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의 문장 하나
동아일보에 칼럼을 하나 썼다. “내가 만난 名문장”이라는 칼럼인데 릴레이식으로 한 번만 쓰면 되고 오은 시인, 김초엽 소설가님 등이 이미 참여하셨다는 말씀에 팬심으로 덥석 하겠다고 나섰다. 카를 마르크스의 <경제학-철학 수고>의 한 문장을 골랐다. (한 때 칼 마르크스, 혹은 맑스로 알고 지냈던 분의 성함이 올바른 한글 표기법으로는 카를 마르크스라고 한다. 샤를리즈 테론이 샬리즈 세런이라는 낯선 분으로 변했을 때의 충격보다는 덜하지만, 카를 님은 왠지 낯설다.) 워낙 좋아하던 문장이라 이야기가 어렵지 않게 흘러나와 금방 썼지만, 1000자라는 한정된 틀 안에서 쓰다 보니 짧은 지면에 다 담을 수 없었던 얘기들이 아쉬웠다. 넉넉하게 더 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쓴다. 사실 원문도 그 문장 뒤에 이어지는 주옥같은 문장들을 더 인용하고 싶었다.
“인간이 인간답고, 그 인간이 세계와 맺는 관계도 인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보자. 그럴 때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이렇게 교환될 수 있다. 그대가 예술을 즐기고자 한다면 그대는 예술적 교양을 갖춘 사람이어야 하고, 그대가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자 한다면 그대는 타인에게 자극을 주고 북돋울 수 있는 영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 (…) 만약 그대가 사랑을 주었으나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다시 말해서 그대가 하는 사랑이 다시 되돌아오는 사랑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면 (…) 그 사랑은 허약한 것이요, 하나의 불행이다.”
- 카를 마르크스, <경제학 철학 수고> 중
머리 아픈 회색 활자 속에서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두통 속에서도 공부가 즐거워지곤 했다. 철학 공부는 보물찾기 놀이 같았다. 지혜롭고 똑똑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인류 역사에 걸쳐 남긴 사유의 기록을 캐다 보면 그런 보석들이 많이 들어있었는데, 마르크스의 이 문장은 그중에서도 단연 반짝였다. <경제학 철학 수고>, 줄여서 <경철 수고>라고도 부르는 이 글은 마르크스가 스물여섯에 쓴 글이다(스물여섯에 내가 뭘 했더라… 뭐 술이나 마셨겠지. 뺄셈이 잘 안 돼서 손가락을 꼽아가며 계산했다). 후기 저작으로 갈수록 과학이랄까 과학성이랄까, 그런 면에 집착하는 듯한 냉철하고 분석적인 글을 선보인다면 초기 저작엔 좀 더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젊은 날의 마르크스가 보인다. 특히 <경철 수고>에는 어떻게 사람이 사람다울 수 있는지,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고민했던 이 젊은 사상가가 이후에 토해 낼 사유의 씨앗들이 알알이 들어있다.
마르크스 하면 아직도 무서운 사람 아닌가 하고 두려움을 갖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다. 영화관에서 ‘똘이장군’을 보고 교실에서 북한 사람들은 웨어울프라는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란 내게, 마르크스의 저작은 왠지 모를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무서울 것 같은 아저씨는 사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세계, 사랑이 사랑으로 되돌아올 수 있는 그런 세계에 대해 누구보다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었다.
사랑은 사랑으로만, 신뢰는 신뢰로만 교환되는 관계. 내가 사랑을 보냈을 때 내게 다시 사랑이 되돌아오고, 내가 신뢰를 보냈을 때 다시 신뢰가 답으로 되돌아오는 관계. 얼마나 아름답고도 만들기 어려운 관계인가. 마르크스는 돈으로 사랑을 사고 돈으로 신뢰를 사는 관계를 슬퍼했던 것이다. 내가 설레는 마음으로 말간 연둣빛 사랑을 보냈는데 상대로부터 원치 않는 더러운 스킨십이 훅 들어오는 관계, 내가 신뢰를 보냈는데 쫘압-소리 나는 뒤통수 스매싱이 돌아오는 관계를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마르크스는 예술을 즐기고 싶으면 예술적인 교양을 갖춘 사람, 즉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지성과 눈과 마음을 갖춘 사람이 되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고 싶으면 그들에게 자극과 영감을 줄 수 있는 사람, 그들 내면의 어떤 씨앗을 북돋워 잎과 꽃을 피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라고 했다. 사랑을 받고 싶으면 사랑스러운 사람, 사랑할만한 사람이 되라고 했다. 내가 준 사랑이 다시 사랑으로 되돌아오지 않는 사랑, 즉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빨간색 궁서체 폰트 480으로 외치며 삶 속에서 온갖 생생한 표현을 해대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랑을 한다면? 마르크스는 그 사랑은 허약한 것이고 하나의 불행이라고 말한다. 사랑을 받고 싶으면 사랑할 만한 사람, 내가 보낸 사랑이 다시 사랑으로 풍성하게 되돌아오는 그런 사람이 되어라. 사랑을 받으려면 부자가 되고 돈을 벌어라, 미인을 얻고 싶으면 정신 차리고 한 글자라도 더 공부해라, 이 따위의 얘기를 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인간적이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지난날의 우리 정부는 빨간딱지를 붙여 금했다. 칼 막스랑 이름이 비슷하다고 뜬금없이 막스 베버가 고난을 당하기도 했다. ‘막스’랑 ‘자본주의’가 들어가면 일단 빨갛다고 인식한 나머지,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소지하고 있던 한 상병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몰린 것이 먼 옛날도 아니고 딱 5년 전, 즉 2015년이었다. 저 미치도록 두껍고 긴 책을 읽어본 전공자들에게, 저 안에 도대체 반체제적인 성격이 있냐고 묻는다면 차마 그 진지한 질문 앞에 빵 터질 수가 없어 입술을 실룩이는 짠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코미디인가
사랑에도 돈이 든다
사실 사랑에도 돈이 든다.
데이트 비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물론 중요하긴 하다). 두른 것이 화려하고 고가의 선물을 하는 사람이 더 매력적이라는 그런 얘기를 하는 것도 아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넉넉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화목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라난 그런 사람을 세상은 원한다. 넉넉한 환경에서 구김살 없이 자라난 사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 어린 시절부터 용돈이라는 것이 있어 작게라도 곁에 있는 이들에게 관대함을 연습할 수 있었던 사람, 자신의 호기심과 취향을 가난 때문에 납작하게 질식시킬 필요가 없었던 사람, 그래서 풍부한 견문과 경험으로 현재의 자신을 알록달록하게 빚어낸 사람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다. 내가 사랑에도 돈이 든다고 하는 건 이런 의미다. 돈이 한 사람의 영혼을 꽤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하지만 돈만큼 사랑을 망가뜨리고 인간관계를 뒤트는 것도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인간이 인간다울 때, 그런 세상에서는 사랑은 사랑으로만 되돌려 줄 수 있다고 말한 것이다. 다정하게 어깨를 겯고 쌍쌍바를 나누어 먹던 우애 좋은 형제가 유산 때문에 법정에서 만나 ‘이런 쌍쌍바 같은 놈,’ 하고 서로를 쌍쌍바에서 흐르는 냉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는 세상은 너무 슬프다. 나이가 이쯤 되니 돈이 얼마나 인간관계를 망가뜨리는지 직간접적으로 보고 느끼게 된다. 사랑이 사랑으로, 신뢰가 신뢰로 돌아오는 관계는 점점 지키기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과연 나는 그동안 사람들에게서 받은 사랑을 사랑으로, 신뢰를 신뢰로 돌려주며 살아왔는지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이 동그란 몸뚱이가 점점 작아져 호빗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참 많은 것과 연결된다.
돈은 우선 사랑과 행복, 자유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돈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관련된다. 버지니아 울프도 여자들에게는 자기만의 방과 500파운드가 필요하다고 했다. 돈은 하고 싶은 것을 할 자유를 줄 뿐 아니라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자유를 준다. 나는 사랑을 사랑으로, 신뢰를 신뢰로 돌려주기 위해서라도 적절한 돈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돈은 사랑, 행복, 자유뿐 아니라 질투, 혐오, 좌절과도 쉽게 연결된다. 오늘날의 우리 사회는 질투가 질투로, 혐오가 혐오로 교환되는 슬프고 비정한 사회가 되어버린 감도 있다. 혐오가 빠르게 유통되고 교환되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엔 날이 서고 가시가 돋친다. 김치녀에 한남충으로 화답하고, 빨갱이에는 보수꼴통으로 화답한다. 내가 너에게 갑질을 당했으니 나도 갑질을 해보겠다며 세상을 김밥천국 부럽지 않은 갑질천국으로 만든다. (대체 이 비유가 맞는 비유인가.) 혐오가 혐오로 교환되는 사회에서 사랑과 인간다움을 말하기는 사실 벅차다. 나에게 온 혐오를 사랑으로 돌려주는 것은 부처님이나 예수님, 적어도 마더 테레사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나도 자신이 없다.
자식 놈의 GAP질 (유니폼 장착)
종이배와 토끼풀 꽃다발과 새의 깃털
이렇게 때로는 답답하고 비정하게 느껴지는 세상 속에서 나는 내 아이들로부터 사랑이 사랑으로, 신뢰가 신뢰로 교환되는 따뜻한 관계를 경험한다. 이렇게 험한 세상에 아이들이 놓여 있다는 게 미안하기도 하지만, 이 험한 세상에 아이들이 있어주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정말 자주 한다.
큰아이의 도시락 가방 안에 희한하게 오린 종이가 들어있었다.
“이게 뭐야?”
“이거 보트야! 지음이가 엄마 주는 거. 선물.”
‘이게 보트란 말이지. 흠…’이라는 의문을 일단 뒤통수 너머로 휙 던져 놓고 “진짜 엄마 주는 거야?” 하면서 세상 가장 기쁜 얼굴로 아이를 꼭 안아 주었다. 아이 얼굴에는 수줍음과 뿌듯함과 행복감이 알록달록 칠해져 있었다. 집에 돌아와서 나는 그 종이배가 행여나 구겨질까 조심스레 파일 안에 넣어 두었다.
한 번은 유치원에 아이들을 데리러 갔더니 둘째가 빨간 볼로 뛰어나와서 조그마한 손 가득 모아 쥐고 있던 토끼풀 꽃다발을 엄마에게 내밀었다. 아이가 가든에서 정말 부지런히 따 모았다며, 선생님이 미소로 한 마디 거들어 주셨다. 자기가 들고 가기 귀찮아서 엄마가 들고 가란 건가 싶은 생각이 아주 잠깐 스쳤지만(흠흠), 나는 세상 가장 달콤한 꽃다발로 가슴 환하게 받았다. 오동통한 손으로 얼마나 꼭 쥐고 있었는지, 꽃이 약간 시들시들했다. 조심조심 가져와서 물에 꽂아두니 다시 머리를 들었다고 아이가 좋아했다. 몇 번이고 물을 갈아 주면서 나는 그 작고 예쁜 꽃다발을 사랑했다.
얼마 전 주말에는 바닥에 분필 놀이를 하러 나간 공터에서 아이가 깃털을 두 개 주웠다. 신나게 가져와서 자랑스럽게 양볼에 대고는 귀여운 표정을 선보인다. “그거 더러울 것 같은데..”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꾹 다물고 “아이 예뻐-” 하며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내게, 아이가 뭔가 생각났다는 긋 방긋 웃었다.
“이거 엄마 머리에 꽂아줄래.”
나는 미소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제의 깃털은 작고 하늘하늘한 것이 아니라 푹 꽂으면 머리통에서 피가 솟구칠 법한 비주얼이었다.
선물이라고 건네는 아방가르드한 종이배며, 유치원 마당에서 열심히 따 모았다고 불쑥 내미는 토끼풀 꽃다발, 주워 와서 엄마 머리에 꽂아준다는 걸 정중하게 사양하고 싶은 깃털 같은 것들. 그런 하찮고 작은 물건들 안에 내 아이들이 나에게 주는 사랑과 신뢰가 알알이 들어있다. 엄마들은 모두 알고 있다. 길에서 주운 돌도, 유치원에서 오린 아메바 같은 형체도, 엄마에게 모두 갖다 주고 싶어하는 이 귀여운 똥강아지들의 사랑 넘치는 습성을.
아이들이 내게 들고 오는 것들을 다 받아 모아두면 거지왕 김춘삼 부럽지 않을 고물상이 될 테지만 그 안에 담긴 사랑과 신뢰를 알기에 나는 달콤하고 환하게 받는다. 사랑도 행복도 돈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아 보이지만, 아이들은 자라면서 소중한 가치의 대부분을 결코 돈으로 살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랑이 사랑으로, 신뢰가 신뢰로 교환되는 관계는 마음같이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슬픈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이 아이들이 조금 더 자라면 친구들의 세계 속에서 자신이 가진 사랑과 신뢰를 나누느라, 엄마의 몫은 형편없이 줄어들 거라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 사랑으로, 신뢰가 신뢰로 교환되는 이 황금 같은 시기에 그들이 나에게 주는 사랑과 신뢰를 세상 가장 소중하고 가슴 벅차게 받으려 한다. 그리고 마르크스의 문장 속 사랑처럼, 아이들이 내게 준 사랑과 신뢰를 곱게 받아 조금 더 진하게 되돌려 주려 한다.
나는 가족 관계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관계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나와 아이들과의 관계가 어떻게 될 지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서 맺는 사랑과 신뢰의 근본적인 씨앗을, 아이들이 나와의 관계에서 어떤 원형처럼 받아 가졌으면 좋겠다. 그런 내 마음을, 아이들에게 건네는 뽀뽀와 아이들을 안아주는 팔에 가득 담는다.
세상에는 알알이 맺는 사랑과 돌탑처럼 쌓아 올리는 신뢰로만 교환될 수 있는 가치도 있음을 배우길 바라며. 이런 관계를 경험한 아이는 또 다른 관계에서 사랑이 사랑으로, 신뢰가 신뢰로 교환되는 인간적인 동심원의 고리를 어여쁘게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희망하며.
이 글의 기본이 된 동아일보 칼럼은 여기에 있습니다. 제 사진이 거대하게 튀어나오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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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정치철학 박사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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