내가 가장 그리워하는 먹거리는 의외로 대보름에 먹던 나물들이다.
가장 뚱하고 맨들맨들한 얼굴로 대했던 음식이 이제는 가장 아쉽다니, 역시 인생이란 이렇게 알 수 없는 건가 싶다. 미국에서도 독일에서도 전이며 불고기, 갈비찜이나 백숙 같은 것들은 부족한 맛이나마 그럭저럭 재료를 사다가 비슷한 걸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설날엔 떡을 사다 떡국을 만들고 추석에는 한국 마트에서 송편을 사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물은 달랐다. 마땅한 대체재가 없는 것이다. 그 땅에서 돋아나 자라는 나물은 그 땅의 흙과 공기가 아니면 얻기 어렵고, 어쩌다 얻어도 그 맛이 나질 않았다. 냉이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나는 미국의 어느 한국 마트에서 냉이라고 이름 붙은 걸 한 단 샀다가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건 그냥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는 질기고 거대한 식물이었다. 냉이에 버금가게 좋아하는 미나리도 속는 셈 치고 사 봤지만 역시 속았다. 미나리가 아니라 셀러리의 좋은 친구 같은 느낌이었다.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우니 그 안에 즐거움이 있다’는 논어 술이(述而) 편의 공자님 말씀은 안빈낙도와 청렴한 삶을 담은 구절로 여겨지지만, 외국에 사는 사람에게 나물은 안빈도 청렴도 아닌 특권에 가깝다. 또다시 코를 박고 싶은 쑥이며 향긋한 냉이, 야들야들한 미나리, 뿌리 끝까지 단 시금치, 오동통한 고사리, 희게 볶아도 빨갛게 무쳐도 입맛 당기는 도라지, 쌉싸름한 취나 씀바귀 같은 건 한국 땅에는 지천으로 널려 있지만 한국 땅을 벗어나면 쉽게 즐길 수 없는 귀한 보물들이다. 그 보드랍고도 아삭한 식감과 알싸한 향은 그리 오래가는 것도 아니고 냉동으로도 잡아둘 수 없는 것이라, 나는 겨우 말린 나물 몇 가지를 가져다 갈증을 채울 수 있을 뿐이다. 오랜 시간 동안 고국의 계절을 입고 날씨를 먹으며 잘 마른 나물들을 부드럽게 불리고 끓이면서, 나는 하나도 힘든 걸 아홉 가지나 꼬박꼬박 챙기셨던 엄마의 마음을 생각한다. 팬에 들기름을 넉넉히 붓고 나물을 볶으면 코에 훅 끼치는 구수한 습기에, 잊고 있었던 방앗간 냄새를 떠올린다.
사탕이며 과자며 빵을 좋아하던 어린 딸에게 시절식으로 계절과 인생을 알려주시던 부모님은 이제 멀리 계시다. 아빠는 당신 몫의 생의 불꽃을 모두 태우시고 돌아오실 수 없는 곳으로 가셨고, 각종 색과 맛과 냄새로 영롱한 기억을 주셨던 엄마는 이제 머릿속에 뿌연 안개를 담은 채 누워 계신다. 좋아하시던 나물은 그 언젠가 당신이 작은 아기인 나에게 먹이셨을 때처럼 아주 잘게 다져야만 겨우 드실 수 있다. 지난겨울, 아기처럼 누워 계신 엄마께 그 잘게 다진 나물을 반찬으로 먹여드리면서 나는 많이 울었다. 명절에 전화해서 엄마가 그때 만들어주시던 음식들이 맛있었다고, 그 맛을 내고 싶은데 잘 모르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은 몇 년째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가슴에만 들어있다. 부모님께 손수 만든 밥상을 몇 번 올리지 못한 회한은 그 막막한 가슴 안에 멍으로 남아 있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부모님께 받은 그 따뜻하고 맛있고 배부른 찬란한 기억들을 내 아이들에게 전해주는 일이다.
한 때 세상에 “You are what you eat(당신이 먹는 것이 당신이 됩니다).”이라는 슬로건이 유행했었다. 건강한 식생활을 권하는 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먹는 것으로 당신이라는 사람을 알 수 있다는 채식주의자들의 슬로건도 될 법한 말이고, 먹는 것이 영양소가 되어 우리 몸을 구성하니 그대로도 맞는 말이지만, 먹는 것이 나를 만든다는 말은 그 안의 기억과 촉감과 냄새와 그 음식을 정성으로 만들어 내 입에 넣어주시던 마음들이 나를 만든다는 말이기도 하다.
“I think, therefore I am(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그래서 나에게는 “I eat, therefore I am(나는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으로 변한다.
내가 먹어 온 것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또 앞으로 내가 먹을 것들이 나라는 사람을 만들 것이다.
그렇게 내가 먹는 것은 내가 된다.
제대로 된 한식집을 찾기 힘든 독일 남부에서 자라고 있는 내 아이들이 유년기에 기억할 한식은 팔 할 이상이 나의 지분일 것이다. (국물 요리에 일가견이 있는 남편에게 이 할 정도의 지분을 수여하겠다. 지분을 늘려가는 것은 언제나 환영이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기억 창고가 점점 또렷이 채워지기 시작하는 지금, 조금 힘들더라도 점점 시절식을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다행히 독일에는 한국 같은 사계절이 있다. 먹을 수 있는 꽃으로 화전을 만들면서 엄마의 엄마 얘기를, 쌀가루를 내어 송편을 빚으면서 엄마의 아빠 이야기를 해 줄 것이다. 아이들에게 진달래와 철쭉을 구별하는 법을 알려줄 것이고, 송편 많이 먹고 한 해 한 해 보름달처럼 차오르는 사람이 되라고 얘기해 줄 것이다. 음식이 단지 음식이 아님을, 그 안에 든 많은 것들이 나의 몸을 살찌우고 마음을 토닥이는 것임을 알려주고 싶다. 이것이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끼니들로 나를 채워주신 부모님께 뒤늦게나마 할 수 있는 효도가 아닐까.
내가 사는 유럽은 꼭 아홉 가지 나물 같은 사람들이 비빔밥처럼 모여있는 곳이다. 오곡밥처럼 다양한 색의 얼굴들이 국가라는 한 그릇 안에 담겨있는 곳이다. 팍팍한 삶이 입에 넣기에 다소 거칠지라도, 저마다의 향으로 질기게 살아가고들 있다. 그 안에서 나도 밥을 먹으며 살아간다. 구름 속에서 무지개를 쫓으며, 한 해 한 해 조금이라도 차오르려고 노력하면서, 내 삶의 불꽃을 천천히 태워갈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달그락달그락 아침을 준비한다. 주말이라 느지막이들 일어나 먹을 오늘 아침은 어제 불려 둔 잡곡을 넣은 밥에, 며칠 전 마음 가는 대로 담근 김치, 엄마처럼 간장을 약간 넣은 계란말이, 아이들이 좋아하는 무나물, 그리고 여기서 가까운 곳에서 잡혔다는 표기가 붙은 작은 고등어 구이다. 다음에 또 공항에 내려 참기름 냄새를 맡으며 행복해질 때까지, 나는 내 부엌에서 부지런히 참기름 냄새를 솔솔 피울 것이다.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정치철학 박사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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