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가장 하기 싫은 집안일이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이것에 대해 질문한다면
나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빨래’라고 말할 것이다.
빨래는 세탁기가 해 주는 거 아니야?
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우리 집은 이야기가 조금 다르다. 물론 우리 집 빨래 역시 인류 최대 발명품인 세탁기가 알아서 척척 해내고 있다. 문제는 그 세탁기가 놓여있는 주방에서 비롯된다. 우리 집에는 세탁기가 들어갈 별도의 공간이 없기 때문에, 한 칸짜리 싱크대와 세탁기가 바로 맞닿아 놓여있다. 물을 넣고 빼내는 호스를 연결해야 하는 문제로 세탁기의 위치는 그렇게 고정되었다. 나머지 공간을 채우다 보니 가스오븐과 냉장고가 나란히 붙어있는 기묘한 사정이 생겼다. 그 사이에 단열재를 만들어 세워두긴 했지만 사실 그리 탐탁지는 않다. 비어있는 공간들마다 그릇장과 선반들을 설치하고 공간의 중앙에 식탁을 두었다.
다시 빨래 이야기를 해보자면, 세탁기가 돌아가다 탈수를 시작할 때마다 부엌 전체가 요동을 치기 시작한다. 특히 싱크대와 맞닿아있는 세탁기가 심하게 흔들리면 싱크대 안 혹은 싱크대 개수대에 걸쳐둔 모든 그릇들이 한꺼번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자칫 잘못하면 세워둔 물건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이유로 세탁기를 돌리기 전, 설거지와 그릇 정리는 기본이요, 떨어질 위험이 있는 모든 물건들은 식탁 위로 옮겨두어야만 한다. 게다가 아이 옷에는 늘 토마토소스, 물감 같은 얼룩이 묻어있기 일쑤여서 일일이 손으로 특정한 세제를 묻혀 세탁기에 넣어야 하기 때문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정해진 시간이 되어 빨래가 끝나는 기계음이 울리면 모든 과정을 거꾸로 한 번 더 반복하는 것은 물론, 세탁물을 세탁바구니에 옮겨 담고 가장 넓은 방으로 들어 나른 다음 빨래 건조대를 펴고 빨래를 넌다. 이 과정들에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때문인지 나는 빨래가 너무나도 싫다.
작고 어설픈 우리 집 부엌이 어느덧 부끄러워졌다.
처음엔 음식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이, 집에서 빨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행복했다. 베를린 생활 초기에 잠시 머물렀던 학생기숙사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거실 겸 주방 겸 공부방이었던 한 칸짜리 방에서, 작디작은 붙박이 냉장고를 사용해야만 했던 그 시절을 돌이켜보면 지금은 엄청난 축복 속에 살고 있는 셈이었다. 세탁은 한데 모아, 동전을 넣고 돌리는 세탁실에 가서 해야만 했고 혹여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에 걸리면 당일 빨래는 과감히 포기해야만 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시간이 흘러 다른 이들의 좋은 주방을 구경하게 되고 접하게 되면서 우리 집 주방이 점점 더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이제껏 빨래하기 전 무조건 해야만 했던 여러 가지 절차(?)들이 나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조금 불편하다고만 느꼈던 빨래가 더 미워지고 싫어지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 빨래에 대한 깊은 사색은, ‘우리 집 부엌이 별로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결국 그놈의 '이상한 부엌'이 문제였다.
모든 문제의 발단은 빨래였지만, 사실 근본적인 문제가 빨래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8년 전. 당시 싱크대 한 개와 가스오븐만 덩그러니 있는 부엌을 어떤 방식으로 채워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우리는 베를린의 가구 할인점에서 전시용으로 놓여있던 서랍장을 싼 가격에 가져와 덜렁 놓인 한 칸짜리 싱크대 옆에 두었다. 썩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좀 쓰다 바꾸지 싶었다. 서랍장은 짙은 고동색 상판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케아에서 비슷한 컬러가 들어간 두 칸짜리 상부장을 골라 과감히 벽에 달았다. 가장 저렴한 가격의 이케아 검은색 나무 테이블과 기본 나무의자 2개를 고르고, 백화점에서 꽤 저렴했던 중국산 냉장고를 들여왔다. 한국은 대부분의 집에 주방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게 마련이지만 이곳에서는 추가 요금을 들여 주방을 짜거나 아니면 대충 구색을 갖춰놓고 살아가야 했다. 언제 떠날지도 모르는 집에, 당시 월급의 몇 배나 되는 돈을 투자하여 주방 시설을 갖추는 것이 그저 낭비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아무 계획 없이 엉성하게 겨우 구색만 갖춘 그 부엌이 별다른 변화 없이 세월을 타고 지금까지 흘러오게 되다니. 이는 감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상황은 변했으나 좀 이상한 부엌의 모양새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 괜히 속이 상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섣불리 모든 부엌을 뜯어고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어느 여름날, 크게 손대지 않는 선에서 부엌의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마음으로 나만의 작은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그해 봄, 한동안 록다운 때문에 집 밖에 나가지 못하던 시기가 있었는데 집에만 갇혀있다 보니 이상하게 느껴졌던 부엌이 더 이상하게만 느껴져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록다운이 풀리자마자 여러 인테리어 상점들을 다니며 라탄 바구니부터 양초, 나무 쟁반, 화분, 꽃병, 물주전자, 플라스틱 바구니까지 작고 소소하지만 예쁜 것들을 홀린 듯 사모으기 시작했다. 까맣고 못생겼던 식탁을 버리고 밝은 원목의 식탁과 그에 맞는 의자를 마련했다. 어설프게 남았던 부엌 한쪽의 공간도 운 좋게 발견한 찬장으로 채워 넣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했던 냉장고도 과감히 처분하고 좀 더 크고 모던한 컬러의 냉장고로 과감히 바꾸었다.
부엌이 진짜 분위기 있네요.
최근 우리 집에 처음 놀러 온 손님이 건넨 말이다. 여전히 한 칸짜리 싱크대를 중심으로 너비도 서로 맞지 않는 서랍장과 세탁기가 놓여있고, 세탁기를 돌리기 위한 기나긴 과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지만 확실히 우리의 작은 노력은 큰 빛을 발했다. 어설프고 부족한 부분이 존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시선이 머무는 곳곳에 놓인 식물들과 귀여운 소품 그리고 밝은 컬러의 가구들은 확실히 이전과는 다른 따스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절대 어울릴 수없을 것 같던 주방 가구들이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듬어 주며 하나의 공간을 이루어가는 모습이 꽤나 감동이 된다. 완벽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발전이 있고, 발전이 있을 때 새로운 에너지가 생긴다.
지금도 가끔 식기세척기나 별도의 세탁실이 부러운 날들도 있다. 왜 없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일이 손으로 설거지를 하는 것, 개수대에서 식탁으로 그릇들을 옮겨대는 것, 심하게 흔들리는 세탁기 소리를 들으며 오래된 가스오븐으로 빵을 굽는 것,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낮은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는 모든 일들이 오히려 ‘특별한 순간’으로 다가오는 날들이 더 많아졌다. 다른 이들이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축복이다. 애초부터 꽤 이상한 부엌은 이제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삶의 일부가 되었고 소중한 추억들이 켜켜이 쌓여가는 우리 가족의 아지트가 되었다.
늦은 밤, 이 글을 쓰고 있는 식탁에서 바라보는 부엌의 풍경들이 나에게 자꾸만 속삭이는 듯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어설퍼도 괜찮다고.
널따랗지 않아도 눈에 띄게 세련되지 않아도 밥 먹고 사는데 아무런 문제없으니, 괜한 걱정일랑 쓸데없는 심술일랑 그저 까만 밤하늘로 훌훌 날려버리라고.
- 작가: KIRIMI/KiRiMi 일러스트레이터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삶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득 영감을 받아 무작정 기록해보는 진솔한 이야기.
- 본 글은 KIRIMI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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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아요… ^^
댓글 감사합니다. 작가님에게 전달이 되었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