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아침 시간, 흐물거리며 늘어지는 해파리에게 옷을 입히는 것은 극한 직업이다.
낄낄거리며 흐물흐물 늘어지는 해파리에게 옷을 입혀보신 적이 있나요.
와 이 녀석들 내가 뱃속에 넣어 놓고 부족한 내 칼슘 줘 가며 단단한 뼈대를 만들어 주었건만 왜 갑자기 강장동물이 된 거지.
참고로 욕실에는 그 해파리 녀석들이 벗어 둔 빨래가 다보탑처럼 쌓여 있다.
저녁에 그 빨래를 모두 곱게 빨아와서 개기 시작하면, 아침에 해파리였던 놈들은 어느새 에너지 넘치는 호모 사피엔스가 되어 있다. 직립보행을 하면서 엄마가 개어놓은 옷들을 발로 뻥뻥 차고 다닌다. 그것도 킥이 아주 호쾌하기 그지없다.
지금은 조금 컸다고 스스로 빨래를 개어서 (.. 라기보다는 곱게 정성 들여 뭉쳐서) 자기 옷장 서랍에 넣기도 하지만 조금 더 어렸을 때는 이놈들 옆에서 당최 빨래를 갤 수가 없었다. 아이들 옆에서 빨래를 개는 건 마치 강풍으로 틀어놓은 선풍기 앞에서 서류들이 날아가지 않게 잡는 일 같았다. ‘소자는 글씨를 쓰겠사오니 어머님은 떡을 써십시오’가 아니라 ‘우리는 개어 둔 빨래를 던지고 흩뿌리며 놀 테니 엄마는 옆에서 끝까지 한 번 개 보시든가’였다.
당시의 아이들은 말을 잘 못했지만 말을 할 줄 알았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이렇게 따뜻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옷들이 한 무더기 쌓여있는데 이걸 왜 재미없게 개어 없애? 신나게 갖고 놀아야지!”
순둥하던 아이들도 대체로 세 살 무렵이 되면 갑자기 매력, 즉 매를 부르는 능력이 폭발하게 된다. (매력이 넘치더라도 우리 때리지는 맙시다. 매라니요. 손으로도 때리지 맙시다.)
그 넘치는 매력으로 아이들은 가끔 길바닥에서 아이스 스케이팅의 한 장면을 선보이기도 한다. 특히 장난감 매장에서 우리는 이런 예술적 포즈의 페어를 많이 만날 수 있다.
이 쪽으로 가야 한다니까! 싫어.
운이 좋으면 이런 아방가르드한 행위예술도 목격할 수 있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어린 시절의 나도 그랬다.
나는 엄마 말을 아주 잘 듣는 아이였다.
진짜 잘 들었다.
학교 가는 길에 군것질하지 말라는 엄마 말씀에 나는 하굣길에만 떡볶이를 입에 물었다. 흐흐.
내 어린 시절을 보는 것 같은 어여쁜 너
그렇다. 말을 더럽게 안 들음에 관한 철학적 고찰(이런 이름의 논문이 학술저널에 실리면 당장 읽어볼 텐데)이 이번 글의 주제다.
미운 세 살인가 미친 세 살인가
아직 일곱 살이라는 마의 벽에 도달하지 못한 나로서는 내가 목격한 미운 세 살 얘기를 할 수밖에 없다.
우리 아이들은 둘 다 뭐 이런 애들이 있나 싶게 고분고분하고 순했지만, 두 살 무렵이 되면서 슬슬 새로운 자아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나이로는 세 살. 우리나라에 ‘미운 세 살’이라는 표현이 있듯이 미국에는 ‘terrible twos’라는 표현이 있다. 뱃속에서부터 한 살 먹는 계산법은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새해가 되면 전 국민이 한 살씩 더 먹는 이 계산법은 대체 언제 어디서 온 건지 몹시 궁금하다.)
고집이 생기고 짜증이 늘고 뭐든 스스로 하고 싶어 했으며, 노(No)!를 입에 달고 다녔다.
그리고 차츰 공공장소에서 당황스러운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네, 아래 사진은 소아과 플레이룸에서 기다리는 저의 자식 놈의 모습입니다.)
No라는 단어는 왜 그리 발음하기 쉽게 짧고도 강렬한 것인가.
꼭 그렇게 앉아있어야겠니
왜 미운 세 살(혹은 미친 세 살)이 되는지에 관해서는 전문가들의 설명이 잘 나와있는 편인데, 대충 간추리자면 이렇다.
아이가 두 돌 무렵이 되면 아이에게는 점차 자의식이 생기고 신체활동도 활발해지는데, 아이들이 아직 언어나 신체활동면에서 한계가 많기 때문에 좌절감이 크다는 것. 하고 싶은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것도 많기 때문에 시도는 하지만, 제대로 되는 건 많지 않아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사고를 치고 다니는 것이다.
한 마디로 ‘내 맘 같지 않아서’ 그렇다는 얘기다.
그래, 너도 2년쯤 살아보니 세상이 네 맘 같지 않다는 걸 알겠지.
여기서 가장 주목할 것은 1) 아이에게 자의식이 생긴다는 점과, 그렇지만 아직 아이에게는 2) 언어적 한계가 있다는 점.
사실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르겠다. 저 작은 머리통 안에 자의식과 자유의지가 생기다니!
(그 안에 벌써 그런 걸 넣어놨다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무엇이든 고분고분 따라오는 아이가 예쁠 것 같지만, 냉정하게 보자면 “싫어!”를 모르는 인간은 노예와 같다. 아이는 지금 자기가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몹시 귀여운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의 “싫어!”는 찬란한 자유 의지의 선언이다. 한숨이 아니라 기쁜 미소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 흠흠.)
산책하다 마음이 바뀌었다. 싫어, 안 갈 거야. (그 와중에 조그맣게 쪼그려 앉은 고집스러운 모습이 귀여워서 나는 사진이나 찍고 있었다.)
세 살 아이의 언어 표현에는 아직 한계가 많다는 점 역시 마음에 잘 담아 두어야 한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하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표현하고 싶은 것도 많은데, 아직 표현 수단이 제대로 발달하지 못했다. 우리가 당장 말도 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러니 짜증이 늘고 떼도 늘고, 공격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순둥했던 내 아이의 공격적인 행동(힘 조절을 잘 못하기 때문에 잘못 맞으면 격렬히 아프다)에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마음이 들지만, 이건 결코 내 새끼가 나쁜 놈이 되어서가 아니다. 아이는 하고 싶은 말이 있거나 관심을 끌고 싶은데 적절한 표현 수단을 찾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다. 아니면 집 안의 누군가가 폭력을 행사하는 것을 보고 따라 하는 것이거나. 두 아이를 키운 경험으로 단언하건대, 언어적 표현이 가능해지면서 아이의 난동과 땡깡은 드라마틱하게 줄어든다.
(* 그래서 아이가 땡깡을 부릴 때는 그 감정의 이름을 알려주는 게 중요하다.
동생이 장난감 뺏어가서 너 화났구나. 아이스크림 못 먹어서 엄청 슬프구나. 저 장난감 못 사서 되게 속상하구나.
아이는 자신의 감정이 뭔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저 어떤 감정에 압도될 뿐이다.
아이가 느끼는 모호한 감정의 이름을 정확히 알려줘서, 이후에는 그렇게 난리법석 부르스 차차차를 추지 않아도 그냥 말로 하면 엄마 아빠가 알아듣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게 제일 중요한 첫 스텝이라고 한다.)
따라서 미운 세 살도 미친 세 살도 아니다.
아이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자기 인생을 살 준비를 꼬물꼬물 하는 중이다.
대견한 세 살, 눈부신 세 살인 것이다.
말 안 듣는 자식 놈을 대하는 우리의 기본자세 세 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에서 피로도 짜증도 남부럽지 않게 쌓아놓고 사는 부모들은 이 시기가 반갑지만은 않다.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과 실전은 천지차이다.
그래서 먼저 아이들의 세 살을 지낸 엄마로서 이것만이라도 마음에 새기면 저처럼 후회하진 않을 것 같아요, 하는 세 가지 기본자세를 간추려 보았다. (저는 아직 통과 중이긴 하지만 벌써 후회가 많습니다.)
아이들은 혼낼 게 아니라 가르쳐야 할 상대다
훈육이라는 것은 ‘혼낸다’와 동일한 말이 아니다.
가르칠 훈(訓), 기를 육(育). 즉 가르쳐서 기르는 일이 훈육이다.
훈육이라는 말 뜻대로 부모는 뭔가를 가르치고 아이는 뭔가를 배우려면, 아이 스스로 이 상황이 편안하다고 느껴야 한다. 조금이라도 강압적이어서는 배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혼낸다는 생각부터 버리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한다.
언젠가 무한도전에 오은영 선생님이 나오셨을 때, “애를 어떻게 혼내야 돼요?” 하는 쌍둥이 아빠 정형돈 씨의 질문에 선생님은 이렇게 답변하셨다.
“아이를 왜 혼내나요? 아이들은 혼내는 게 아니라 가르쳐야 할 상대입니다.”
먹던 과자를 뱉고 경건하게 절이라도 올려야 할 것 같은 진리의 말씀.
이것만 마음에 넣어 두어도 절반은 성공할 것 같다.
화는 나쁜 게 아니다
그 조그맣고 귀여운 아이도 인간인 이상 화나는 일이 생기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아이가 내는 화를 부모가 무조건 꾹꾹 누른다면 아이는 어떻게 될까.
자기감정을 감추거나 외면하여 결국 화병 꿈나무로 크거나, 평소에는 고분고분하지만 안에 폭탄을 하나 품고 있거나, 시련이 닥쳤을 때 어쩔 줄 몰라하며 엄마 아빠만 찾는 아이가 되거나.
화병 꿈나무, 시한폭탄, 마마걸과 마마보이. 누가 봐도 그다지 매력적인 옵션들이 아닌 것 같다.
부모의 그늘을 벗어나 아이가 홀로 헤쳐나가야 할 세상에는 얼마나 절망적이고 화날 일이 많을까.
그러니 아이가 화를 낸다고 해서 같이 화를 내거나 무조건 누르려고 하지 말고, 건강히 화 내고 자기감정을 적절히 다스릴 수 있는 아이로 자랄 수 있게 도와주면 어떨까. 한숨을 내쉬며 골치 아프다고 생각하는 대신 아이가 성장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면 부모의 마음도 한결 좋아질 것 같다.
사실 화를 낸다는 건 발달의 아주 중요한 단계가 아닌가 싶다.
화를 ‘잘’ 낸다는 건 어른에게도 힘든 일이다. 사실 내 경우에도 화를 제대로 잘 내 보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다.
우리 엄마는 화가 나도 잘 참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래서 나는 화를 잘 참는 어른이 되었지만 화를 잘 내는 것에는 여전히 자신이 없다. 그 결과 나는 폭탄으로 자랐다(어감이 좋지 않군요. 흠흠.). 평소에는 부드럽고 안온한 편이지만 한 번 화를 낼 때는 불타는 개지랄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그러므로, 아이가 화를 낼 때는 무조건 누를 것이 아니라 화를 잘 내는 방법을 알려 주는 게 좋겠다.
하지만 세상이 늘 네 마음대로 굴러가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그러나 화를 낼 기회를 준다고 물건을 때려 부수거나 동생에게 이단옆차기를 하도록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너의 감정은 중요하지만 세상에는 용납되는 행위와 그렇지 않은 행위가 있고, 너의 자유가 아름다우려면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한다. 자유의지가 싹트고 있는 아이들에게 자유와 방종의 차이점을 가르쳐 주는 것이 부모의 몫이다. 우리는 친절하게 단호할 수 있다.
부모의 품 안에서 좌절과 시련을 겪는 법을 배우고 잘 넘어져 봐야 세상에 나가 넘어졌을 때 덜 울고 툭툭 털고 일어나는 사람이 될 터.
그런데, 뭐든지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아이에게 대체 어디에 선을 그어주어야 할까?
나는 이게 참 어려웠다.
대체 이 꼬맹이들의 자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 걸까?
그러다 이 불타는 개지랄 기술 보유자 (무형문화재. 대체로 3-4년에 한 번씩 시연된다.) 엄마에게 한 줄기 빛이 떠올랐으니 그게 바로 공리주의 철학자로 널리 알려진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이다.
아이의 자유, 어디까지 지켜주면 좋을까
밀은 <자유론(On Liberty, 1859)>이라는 저서를 남겼을 만큼 자유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 철학자다.
그가 말하는 자유는 ‘no harm principle(‘무 위해성의 원칙’이라고 번역이 되는 듯하다)’이라는 개념을 조건으로 한다. 쉽게 말하면 남에게 해(harm)가 되지 않아야(no) 한다는 규칙(principle)이다. 예를 들어 오밤중에 삘 받은 드러머의 연주할 자유는 보장되기 어려울 것이다. 방음시설이 완비된 스튜디오에서라면 괜찮겠지만.
밀에 따르면, 한 인간이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 타인에게 해가 되거나 혹은 타인이 자유를 추구하는 데 해가 되지 않는다면 그 개인의 자유에 간섭하면 안 된다. 밀은 “이렇게 하는 것이 좋고 옳으며, 이게 다 너를 위해서 그러는 거다” 류의 말로 상대의 자유가 제한받아서는 안된다고 한다. (따라서 no harm principle을 규칙을 a principle of antipaternalism이라고도 한다.)
중요한 사실인데, 밀은 사실 미개인과 어린이들을 자신이 말하는 자유의 대상에서 제외시킨다(그래서 특히 전자 때문에 엄청난 욕을 잡쉈다). 따라서 내 글의 소제목 “밀과 소크라테스가 부모에게 주는 지침”은 사실 제대로 된 제목은 아니다. 밀은 부모에게 아이와 관련한 자유의 지침을 준 적이 없기 때문에.
하지만 세상이 바뀌어 아이의 자유와 인권도 존중받아야 하는 이 마당에, 나는 밀의 no harm principle을 아이의 자유에도 적용해 보면 어떨까 싶었다.
아이이니만큼 그 대상을 ‘자기 자신(즉 아이)과 타인’으로 한 단계 확장해서 적용시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아이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 타인에게 해가 되지 않는 일, 타인의 자유를 방해하지 않는 일.
이 세 가지가 지켜지는 선에서 아이의 자유는 조금 넉넉하게 보장받아도 좋지 않을까.
공식을 실전에 대입해 보자면 이렇다.
- 아이가 화를 내며 방으로 달려가 문을 닫는 건 괜찮지만 화가 난다고 다른 사람을 때리는 건 안 된다. 그건 타인을 해(harm)하는 일이기 때문에.
- 엘리베이터 비상벨을 누르고 싶은 아이의 마음은 허용해 줄 수 없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말고 엄청나게 계단을 내려가야 하는 비상구로 들어가 보고 싶다는 아이의 고집은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기 때문에 허용해 줄 수 있다. 다만 친구가 놀러 오기로 되어 있다면, 그 친구가 해(harm)를 입는 일이 되기 때문에 그런 날은 안 되겠다.
- 어마어마하게 비싼 장난감을 사는 건? 부모에게 막대한 금전적 손실(harm)을 입히는 일이다. 후후. 엄마 아빠가 너에게 선물하고 싶은 자유를 누리고 싶다면 그때에나 가능한 일이다.
- 엄마가 권하는, T.P.O.에도 맞는 예쁜 새 옷을 맹렬히 거부하며 거적때기 같은 옷을 입고 싶어 하고, 햇살에 눈이 멀 것 같은 날에 굳이 장화를 신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도 이 규칙에 따르면 오케이다. 별다른 해(harm)가 없는 일들이다.
물론 모든 상황에 들어맞는 신통한 규칙은 아니다.
1) 해가 됨의 판단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이를테면 아이가 집을 어지를 자유는 그걸 치워야 하는 부모에게 해가 되는 것일까?)
2) 자유와 예절은 또 다른 문제이며 (문을 닫는 건 괜찮지만 쾅 닫는 건? 딱히 해가 되는 일은 아니지만 안 그러면 좋겠지.)
3) 당장의 신체적 위해가 아닌 미래의 잠재적 해를 판단하는 기준이 모호하기 때문에 (주로 TV나 유튜브 시청이 그렇다).
그래서 가정마다 나름의 세부적 규칙은 다시 만들어야 하겠지만, 내가 보기엔 no harm principle은 기본이 되는 규칙으로서는 꽤 쓸만한 규칙이었다.
무엇보다 이 규칙대로 실천하다 보면, 우리가 그동안 아이들의 자유를 필요 이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화를 내며 달려가 방문을 닫아버리는 아이를 우리는 대체로 용납하지 못한다. 짧은 길을 놔두고 일부러 멀리 돌아가 보고 싶어 하는 아이도 엄마 손에 억지로 질질질 끌려가는 일이 다반사다. 아이를 힘으로 눌러가며 입기 싫다는 새 옷을 기어코 입히고야 만다. 부모들이 아이의 자유를 필요 이상으로 제한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내 아이와 실랑이가 벌어졌을 때, 이게 진짜 죽어도 안 되는 일인지, 아니면 부모인 내가 더 수고스럽고 귀찮아서 안 되는 일인지 생각해보면 확실히 후자인 경우가 많았다.
밀도 인간에게 보장해 주라는 자유를 왜 우리 애들은 보장받지 못하고 있는가. 밀이 얘기하듯, 아이들이 진짜 이런 자유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해서? 난단연코 아니라고 믿는다.
밀은 개별성, 독창성과 다양성을 사회의 활력과 진보의 근원이라고 생각했고, 엄청난 에너지와 창의성을 가지는 천재들이 등장하는 사회는 근본적으로 자유가 살아 숨 쉬는 곳이라고 믿었다. 자유는 인간 존엄의 근본 알맹이로서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독창성, 다양성, 창의성, 게다가 천재.
부모들이라면 다들 혹할 단어들인데 유독 그 근본이 된다는 자유에 야박하게 굴어놓고 아이들한테 뭘 바라면 안 되지 않을까.
자유의지의 연둣빛 싹이 막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나는 어떤 자유를 주고 있을까 생각해 본다.
물고기는 물 속이라야 자유롭게 헤엄칠 수 있는데 나는 아이들이라는 물고기에게 물이 되어주고 있는가, 아니면 작은 수조 안의 공간만을 허락하는가, 그도 아니면 물고기인 아이들을 생선 굽듯 달달 볶고 있는가.
(이 타임에서 맛있는 고등어구이 먹고 싶은 망할 내 의식의 흐름.)
푸코는 권력을 일상에서 작용하는 모세혈관 같은 것으로 파악한다. 거창하게 정치나 경제 같은, 저 위에서 일어나는 나랏일 같은 것만 권력으로 볼 게 아니고 내 일상에서 늘 일어나는 일에 권력이 속속들이 흐르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단 얘기다.
아이들이 느끼는 가장 큰 권력은 부모에게서 나온다. 엄마 아빠가 가진 권력이 얼마나 아이의 일상에 모세혈관처럼 퍼져 작용하는지 생각하면, 나는 내게 주어진 어마어마한 권력에 가끔 무섭기까지 하다.
이런 권력에 우리가 스스로 no harm principle이라는 규칙으로 제어장치를 달아주면 어떨까.
엄마의 자유도 지켜 주렴
이 규칙을 따르면 아이들만 좋은 게 아니라 부모들도 좀 더 편하게 숨 쉴 수 있다.
우선 엄마에게도 자유롭게 화낼 자유가 있다. 그 화가 아이에게 신체적이나 정신적으로 큰 해가 되지 않는 한.
“엄마 지금 화나서 말하기 싫어. 조금 이따가 화 풀리면 너랑 얘기할 거야.”
아이들에게 화도 내고 사과도 하고, 그러면서 사는 거지 엄마라고 성인군자나 금강불괴가 될 필요 있나.
‘좋은 엄마라면 아이에게 화를 내지 않아야 한다’는 희한한 강박에 시달릴 이유가 없지 싶다.
화를 참는 대신 비겁하게 신경질을 부리지 말고, 정정당당히 화를 내자.
신경질을 부리는 부모는 아이의 영혼에 화상을 입힐 수 있지만, 제대로 화를 내는 엄마는 아이의 영혼을 성장시킬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아이에게 특별히 해가 되지 않는 범위에서라면 엄마도 아이만 바라보며 24시간 대기조처럼 있지 말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 좋겠다. 내가 오늘 청소기를 돌리지 않았다고, 내가 오늘 친구를 만나느라 좀 늦게 들어간다고 아이에게 엄청난 해가 가해지는 건 아니다. 요즘처럼 영양이 넘치는 시대에 사실 밥 한 끼 굶었다고 죽지도 않는다.
아이는 무조건 엄마랑 같이 있고 싶고 엄마랑 같이 놀고 싶을 수 있지만, 엄마는 너희와 좀 떨어져 있고 싶기도 하고 혼자 놀고 싶기도 하다. 너희가 보고 싶은 그림책이 있듯이 엄마도 보고 싶은 소설책이 있다.
나에게도 자유가 있고 너에게도 자유가 있다. 서로 좀 자유로워지자.
아이가 돌아왔을 때 엄마가 맛있는 간식과 함께 따뜻하게 맞아주면 좋겠지만 그건 네 사정이고, 엄마에게는 엄마가 선택한 일이 있다. 전업주부라도 마찬가지다. 해야 하는 일도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있고 가고 싶은 곳도 있다. 아이의 자유도 중요하고 남편의 자유도 중요하면, 내 자유도 똑같이 중요하다. 그러니 좋은 엄마가 아니라는 죄책감 따위 부디 no harm principle로 좀 떨쳐버릴 수 있으면 좋겠다. 구성원들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사회가 건강하듯이 가족 구성원의 자유가 조화를 이루는 집구석이 아름다울 것이다.
자유란 우리 꼬맹이들만 빛나고 아름답게 만드는 게 아니라 모든 인간을 그렇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좋은 엄마, 괜찮은 엄마의 키워드는 ‘희생’이 아니라 ‘자유’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희생으로 사람이 빛난다는 건 주로 그 혜택을 입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고, 사람을 빛내는 건 자유다.
구조적으로 희생을 강요하는 시스템이 문제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 안에서 희생을 미덕으로 삼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모토로 사는 것’에는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것이다.
너나 잘하세요
아이들이 말을 듣지 않을 때 no harm principle과 더불어 내가 기본 규칙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친절한 금자씨도 소크라테스도 같은 말을 했다.
너나 잘하세요.
Know thyself.
부모가 되고 나의 민낯을 정말 자주 보게 된다. 나는 이런 사람이구나.
부모로서의 자아와 나 개인으로서의 자아가 분열된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중 하나다.
나는 누워서 웹툰을 좀 보고 싶지만 너희는 TV를 안 봤으면 좋겠는 그런 나.
사실은 게으르고 귀찮은 인간이지만, 남들 앞에서는 부지런하고 깔끔한 엄마로 보이고 싶은 나.
하지만 누구나 느낄 것이다.
나는 종일 전화기를 붙들고 살면서 아이들에게는 스마트폰 좀 그만 하라고 소리 지르는 건 왠지 부끄럽다.
나는 지금부터 꿀잼 드라마를 볼 테니 너는 가서 공부하라는 건 너무나 가혹하다.
나는 책 읽는 거 되게 싫어하는데 너는 책 좀 읽어라 잔소리하는 건 모냥 빠진다.
아이는 매 순간 엄마 아빠를 관찰하고 있다. 아이들의 작은 눈은 끊임없이 우리를 보고 있다.
아이들은 우리를 따라 하고, 우리를 믿는다.
완벽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꽤 괜찮은 본을 보이는 일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현명한 엄마란 더하기를 잘하기보다는 빼기를 잘하는 엄마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더하기보다는 우선 내 삶에서 독소와 노폐물을 빼는 것, 그래서 우리 엄마가 꽤 괜찮은 인간이고 엄마의 인생이 꽤 괜찮아 보인다면 그게 결국 아이의 삶에서 근본적으로 좋은 에너지를 줄 것이라고 믿는다.
잘 나가는 엄마가 되자는 얘기가 아니다. 인생을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엄마가 되자는 얘기다.
아이들이 이렇게 살면 좋겠다 싶은 걸 내 삶에서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게 최고가 아닐까.
아직 사춘기가 오려면 멀었지만(그 세계는 너무나 미지의 영역이라 이제부터 각오와 공부가 필요할 것 같다), 그래서 나의 규칙이 이렇게 간소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이가 말을 안 들을 때는 이런 두 가지 규칙으로 통과해 보려고 한다.
1) no harm principle
2) know thyself
이 두 가지 규칙을 기본으로, 아이들이 부모를 믿어주는 만큼 우리도 아이들을 믿어주는 걸로.
부정적인 것은 꼭 나쁜 것일까
싫어 싫어 실으어어어어어어어어어허허허허를 외치는 놈들을 보며 저 놈들은 세상에 대체 뭐가 저리 싫은 게 많을까 싶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늘 좋은 게 좋은 건 아니지 않나. 싫은 건 싫은 거지.
싫은 게 좋아질 수도 있고, 또 좋은 게 싫어질 수도 있고. 그게 인생이지.
나도 세상에 싫은 게 많고(대표적으로 뜀틀과 생굴을 싫어합니다), 싫은 걸 싫다고 분명히 말해야 관계든 프로젝트든 발전되는 경우가 많다.
가전계의 애플이라는 발뮤다의 창업자 데라오 겐은 “나를 움직이는 힘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이걸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니라 ‘이건 하기 싫다’는 마음이었다”고 한다.
그렇지. Yes도 동력이지만, No는 더 큰 모티브가 될 수 있다.
나무가 크게 자라기 위해서는 땅 속 깊은 곳까지 뿌리를 내려야 한다.
컴컴하고 무섭고 벌레도 많은 땅 속 깊은 곳까지.
큰 나무가 되기를 바라면서, 밝고 아름다운 위쪽 세상으로만 가지를 펼치길 바랄 수는 없는 일이다.
니체는 초인이 되기 위해서는 악의 심연까지 깊이 뿌리를 내리고 끊임없이 자기를 넘어서라고 말한다. 선과 악을 두루 경험한 사람은 더욱 두껍고 단단하고 아름다운 나이테를 가질 것이다. 초인이 될 필요까지 뭐 있겠냐 싶은 게 엄마 마음이긴 한데, 그래도 단단한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은 누구에게나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뿌리를 내리는 흙이 곱고 포근할 리만은 없다. 부모들이 최선을 다 해 좋은 배합토에 살그머니 씨를 뿌리고 싹을 틔워 주었다면, 그걸 땅에 옮겨 심는 순간 커다란 돌을 비켜내고 뿌리를 갉아먹는 벌레와 싸우는 건 그 싹이 할 몫이다.
비트겐슈타인은 “마찰이 없는 미끄러운 얼음판은 어떤 의미에서는 이상적인 조건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우리는 걸을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그러므로 마찰이 필요하다. 거친 땅으로 되돌아가자.”
그러므로 부모와 자식 간에도 사이가 늘 얼음판 마냥 매끄럽고 솜처럼 보들보들한 건, 있을 수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고슴도치처럼 서로 가시를 가지고도 우리는 꼭 껴안을 수 있다.
서로가 가진 가시만큼의 공간을 인정해주면서.
누가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예쁘다고 했나 고슴도치 새끼는 원래 예쁘다
후배 J는 회사를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하기 전, 짧게 전업주부이자 아빠로 살던 시절에 이런 글을 남겼다.
“아이를 키우는 게 힘든 건 아이가 날 힘들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순간순간 민낯의 자신과 대면해야 하기 때문인 것 같다. 회사에서 일을 하는 것도 공부를 하는 것도 나름의 힘든 점이 있겠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단연 자신의 인간적 부족함을 생생히 느끼게 해 준다. 그래서 힘들고, 그래서 소중하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부족한 데가 정말 많은 사람이지만, 만약 아이가 없던 2011년까지의 나에 비해 현재의 내가 좀 더 나은 점이 있다면 그 상당 부분은 육아를 해 본 경험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아이는 말을 안 들으면서 자의식과 자유의지를 성장시키고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법을 배운다.
부모는 아이와의 갈등과 민낯 보기의 무수한 경험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서로 이렇게 성장하고 커 나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지지 않을까.
이런 마음가짐으로 오늘의 사건사고를 맞으러 가 보자.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정치철학 박사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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