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아침 6시. 띠리링- 알람이 울린다.
우사인 볼트가 저리가라 할 정도로 날쌔게 몸을 돌려 알람을 끄고 옆을 확인한다.
휴- 안깼다. 어젯밤 우리방으로 기어 들어온 둘째가 나와 남편사이에서 세상 모르고 잔다. 이녀석이 깨면 아침에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도로묵이니 살금살금 침대에서 기어나온다.
여름으로 가는 길목에 서있는 계절. 커튼이 없는 주방문을 열면 환한 빛이 쏟아지는데 요즘엔 이 맛에 일찍 일어나는게 힘들지 않다. 따뜻한 물 한잔 마시고 박수 한번 친다.
이제 출근했네, 하루를 시작해 볼까.
6시 10분 -빛의 속도로 아침을 차리고, 애들 간식 도시락 두통 그리고 물병 2개를 그득히 채워놓는다
6시 30분 – 10분 간격으로 남편, 큰아들, 작은 아들을 살살 깨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는게 힘든 어린 아이들은 깨우려면 시간이 걸린다. 살살 문지르듯 맛사지도 해주고, 옷도 갈아입혀준다.
7시 00분 – 아침식사 시작. 이것저것 든든하게 먹여서 보내야 맘이 편하다.
7시 30분 – 양치시키고, 야외활동이 많은 두 어린이는 얼굴, 팔, 다리, 목에 선크림을 듬뿍듬뿍 발라준다.
7시 40분 – 월요일은 아빠가 출근하면서 등교 등원을 도와주는 날. 다들 궁디팡팡 한번씩 해주고 손 흔들어준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 시간은 우리 하루 일과중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절대 늦으면 안되는 꼭 지켜야하는 시간.
8시00분 – 아침식탁을 정리하고, 집을 치우기 시작한다. 월요일은 주중 대청소날. 주말동안 삼시세끼 다 해먹고 열심히 놀면서 어질러 놓은 집. 누가 보면 도둑이 왔다갔나 하겠다. 여기저기 밟히는 레고를 다 주워넣고, 이방 저방 널려있는 책도 모아 책장에 꽂아준다. 허물처럼 벗어놓은 옷들도 주워서 또 입을 건 개고, 아닌건 빨래통에 넣고, 수건들도 싹 갈아 놓는다. 빨래가 쌓였네…일단 그럼 빨래를 돌리자.
9시 30분 – 구석구석 청소기를 돌린다. 봄이라 바람에 날리는 꽃씨들이 집안에 들어와서는 뭉치가 되어 굴러다닌다. 이 녀석 때문에 밤에 애들 코가 건조한가 싶어 온 집을 두번씩 청소기질 한다. 그러고나선 대걸레질. 마음 같아서는 쪼그려 앉아서 손걸레로 박박 문질러 닦고 싶지만, 다른 할일도 있으니 에너지 조절을 위해 대걸레질로 만족하는 걸로…창틀도 닦고, 서랍이랑 책꽂이에 보이는 먼지들은 손걸레로 훑어낸다. 도대체 이 먼지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11시00분 – 청소도구들을 정리하고 나선 빨래를 꺼내온다. 건조대가 어디 갔지 하며 찾았더니, 이미 건조대에는 어제 빨래가 널려있다. 마른 빨래는 걷어내고, 새 빨래를 널고, 걷어낸 빨래를 얌전히 개켜 각자의 서랍과 옷장에 데려다준다.
12시 00분 -아….즐거운 점심시간. 혼자 먹는 밥이지만, 그래도 점심시간은 어쨌거나 즐거워. 냉장고에서 대충 이것저것꺼내 요기를 하고 좀 쉰다.
13시 00분 – 이제 좀 씻어야겠다. 샤워를 하고나선 서둘러 동네 마트에 간다.
14시 40분 – 장 봐온걸 정리하고 차 한잔을 마시며 한숨 돌린다.
15시 15분 – 아이들 데리러 갈 시간. 날씨가 좋으니 공원에서 애들이랑 좀 놀다 올 계획으로 간식거리를 좀 챙겨들고 애들 학교, 유치원으로 간다.
15시 45분 – 학교와 집 사이에 있는 공원에서 아이들과 함께 피크닉을 한다. 싸간 간식도 먹고, 까마귀도 쫒고, 무당벌레랑 달팽이도 잡고, 달리기 시합도 하고, 연못에서 놀고있는 새끼 오리들도 한참 구경하고 나서야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17시 30분 – 땀흘리고 놀아 꾀제제한 아이들을 욕조에 담가두고, 저녁준비를 시작한다. 대충 저녁 준비가 끝나면, 물에 불은 아이들을 깨끗히 씻겨서 방에 꺼내 놓는다. 이제 애들이 커서 로션이랑 옷을 주면 알아서 바르고 입어서 훨씬 수월하다. 티비를 틀어주고 나는 저녁준비를 마무리한다.
18시 30분 – 퇴근한 남편, 아이들과 함께 저녁을 먹는다. 별거 없어도 잘 먹어줘서 고맙다.
19시 10분 – 설거지를 하면서, 아빠랑 피아노 연습해라, 숙제 검사 받아라, 형아꺼 만지지 마라 원격조종을 한다. 애들이 자러가는 마감시간을 맞추려면 손, 발, 입이 바쁘다.
20시 30분 – 책을 읽어주고 애들을 재운다. 큰아들은 벌써 ko. 둘째야 얼른 잠들어라 너만 자면 이제 엄마도 퇴근이다.
유치원에서 낮잠을 잔 둘째는 오늘 9시가 훌쩍 넘어서야 잠이 들었다. 이제 퇴근….이제 씻고, 나도 독일어 숙제도 하고 책도 한두장만 읽다 자야지 … 회사도 안가고 어학원도 안가는데 오늘 하루 쉴틈없이 바빴다. 전업주부 엄마라는 직업이 이렇게 바쁜건지 전엔 정말이지 잘 몰랐다.
내가 전업주부가 되다니…
아이들이 커서 학교나 유치원에 다니면, 전업주부는 그야말로 자유의 몸이 되는줄 알았다. 영화나 텔레비젼 드라마에서는 전업주부들은 애들 데려다 주고 우르르 모여 커피나 마시고 교양없이 수다를 떠는 모습으로 종종 묘사된다. 아니면 좀더 우아한 부잣집 며느리 캐릭터 중에는 과거에 사회생활이 서툴렀지만 반반한 얼굴 덕에 시집 잘 온 케이스가 적지 않다. 그래서일까 난 내가 전업주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나는 열심히 바쁘게 사는 사람이지, 남편이 벌어오는 돈 갖고 허송세월할 사람이 아니라 여겼다. 그래서 둘째를 낳고, 미국으로 건너가 내가 전업주부가 되었을때는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참 힘들었다.
난 집에만 있을 있는 사람이 아니야 라면서 자기 부정을 했고, 누군가 무슨일을 하냐고 물어보면 -얼마전까지 디지털마케터였다-고 말했지 절대 전업주부라고 말하지 않았다. 집에서 아이들을 돌고보 남편을 내조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내가 해야 할 진짜 일은 어디 다른곳에 있는 것 같아 매일 인터넷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유학생 와이프들 사이에서 어쩌다 일을 하거나 공부를 한다는 엄마들을 만나면 속에서는 질투심과 동경심이 함께 불타 올랐다. 저 여자는 나보다 뭐가 잘났지? 그리고 난 저 여자보다 뭐가 못났지?
독일에 와서도 다시 워킹맘이 되고 싶은 마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하지만 난 일에 대한 열정이 커서라기 보다는, 그저 내가 무시하던 전업주부 신세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일을 하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엄마가 아니라 뭔가라도 들이밀 수 있는 타이틀이 필요했다. 그래야만 진짜로 직업이 있는 거고, 진짜로 하는 일이 있는 거고, 고로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충분한 생산적인 사람이라는걸 증명해 내야만 할 것 같았다.
독일에서 둘째까지 어린이집에 다니게 되고 바로 독일어 학원에 등록했다. 새로운 언어를 배우게 되서 좋은것도 있지만, 난 전업주부가 아니라 어학원에서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타이틀이 생겨셔 더 좋았다. 나만 더 열심히 자기계발도 하고, 더 부지런하고,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사람이 된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아직도 내가 진짜 직업이 없다는 사실이 불안했고, 어학원 공부가 끝나면 빨리 진짜 직장을 찾아야 한다는 초조한 마음이 커져갔다. 어서 빨리, 난 다시 진짜 일을 해야해….
엄마라는 직업을 받아들이기까지…
아이러니 하게도 내가 엄마라는 직업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내게 전업주부로써의 온전한 시간이 주어졌을 때부터 였다. 매일 가던 어학원을 고급반으로 진급하면서 일주일에 두번만 가는 반으로 바꾸게 되었다. 그러면서 전업주부가 되고 나서 난생처음, 일주일에 3일은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에 가는 동안 혼자 있게 되었다. 몰려다니면서 커피나 마시고 잡다한 수다로 허송세월이나 하는 줄 았았던 전업주부의 하루는 방대한 양의 일거리로 촘촘하게 짜여져 있었고, 촘촘한 스케줄대로 부지런히 집안팎을 알뜰살뜰 살피다보니 소소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 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깨끗해진 집, 풍성해진 식탁, 즐거운 이야기가 넘치는 식사시간, 더 여유로워진 아이들과의 놀이시간, 그리고 원래도 친했지만 왠지 좀 더 가깝고 살갑게 느껴지는 남편과 아이들…
지극히 일상적이라면 일상적이고, 내세울것 없다면 내세울게 하나도 없는 일들이지만, 또 인생살이에 이런 낙이 없으면 그 어떤 다른 기쁨이 더 있을까 싶다. 내가 내 자존심을 채워주는 큰 타이틀을 얻고, 우리집 통장을 채워줄 많은 돈을 벌어온들, 이렇게 함께하는 우리 가족의 하루하루가 없다면 그래도 난 행복할까?
평범한 일상을 소중히 그리고 감사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이제서야 생겼다. 그리고 이 평범한 일상을 가꾸기 위해 전업주부가 얼마나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야 하는지도 이제서야 알았다. 그리고 이제 소중하고 감사한 일상을 일구는 엄마라는 내 직업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생겼다.
사실 우리 엄마도, 옆집 아주머니도, 지금 내 친구들도 그러고 있을텐데, 내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다른 엄마들이 얼마나 알차게 일을 하는지 진짜 잘 알지 못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전업주부는 집에서 놀고 있느니, 아무것도 안하느니, 능력이 없느니 하며 속으로 무시했던 내 오만함이 부끄러워졌다.
잠 들기 전, 소중한 우리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본다. 큰 아이가 눈도 안뜨고 더듬더듬 내 손을 찾아 잡더니 얼굴을 비빈다. 부비부비…그러고는 말한다.
‘엄마, 엄마는 나를 참 잘 키우는거 같애. 잘 보살펴주고,,, 고마워.’
엄마도 고마워, 엄마도 이제 그냥 엄마라는 직업을 부끄러워하지 않을께. 그리고 엄마라는 직업이 부끄러워지지 않게 열심히 노력할께.
- 작가: 오롱
<동독에서 일주일을> 공동저자. 한국에 나고 자람. 스위스, 미국, 독일을 거쳐 이제 막 영국에 정착. 언어, 문화, 정체성이 뒤섞인 콩가루 집안을 지키는 씩씩한 엄마.
- 본 글은 오롱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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