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주 후에 방을 비워주십시오. 문의는 사무실로 ‘
별반 다를 것 없던 어느 날 오후, 독일어 학원을 다녀오니 기숙사 방 문 앞에 이상한 종이가 붙어있었다.
느낌이 싸했다. 닥치는 대로 사전에서 단어들을 찾기 시작했고 집을 비워달라는 갑작스러운 내용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이 집에 살게 된지 겨우 5개월도 채 안됐는데 왜 우리가 방을 빼야 하는 거지?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남편이 퇴근한 후, 함께 기숙사 사무실로 찾아가 보았다. 남편은 서투른 독일어 단어들과 영어를 섞어서 대화를 시도했다.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의 혹은 방주인의 무지함 때문이었다. 사실 그 방은, 미술 전공의 한국인 학생 부부가 살던 방이었는데 그들이 다른 독일 지역에 있는 대학교에 가게 되면서 내놓은 방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그 부부는 방을 완전히 비우기보다는 그들의 계약 아래 또 방을 빌릴 사람을 찾고 있었고, 우리는 이 방을 전차인 (Untermiete/운터 미테: 세든 집에 다시 세 들어 사는 사람) 조건으로 계약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재임대차 계약 시 최대 6개월만 살 수 있다는 기숙사의 법적 조항의 존재를 아무도 몰랐다. 워낙 저렴하고 인기 있는 학생 기숙사라 애초에 후계 임차인 (Nachmieter/나흐미터)의 대기자 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당장 후계 임차인의 조건으로 다른 방을 알아볼 수도 없는 상황. 믿을 수도, 믿기도 힘든 위기가 예고도 없이 우리의 발목을 잡았다.
당장 한 달만에 새로운 집을 찾아야만 했다. 언어도 제대로 못하는 우리 둘이서 갑자기 집을 구해야 한다는 것은 당시 불가능처럼 느껴졌다. 일단 남편은 부동산 인터넷 사이트와 이베이(Ebay)에 이르기까지 모든 매물을 찾아서 연락을 했다. -이베이에는 사기성 매물들이 많기 때문에 신중하게 골라야만 했다.-그러면 각 전세입자는 집을 참관하는 (Wohnungsbesichtigung/보눙스베지히티궁) 날과 시각을 제공해주고 우리는 필요한 서류들을 잔뜩 꾸려서 참관 당일 그들에게 직접 제출해야 했다. 전세입자는 지원자들의 서류를 받고, 실제로 만나봄으로써 최종 후보를 추려내었는데, 일종의 면접 같은 시간이었다.
어떤 집이든 같은 시간대에 집을 보러 온 지원자들은 보통 3팀에서 4팀 정도였고 그중에 우리의 조건은 한없이 볼품없었다. 젊은 아시아 부부인데 베를린 체류기간은 고작 5개월인 데다가 월수입도 적고 -당시 남편은 박사과정이었으므로 연구원 수입의 절반도 겨우 받는 상황이었다.- 무엇하나 보증되어있지 않은 상황이었기에 전세입자들이 보기에는 못 미더웠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다급한 나머지, 세 달치 월세를 한 번에 낼 수도 있다는 제안서 같은 편지를 써서 다른 기본 서류와 함께 일일이 제출하고 다녔다.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편지 한쪽에는 가장 잘 나온 결혼사진도 살포시 넣어두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호락호락한 독일 사람들이 아니었다. 베를린 모든 지역을 불문하고 불과 몇 주간 8군데 이상의 집들을 찾아다녔지만, 우리가 갈만한 곳은 없었다. 혹시나 먼저 연락이 오는 곳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옥탑방이나 원룸 등 누구라도 가고 싶지 않아 하는 곳들 뿐이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그런 곳이라도 계약을 할까 하다가도, 조금만 더 찾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던 것 같다.
하루하루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불안했다.
매일 아침마다 눈물로 기도했다. 집이 없으면 대체 어디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정말 기가 찰 노릇이었다. 외국에서 내디딘 첫 발걸음은 생각지도 못한 큰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그대로 차갑고 딱딱한 바닥 위에 널브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어진 하루를 살아내야 했기에 남편은 연구소로, 나는 독일어 학원으로 매일 출근도장을 찍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원 쉬는 시간에 우연히 핸드폰에서 어떤 음성메시지를 확인하게 되었다. 독일어가 잘 들리지 않아 듣고 또 듣고를 반복하던 중 뒤늦게 내용을 대충 이해하고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며칠 전 보러 갔던 집의 전세입자가 남긴 음성메시지였다. 그녀는 우리에게 집을 넘겨주고 싶긴 하지만 본인이 어린 아기가 있어 집을 정리하고 나가기가 힘드니, 혹시 집의 있는 그대로를 넘겨받을 수 있겠냐고 물었고, 우리는 일단 계약하겠노라 연락을 했다. 그 집의 내부가 정확히 떠오르진 않았지만 어렴풋이 꽤 괜찮은 집이었던 기억이 났다. 기적 같은 전화를 받고 다음 날, 우리는 다시 그 집을 찾아가 보았다.
집은 남편이 출근하기에 위치도 좋고, 독일식 1층 (한국에서는 2층)이라 계단도 한 층만 올라가면 되니 마음에 쏙 들었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가 3m 이상의 꽤 높은 옛날 건물 (Altbau/알트 바우) 형태여서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라 좋았던 반면, 집 내부 상태는 상상 이상으로 엉망이었다. 음성메시지에서 들었던 것처럼, 전세입자에게는 갓난아기가 있었는데, 아기를 돌보다 지친 그녀의 모습을 보니 차마 집 내부 상태에 대해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아무 조건 없이 넘겨받는 조건이 있었고, 무언가를 재고 따지고 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집을 구한 것 자체가 감사였다.
집이 속해있는 부동산에 직접 가서 서류상 계약을 마치고, 집 열쇠 -지금까지도 집 열쇠를 가지고 다녀야만 하는 베를린-까지 받고 나니 진짜 실감이 났다. 오히려 집을 일찍 구한 셈이 되어 기숙사 방을 빼기 전 한 달은 두 집에 동시에 월세를 지불해야 했다. 월세가 두 곳으로 빠진다는 것이 탐탁지 않았지만 새 집을 단장하는데 시간이 꽤 걸리는 바람에 오히려 기숙사 방을 빼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우선 제일 시급한 문제는 벽의 페인트 칠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면 복도같이 긴 공간이 있는데, 정확히 반을 갈라 아래쪽은 분홍색, 위쪽은 연두색으로 칠해져 있었고 화장실 한편은 하늘색, 부엌 한쪽은 초록색, 가장 큰 방은 와인색 벽지로 도배가 되어있었다. 정상적인 절차라면 전세입자가 모든 벽에 뚫려있는 못 자국을 매우고, 각 벽을 흰색 페인트로 덮어야만 했다. 하지만 우리가 이 모든 짐을 떠안기로 했기 때문에 노동은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 되었다. 벽에 전기드릴로 뚫었던 흔적은 어찌나 많은지 구멍이 없는 벽이 없을 정도. 천장에는 전등 달 자리에 전선 두 줄만 나와있어 불을 켤 수도 없고 부엌에 있는 한 칸짜리 작은 싱크대와 가스레인지, 세탁기가 전부였다. -세탁기도 전 주인이 쓰던 것을 받았다.- 다행히 7월이라 해가 길어서 밤 10시가 되어야 깜깜 해졌기 때문에 전등이 없이도 밤늦게까지 작업이 가능했다.
먼저 벽에 나있는 드릴 구멍들을 충전재로 막고 사포질을 하여 벽 표면을 부드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페인트가 묻으면 안 되는 곳에 일일이 비닐을 감싼 후, 호기롭게 페인트칠을 시작했다. 페인트에도 흰색의 종류가 너무 많아서 색을 고르고 양을 가늠하여 구입하는 것부터 꽤나 난관이었는데 막상 칠을 시작해보니 재미도 있었다. 주변 지인들도 많이 도와주시고 우연히 이 시기에 놀러 온 남동생도 한 몫했다. 그렇게 페인트칠과 전등 달기, 가구 채우기를 하나씩 하다 보니 절대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이사가 끝나버렸다. 이케아나 다른 가구점에서 산 조립식 가구를 일일이 조립하는 일도 확실히 보통일은 아니었지만, 드디어 쫓아내는 사람 없는 ‘집’이 생겼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꿈만 같았다. 그리고
” 진짜 힘겹게 구한 집이니까 이 집에서 10년은 살아야지! “
라며 웃어넘겼던 말이 씨가 되어 현재 8년 차 같은 집에 머물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우리는 두 식구에서 세 식구가 되었고 두 개의 방 중에, 제일 큰 방이었던 거실은 언제부턴가 자연스럽게 아이의 방이 되었다. 그 멋스럽던 나무 바닥은 어느덧 분홍색 퍼즐 매트들로 뒤덮이고 말았다.
아이가 자라니 집의 공간이 좁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꽤 오랜 시간 동안 잊고 살았던 ‘이사’라는 테마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요즘이다. 분명히 남편의 박사과정만 끝나면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던 나였는데, 아직도 이 집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30대 중 후반에 들어서니 주변에는 이미 베를린에 자리를 잡고, 집을 사거나 짓는 가정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다. 나도 모르게 그들과 비교하다 보면 내 마음은 돌덩이처럼 무거워지고 내가 발을 딛고 살아내고 있는 삶이 무척 초라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다 문득, 아침에 눈을 뜨고 밤에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이 공간 자체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힘겹게 찾아내고 일구어낸 우리 집인데. 내심 이 집을 별 볼 일 없게 여겨왔던 하찮은 나의 모습이 보였다. ‘세 사람이 살기에는 좁은 집’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시선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그 이후로 방치하며 버려두었던 집을 돌아보게 되었다. 여러 가구들을 사서 공간을 다시 볼품 있게 채우고, 예쁜 화분들을 조금씩 사 모았다. 아이의 친구들도, 주변 지인들도 초대하기 시작했다. 주방과 식탁이 좁아서 많은 사람들이 편하게 식사를 하기에는 무리가 따르지만 옹기종기 공간을 꽉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완벽한 조건이 갖춰지지 않아도 충분히 실행할 수 있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도 배웠다.
앞으로 또 어떤 장소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노마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주어진 것에 만족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는 추억과 사랑 그리고 이야기가 가득한 삶의 터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그렇듯 오늘도 일찍 일어나 가족을 위한 아침 식사를 준비해본다.
- 작가: KIRIMI/KiRiMi 일러스트레이터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삶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득 영감을 받아 무작정 기록해보는 진솔한 이야기.
- 본 글은 KIRIMI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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