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와 공포의 시간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줄 것인가
어제 이 곳에도 5주간 모든 초등학교와 유치원을 닫기로 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남쪽으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이탈리아에서 휴가를 보내는 일이 많은 독일의 특성상, 점차 확진자의 상승세가 가파른 곡선을 그리고 있던 차다.
아이들의 모든 짐과 함께, 부활절을 맞아 예쁘게 꾸미려고 유치원에 가져갔던 달걀 껍데기들도 그대로 돌아왔다. (두 녀석 합쳐서 열 개나 달걀에 구멍을 뚫어 부느라 엄마가 호흡 곤란으로 잠시 저 세상에 갔다가 부활했다.) 아무런 색깔도 반짝이도 입지 못한 채 하얀 피부 그대로 돌아온 달걀들이 왠지 안쓰러웠다. 부활절은 이 곳 아이들에겐 크리스마스처럼 신나는 날이다. 아이들 마음에 달콤하게 남을 2020년 봄의 즐거운 기억 하나를 바이러스가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텅 빈 껍데기를 보는 엄마 마음이 텅 빈 느낌이든 말든 그건 엄마 사정이고, 아이들은 갖고 놀 매끈한 달걀 껍데기들이 있어 신이 났다. 구석구석에 숨기기도 하고, 조심조심 양말짝에 하나씩 넣어 갖고 다니기도 하면서 신나게 놀기 시작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아이들의 탄식 속에서 달걀 껍데기 하나에 금이 갔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달걀 껍데기들은 예쁜 옷도 입어보지 못하고 와그작 와자자작 부서지기 시작했다.
“지음아 이음아, 이제 한 달 동안 유치원 문 닫는대.”
“왜? 선생님이 아파?”
선생님이 아파서 한 번 취소되었던 Turnen 수업 이후로, 뭔가 그런 공식이 머릿속에 생긴 모양이었다. (Turnen은 ‘체조’로 번역되지만 실은 각종 놀이를 하며 미친 듯이 친구들과 뛰어노는 시간. 끝나면 애들이 다 얼굴이 벌건 채 새벽 두 시에 감자탕 집에서 갓 나온 어른들의 행색을 하고 있다.)
“아니, 그건 아니고… 지구가 아파.”
지구는 누군지 잘 모르겠지만 선생님이 아픈 게 아니라니 아이는 일단 안심인 모양이었다. 지구가 뭔지는 몰라도 바이러스가 위험하다는 것은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해리포터를 헬리콥터로 알아듣는 아이에게 바이러스가 뭔지 알려주는 일이라니. 나의 야망은 곧 그 놈들 손 안의 계란 껍데기처럼 와자작 부서지고 말았다.
그래, 그냥 놀아라.
그럴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약 저렇게 아직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이들에게 자가격리 같은 걸 설명해야 한다면, 또 그걸 지키도록 해야 한다면 그건 대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싶었다. 아이들을 꼭 껴안고 볼을 부비며 뽀뽀할 수 없다면 그건 또 부모로서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 싶었다. 신종 바이러스도 아이들은 귀여워서 봐준다지만, 일상이 급속도로 무너지는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주어야 하는지 난감했다.
우린 대체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있는 것일까.
근대 과학의 파괴적인 힘
과학은 양날의 검처럼 우리 삶에 칼날을 휘두른다. 어두침침하고 더러운 부분을 잘라내 주기도 하지만, 평온한 일상에 느닷없이 비수를 꽂기도 한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비행기를 타고 지구를 몇 시간 안에 돌 수 있게 됐지만, 그로부터 배출되는 엄청난 온실가스로 인해 우리는 미쳐 날뛰는 여름을 맞게 되었고, 바이러스 역시 편안하게 비행기를 타고 기내식을 먹으며 세계 곳곳을 여행하게 되었다. 중세 유럽 인구 최소 삼분의 일을 사라지게 했다는 페스트가 산 넘고 물 건너 공민왕이 반원 개혁을 시도하던 고려까지 오기란 상당히 힘들었지만, 중국 우한 지역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럽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어느 때보다 서로 이어진 삶을 살고 있다. 손 안의 휴대폰으로 세상 구석구석과 닿을 수 있으며, 들숨 날숨을 전 세계인과 공유하며 살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많은 철학자들은 총명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근대 유럽에서 철학과 과학의 사이는 그리 정답지 못했다. 근대 과학이 인간 삶의 모습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이후로, 많은 철학자들이 과학의 파괴적인 특성을 근심스럽게 바라보았던 것이다. 특히 엄청난 천재일 것이 틀림없는 막스 베버는, 뭐든지 새롭게 바꾸려는 과학의 본성에서 근대의 딜레마가 기인한다고 통찰했다.
과학은 본질적으로 혁신을 추구하기 때문에 낡은 것이 아름다울 틈을 주지 않는다.
낡은 것은 비합리적인 것, 비과학적인 것으로 교체의 대상이다. 베버에 따르면 근대 과학은 우리가 삶의 곳곳에 소중하게 박아 둔 가치들이나, 어떤 신비롭고 신성한 믿음 같은 것들을 빠른 속도로 산산이 부수어 결국에는 우리 삶에 어떤 가치도 남지 않은 허무한 결말을 남긴다. 과학 자신조차 늘 스스로를 새롭게 갈아치워야 하니, 그 ‘갈아치우기 무한 사슬’ 속에 놓인 유한한 인간 존재는 허무해질 수 있는 탓이다. 학부시절 내 전공은 Political Science and Diplomacy(어머 내가 저런 걸 배웠다니)였고, 석사 때 과 이름은 Political Science, 박사 때는 그냥 Politics였다. 점점 줄어드는 내 과의 명칭은 베버의 고뇌를 닮았다. 팩트와 진리와 객관적 지식을 논하는 과학(science)과, 판단과 설득과 의견과 주관적 가치의 영역인 정치학(politics)이 과연 서로 조화롭게 어깨동무를 하고 과 이름(political science)으로 있을 수 있는 것인가, 베버는 나의 앞날을 미리부터 그렇게 걱정해 주었던 것이다.
우리는 낡은 것도 아름다울 수 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과학의 속도감은 대체로 낡은 것이 숙성되어 아름다울 시간을 주지 않는다. 판단과 성찰을 할 시간을 충분히 주지 않고, 마치 술값 안 내려는 친구처럼 저만치 앞서 나가기 때문이다.
생화학과 교수이자 수많은 SF 소설을 쓴 인기 작가였던 아이작 아시모프는, 현재 인간 삶의 최대 비극은 우리 사회가 지혜를 모아서 쌓아 올리는 속도보다 과학이 지식을 긁어모으는 속도가 훨씬 빠른 점이라고 했다. “The saddest aspect of life right now is that science gathers knowledge faster than society gathers wisdom.”
이게 다 과학자들이 너무나 일을 열심히 하시는 탓이다, 과학자들에게 5박 6일 제주도 숙박권과 항공권을 지급하라,라고 하고 싶지만 사실 과학이 자본주의를 만나지 않았다면 이렇게 온 세상에 쓰레기가 넘쳐나고 사계절이 미쳐 날뛰진 않았을 것 같다. 유행 따라 반짝이는 네일을 한 과학의 손톱이 우리를 할퀼 수 있음을 알고는 있지만, 우리 눈에는 그 반짝이는 손톱이 너무 예쁘고 찬란한 것이다. 예쁘고 좋고 편리한 걸 어떡해. 이 글을 쓰는 나도 내 스마트폰을 뺏어가고 벽돌 같은 시티폰을 쥐어 준다면 울어버릴 거다.
지혜와 정의의 속도
아시모프의 말대로, 정보와 기술은 사회가 지혜와 통찰을 쌓아 올리는 속도보다 늘 빠르게 내달린다. 바이러스가 돌기 시작하자, 우리는 다른 생각을 멈추고 나의 생존 기술과 마스크 정보에 예민하게 촉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생존과 안전을 위협하는 공포 앞에서는 모든 사상과 철학이 무기력해 보인다.
일단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 남이 미워 보인다.
잘 알려진 매독이라는 성병이 있다. 감염되어 생기는 피부 궤양이 매화꽃 같은 모양이라 매독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에, 사람들은 이 몹쓸 병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라들은 서로에게 똥을 던졌다. 이탈리아에서는 프랑스 병,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병, 그리스에서는 불가리아 병, 불가리아에서는 그리스 병.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병,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병, 폴란드에서는 독일병으로 불렀다. (병으로 유럽 배낭여행 일정 짤 기세.) 사랑이 넘치는 지구, 이 병은 페스트와는 다르게 조선에까지 흘러들었으니 조선에서는 이를 당창(唐瘡)이라는 이름의 중국 병으로 불렀고, 심지어 터키에서는 기독교 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이 글로벌한 똥 던지기 시합에서 돋보이는 존재감은 단연 프랑스. 독일과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 무려 삼국에서 입을 모아 프랑스 병으로 불렀다니 여기저기에서 많이 밉보였나 보다.
저 이야기를 읽을 땐 그저 웃겼는데,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를 우한 폐렴이라고 부르겠다고 난리, 대구 신천지 사태로 부르겠다며 또 난리를 피우던 우리의 모습이 겹쳐 보여 이제는 어쩐지 씁쓸하다. 우한이나 대구 신천지가 책임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못된 병의 책임을 전적으로 다른 곳에 두고 손가락질하는 일은 그리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법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우한과 대구 쪽에 선을 그었지만, 외국에서는 그 선을 더 넓게 아시아 전체에 그려버리기 때문이다. 뉴욕의 지하철에서, 런던의 길거리에서, 이탈리아의 주점에서, 아시아계 사람들이 험한 일을 당했다. 선을 긋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대체로 나 아니면 남이다. 비난하는 마음, 혐오하는 마음은 이렇게 손쉽게 나에게 되돌아온다. 지혜의 속도가, 빠른 정보를 통해 확산되는 미움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탓이다.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마음에 내가 먼저 마스크를 넉넉하게 쟁여두고 싶은 사람도, 돈을 벌겠다는 욕심에 시장에서 마스크로 장난을 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전염병 앞에서는 누구나 두렵고 무섭다. 나와 내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은 이기적인 게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개별 유리관 안에서 산소통을 메고 살지 않는 이상, 가장 취약한 사람에게 마스크가 가지 않으면 결국 내가 숨 쉬는 공기 안에 발 빠르기로 소문난 그놈의 바이러스가 들어오리라는 것 역시 자명한 일이다. 공포스러운 바이러스는 가장 약한 자부터 그 얼음 같은 손가락으로 어루만질 것임에 반해, 정의의 속도는 유달리 느리기로 유명하다. 빈부격차가 크고 사회보장이 잘 되지 않아 자가 격리를 하고 싶어도 당장 끼니 걱정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양산해 왔다면, 그들이 거짓을 두를 수밖에 없는 절박함을 만들어 이곳저곳을 혼란에 빠뜨리게 했다면, 이 역시 정의의 속도가 공포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탓이다.
생존과 안전을 위협하는 공포 앞에서는 모든 사상과 철학이 무기력해 보이지만, 나는 그렇기에 오히려 이런 상황에 철학이 더욱 힘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지금 우리는 파급력은 크되 파괴력은 크지 않은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다.
이 사태가 빨리 극복되려면 공포와 미움의 속도보다 지혜와 정의의 속도를 높여야 하지 않을까.
공포의 긍정적인 힘
많은 철학자들에게 공포는 파괴적이고 야만적인 것이다. 공포란 인간 이성의 적일 뿐 아니라 자유의 적, 문명의 적이다. 공포 정치에 특히 반감이 컸던 몽테스키외나 디드로 같은 계몽주의 철학자들 뿐 아니라 헤겔, 아렌트, 쉬클라 같은 많은 철학자들이 공포에 관해서 비슷한 결의 견해를 공유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정치철학을 들여다보면 쓰레기통에 갖다 버리고만 싶은 공포에도 순기능이 있다. 그중 이런 상황에서 언급하고 싶은 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던 ‘공포의 도덕적 기능’과 버크 및 토크빌이 말하던 ‘공포의 경외적 기능'(a.k.a. 귀싸대기 기능)이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공포는, 놀랍게도 도덕과 매우 밀접한 개념이었다. 도덕의 절친이 공포라는 말이다. 계몽주의의 세례를 받은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착한 우리 애가 친구를 잘못 사귄 거 아닌가 싶지만, 공포가 무조건 세상 몹쓸 것이 된 건 사실 꽤 최근의 일이다. (거기에 또 큰 역할을 하신 것이 바로 버튼 하나로 대량 살상을 가능케 한 과학 기술이시다.)
어쨌든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와는 꽤 다른 관점에서 공포를 바라보았다. 그는 도덕적으로 성숙된 사람은 공포를 잘 컨트롤할 수 있으며, 공포에는 올바른 공포와 그렇지 않은 공포가 있다고 생각했다. 공포에 예쁜 놈과 미운 놈이 있다니 이게 무슨 호랑이 풀 뜯어먹는 소린가 싶겠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둘을 구분한다. 예를 들어 자랑스러운 시민으로서 명예가 실추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은 올바른 종류의 공포지만, 구두쇠가 내 재산을 잃을까 벌벌 떠는 두려움은 올바른 공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삶을 살면서 대체 무엇을 두려워함이 옳을까. 어떤 것이 올바른 공포일까. “인간은 정치적인 동물”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의 그 유명한 말씀에 힌트가 있다. 정치적 동물로서의 인간이 정치 공동체에서 상호작용과 공적 토론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그래서 어떻게 좋은 삶을 살 수 있을지,’ 함께 빚어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공포는 결국 정의(justice) 개념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임차인들에게 임대료를 받지 않겠다는 고마운 선언들이 이어지는 모습에 아리스토텔레스 할아버지는 아마 흐뭇해하실 것 같다.
버크와 토크빌은 각각 “a sublimed delightful horror,” “salutary fear”라는 표현으로 또 다른 의미에서 공포의 순기능을 이야기한다. 사람들에게 집단적으로 두려운 순간이 닥치면 이는 강한 충격이 되어 사람들을 깨우고, 생생히 살아있게 한다는 것이다. 전류를 흘려 강한 자극을 준다는 의미의 ‘galvanizing’이라는 단어를 한 마디로 어떻게 번역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싸대기를 날리는’이라는 저렴한 표현을 수줍게 써 보았다.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소름이 돋을 때, 우리는 세포 하나하나가 생생히 살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경험을 한다. 코리 로빈이라는 정치학자는 9.11이라는 끔찍한 공포의 경험이 미국인들을 어떻게 집단적으로 강하게 깨어나게 했는지, 그러나 공포의 기능이 과연 그만한 대가가 있는 것인지를 질문하는 책을 쓴 적이 있다.
우리에게 온 이 전염병의 공포는 불행하게도 우리가 자초한 것이다. 새로운 전염병의 등장은 주로 인간이 생태계에 과도한 개입을 한 결과다. 한 마디로 못할 짓을 많이 한 결과다. 매일매일 숨 가쁘게 달려가던 우리는 달리기를 멈춘 채 집 안에 갇히게 되었다. 달려가느라 힘들어서 어디로 가는지도 잘 모르고 살았던 삶을 돌아보고 깨달을 수 있는, 불행하고도 소중한 기회다. 나는 이 공포가 부디 사람들을 생생하게 깨어나게 했으면 좋겠다. 뭐든지 한 번 망가져 봐야 소중함을 아는 인간들에게, 제대로 싸대기를 날려주었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다.
마녀 사냥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지금 당장 가장 위험에 노출된 어려운 사람들부터 생각했으면 좋겠다. 웅크리고 앉아 이 광풍이 지나간 자리에 새로 불어올 ‘보복적 소비’를 예측하기보다는 그동안 우리의 소비 행태가 어떠했는지를 돌아보았으면 좋겠다.
여름쯤 상황이 진정되면 그동안의 소비 욕망이 일거에 터져 나오는 ‘보복적 소비’가 예상된다는 전망을 보았다. 침체된 경기가 살아나는 거야 기쁘고 행복한 일이지만, 나는 그 보복적 소비라는 말이 좀 불편했다. 사람들은 왜 부자 되라고 덕담을 하고, 공격적 마케팅을 하며, 보복적 소비를 예측하는 걸까. 사랑스러운 한 연예인이 귀엽게 “부자 되세요!”를 외치던 광고가 큰 호응을 얻던 고조선 (흠흠) 무렵, 석사 시절 나의 지도교수님은 이런 자본주의적 욕망을 덕담처럼 퍼뜨리는 광고가 튀어나와 사람들에게 아무 위화감 없이 먹힌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으신 듯했다. 자본주의의 충실한 노예로, 전날 마신 술이 덜 깼던 당시의 나는 선생님 말씀이 이해는 가면서도 크게 공감이 되지는 않았다. 부자 되라는 게 어때서. 나도 되고 싶은데요.
한데 세상의 깨달음이란 다 타이밍이 있나 보다. 나이를 점차 먹어가니 선생님의 그 당황스러움이 마음 깊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불꽃처럼 타올라 겁내 돈을 벌어 부자가 되자고 집단 최면을 걸지 말고, 세상에는 돈 말고도 중요한 게 많다는 얘기를 해야 하는 거였다. 보복적 소비를 예측하며 물량을 준비하자는 시장에게, 그동안 우리의 소비에 좀 과한 면이 있었으니 이 기회에 조금 불편하고 착한 소비를 넓혀가는 건 어떠냐고 얘기해야 하는 거였다. 인간은 영원히 더 나은 재화를 욕망한다던 홉스의 말처럼 한 번 에어컨의 시원함을 맛 본 몸뚱이는 에어컨을 틀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워졌지만, 이렇게 지구가 대차게 망가져 가고 있구나, 조금은 참아볼까 하는 마음을 실낱같이라도 가져봐야 하는 것이었다.
어느샌가 소셜 미디어가 무엇이든 빠르게 배송해 준다는 앱들을 찬양하는 글로 도배되기 시작한 시점이 있었는데, 나는 사실 그 트렌드가 좀 불편했다. 그냥 잠깐 나가서 사 오면 되는데, 저 포장재들을 다 어쩌려고. 물론 이 배송 시장이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도 있을 테고, 제품 퀄리티의 문제도 있을 거고, 포장재를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곳도 생겨났고, 무엇보다 배달 서비스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육아로 24시간 집구석에 사지가 결박당한 애엄마라든가, 거동이 불편하신 어르신들이라든가, 무거운 짐을 들기 힘드신 분들이라든가. 그리고 혹은 지금과 같이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라든가. 나 역시 택배 아저씨가 세상 반가운, 아마존의 오랜 친구다. 그런데 내가 쉽게 사기 어려운 물건들을 배송시키는 게 아니라, 그냥 단지 편하다는 이유로 백 미터 이백 미터만 걸어가면 살 수 있는 똑같은 물건들을 포장 용기에 담아 집으로 배달시키는 건 아무래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행복은 늘 단순한 데 있다. 가을날 창호지를 바르면서 아무 방해받지 않고 창에 오후에 햇살이 비쳐들 때 얼마나 아늑하고 좋은가.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그 행복의 조건을 도배사에게 맡겨 버리면 스스로 즐거움을 포기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한다.”
법정스님의 글을 읽으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우리가 하는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본다. 조그만 아이의 손을 잡고 동네 수퍼마켓에 가서 판매대의 봄꽃 향기를 맡아보는 일, 한국 라면을 발견하고 즐거워하는 일, 일부러 깃털이 붙은 달걀을 골라 담는 일, 계산을 하면서 아이에게 작은 사탕을 내미시는 주인아저씨께 감사의 인사를 건네는 일, 사탕을 손에 쥔 아이의 기쁨 가득한 눈을 보는 일.
배송 서비스에 맡겨 버리면 놓치는 행복이다. 장바구니를 메고 집을 나서야 얻을 수 있는 행복이다.
집 밖으로 나가기 귀찮아 편리함만 추구하다가 결국 우리 스스로 집에 갇혀있는 건 아닌지, 배송 서비스를 즐기다 결국 배송 서비스에만 의존하게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우리가 만들고 있는 건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소비할 때 죄책감을 느낀다는 독일 사람들 틈에 살아서 그런가 싶기도 하지만, 죄책감까지는 아니더라도 내가 어떤 소비를 하고 있는지는 틈틈이 돌아봐야 한다고 본다. 미국에서 10년 살다 건너갔던 독일에서, 독일이 다르다고 느꼈던 가장 첫 순간은 공항 화장실 휴지가 거칠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엉덩이로 처음 독일을 느낄 때는 그 의미가 좀 모호했는데, 그 의미가 명확해진 건 곧바로 들렀던 마트에서였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엄청난 컬처 쇼크가 있었으니 바로 소비자에게 미친 듯이 안겨 주는 비닐봉지였다. 정말 달걀 따로, 고기 따로, 채소 따로, 과자 따로, 아이템 별로 각각 비닐봉지에 (그것도 두 겹씩) 담아주는 미국 수퍼마켓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면에 독일은 대체로 소박하고, 장바구니가 없으면 장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정말 열심히 환경을 생각하는 모습이 엿보였다.
물건들이 대체로 앙증맞게 소규모로 판매된다는 점도 달랐다. 싸게 많이 줄 테니 돈 쓰라고 권하는 묶음 상품이나 1+1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많이 사라 팍팍 써라’의 나라에서 갓 건너온 나에게 ‘너 그거 진짜 필요해?’ 마트가 이렇게 묻는 듯한 느낌이었다.
달걀이 상온에 놓여 판매된다는 점도 신기했다. 동네 수퍼에는 내가 바로 노오오오른자다아아아아! 하고 소리치는 듯 오렌지빛에 가깝게 샛노란 노른자가 든 달걀이 근처 농가에서 오는데, 그걸 필요한 만큼 골라 담아 사곤 한다. 사람들은 달걀판을 버리지 않고 장 볼 때 다시 들고 가서 새 달걀을 담아오거나, 내가 한 번 쓴 달걀판을 그 주변에 놓아두고 오곤 했다. 달걀은 더즌도 아니고 한 판도 아니고, 여섯 개 아니면 열 개가 기본이었다.
좀 촌스러울 정도로 환경 문제에 열심인 독일 사람들, 적게 소비하고 부지런히 움직이는 이 사람들이 나는 고맙고 사랑스럽다.
(그다음으로 신기했던 점은 인간이 감자로 이렇게 많은 음식을 만들 수 있구나 하는 거였는데, 현재 독일 마트는 텅텅 비어서 감자를 찾아볼 수가 없다. 독일 마트에 감자가 없다니.)
독일에서 아이들을 유치원에 보내지 못하고 맞는 시간들이 나를 이런저런 생각의 소용돌이에 던져 넣어 이리 긴 글을 생산케 하고 말았다.
우리가 모두 이어져 있다는 것은 재앙이자 축복이다.
집구석에서 내면으로 침잠할 시간, 고독과 성찰의 시간.
여유 없이 내달려 온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었는지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
서투르지만 공포가 우리에게 주는 시간과 기회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아이들과 한 달 넘게 집구석에서 뒹굴려면 미쳐 돌아갈 것 같지만,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미쳐 돌아갔는지 일단 생각해 봐야겠다 싶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주고 싶은지 스스로 돌아보고 싶었다.
어제, 작은아이가 작고 가벼운 손을 내 뺨에 얹고 잠이 들었다.
나는 팔을 두르면 쏙 들어오는 조그만 몸을 꼭 안고 잠을 청했다.
밖은 검지만 내 안에는 무지개가 떴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도 이 세상은 충만했다.
밖에는 차디찬 바이러스가 입김을 호 불며 돌아다니고 있지만, 우리는 서로에게 위안을 주며 종이접기 하듯 꼼지락꼼지락 까만 밤을 함께 접었다.
아직 너를 꼭 안을 수 있는 이 시간. 고맙고도 무서운 시간이다.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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