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항암을 마치고 가발을 사고 신났다. 주말엔 글쓰기도 미루고 놀았다. 야외 공공 수영장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나무 그늘 밑 잔디밭에 깔개를 펴고 초록빛 나뭇잎과 푸른 하늘만 올려다보다 돌아왔다.
다섯 번째 항암을 했다. 네 번째보다 훨씬 나았다. 항암을 받을 때도, 받은 후에도. 지난번처럼 항암 후 하루 종일 잠도 안 잤다. 네 번째부터 항암이 세져서 항암 때 부종 예방을 위해 압박 스타킹과 꽉 끼는 수술용 장갑을 착용해야 한다는 것도 달라진 점이다. 내가 맞고 있는 항암약인 파클리탁셀 Paclitaxel 부작용 때문이다. 다행히 부종은 없다. 또 하나의 예정된 스트레스는 탈모. 네 번째 항암 이후 매일 머리칼이 한 움큼씩 빠졌다. 다섯 번째 항암을 받기도 전에 머리카락이 절반은 빠진 기분이란 정말 별로였다. 각오는 했다. 그래도 우울했다. 이를 어쩐다? 네 번째에서 다섯 번째 항암으로 넘어가는 동안 거울을 보거나 산책을 나가기가 싫어졌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모든 순간에는 구원 투수가 있는 법. 나를 구한 것은 가발이었다. 가발의 반전이라고 해야 하나. 항암 초기에 가발 가게에도 들렀고, 미리 찜해 둔 가발도 있었지만 큰 기대는 없었다. 탈모보다야 낫겠지, 그 정도. 두건이나 모자는 귀찮고, 항암 환자 티 안 나게 쓸 자신도 없었다. 그것보다는 가발이 쉽지 않을까. 짙은 머리색과 수수한 스타일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걸 목표로 정했다. 주치의에게 건강보험용 가발 처방전을 받아 가발 가게에 들렀다. 시범으로 써 본 후에 즉석에서 머리를 밀어주었다. 신기하면서도 어색함. 가발은 4개 중 한 개를 골랐다. 핸드 메이드 가발 가격은 980유로. 건강보험에서 380유로를 선지원 받아 가게에서 600유로 결제. 3~4주에 한 번씩 세탁이 필요하다며 가발 전용 샴푸도 서비스로 주었다.
놀랍게도 새로 산 가발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언니도 남편도 아이도 기뻐했다. 가발 같아 보이지 않는다나. 당연하지. 가발 티가 나면 되나. 나 가발 썼음! 이러려고 가발을 쓰는 건 아니니까.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나도 놀랐다. 진짜 머리 같다는 주변의 놀람과 찬사가 빈 말처럼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잘만 하면 항암 환자에게 한 줄기 빛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에게 어울리는 가발을 찾기만 한다면. 가격이 좀 세긴 하지만. 갑갑하거나 덥지는 않냐고? 글쎄, 모르겠다. 만족도가 크니까 그건 신경도 쓰이지 않는다는 말이 맞겠지. 내가 말하지 않는 한 누구도 가발인지 모르잖나. 외출도 산책도 신경 쓰지 않고 할 수 있으니 또 다른 자유를 얻은 것 같다. 항암 하시는 분들께 권하고 싶다. 한번 도전해 보시라고. 기분이 무척 좋아짐.
다섯 번째 항암 전에 주치의와 상의 후 고혈압 약을 먹기로 했다. 혈압이 다시 높아져서. 암센터 의사에게 말했더니 괜찮다고. 복용약 이름과 용량까지 착실하게 보고를 마쳤다. 항암 때 고무장갑처럼 생긴 탄력 있는 보랏빛 장갑을 세 시간 반 동안 끼고 있다. 그게 부종 방지용이란 건 다섯 번째 항암 때 알았다. 내가 좋아하는 여의사샘과 간호사가 근무하는 날이었다. 친절한 간호사샘께 물었다. 그날은 그 간호사가 내 국적까지 물었는데. ‘한국’이라고 대답하며 왜 어깨가 으쓱해지지. 그녀가 반색하며 말했다. 자기 딸이 열네 살인데, 베트남 친구랑 둘이서 한국 K-Pop에 빠져 난리도 아니라고. 주인공은 BTS. 아니면 누구겠는가. 그녀와 내가 소리 내어 웃었다. 당신 딸은 안 그래요? 그녀가 물었다. 네, 제 딸은 아직 좀 어려서요. 나중에 이 얘기를 했더니 우리 언니가 말했다. 니 딸은 K-드라마에 빠졌다고 밝히라고. 맞는 말이긴 하다. 네 번째 만큼은 아니지만 다섯 번째도 항암을 받는 내내 졸렸다. 의사 샘이 항암 포터에 주사를 꽂으며 물었다. 프라우 오, 요즘은 좀 어떠세요? 머리 빠지는 것 말고 다른 부작용은 없네요, 샘. 뼈주사를 맞은 후 통증도 사라졌고요. 정말 다행이라고 기뻐해 주시던 악카만 선생님. 가슴 통증은 잊을 만하면 다시 돌아오긴 했지만. 암도 제 역할에 충실한 거라고 봐야겠지.
주말에는 야외 공공 수영장에 갔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로젠 가르텐 옆 쉬렌바트 야외 수영장은 예약 불발. 사흘 전에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하는데 너무 늦어서. 지하철을 갈아타고 미하엘리 수영장까지 갔다. 남편과 언니와 아이와 아이 친구 율리아나까지 데리고. 점심 먹고 가서 저녁 7시에 돌아왔다. 뭘 했냐고? 아무것도. 나무 그늘 아래 잔디밭에 깔개를 펴고 누워 초록빛 나뭇잎과 푸른 하늘만 감상하다 돌아왔다. 들고 간 책은 베개로 쓰니 훌륭했음.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물에 들어가서 놀고. 파파는 열심히 음식만 사다 나르시고. 밀린 브런치 글도 써야지 하고 갔다가 빈 손으로 돌아옴. 그래도 행복했던 주말. 거기가 천국이었다. 주말에는 아이의 한글학교도 오픈했다. 알리시아, 넌 한글을 잘하니까 집에서 한글책을 10분씩 읽어볼래? 수업 중 한글학교 담임샘의 칭찬에 으쓱해진 아이. 이런 때를 놓치면 엄마가 아니지. 내가 재빨리 검색한 책 목록을 언니가 사촌동생에게 보내자 동생이 멋진 일러스트가 담긴 전래동화 18권을 당장 주문해서 곧 보내주겠단다. 주말에는 뮌헨 시내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한글학교를 마치고 빅투알리엔 마켓 부근의 단골 베트남 식당에서 점심도 먹었다. 우리 아이가 졸업한 초등학교에 다닌다는 베트남 사장님의 어린 딸도 만나고. 지금까지 먹은 중 그날 점심 치킨 카레가 최고였다!
- 작가: 뮌헨의 마리
뮌헨에 살며 글을 씁니다. 브런치북 <프롬 뮤니히><디어 뮤니히><뮌헨의 편지> 등이 있습니다.
- 본 글은 마리 오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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