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의 글에서 나는 홉스에 대해 나름의 변론을 해왔다(…고 생각한다).
괜히 무서운 사람일 것 같은 오명을 쓰고 있는 홉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칸트는 성선설, 홉스는 성악설’이라는 아찔한 이분법에 잘못 갇힌 데다가, 50만 명 수험생이 그걸 그냥 닥치고 외웠어야 하는 주입식 교육의 폐해로 저승에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분이시다.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닙니다. 거 님들 오해세요. 친구 중에 마키아벨리란 애 있는데 걔도 사실 그렇게 독한 놈 아니거든요.
홉스가 보는 인간은 천성적으로 악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 자들이 아니라, 혼란 상태에 빠져있는 회의론자에 가깝다. 겉보기에는 왕의 절대권력을 주장한 것 같지만 사실 홉스는 그 전제되는 근거가 시민 개개인의 ‘동의’에 있음을 은근슬쩍 핵심적으로 주장했고, 심지어 외부로부터의 구속이나 방해가 없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유 (negative liberty) 개념은 이 분을 원류로 친다. 시간이 있으면 홉스 팬클럽이라도 만들고 싶은데 나 먹고살기도 바빠서 덕질은 못하겠다.
하지만 이번 글에서는 홉스가 놓친 것에 대해 써볼까 한다. 허허, 이 영특한 냥반이 뭘 놓쳤을까.
홉스가 놓친 것, 웃음의 정의
<리바이어던(Leviathan)> 1부, ‘인간에 관하여(Of Man)’라는 부분은 꼭 사전처럼 쓰여 있다.
홉스는 인간의 지혜라는 것은 책에서 오는 게 아니라 무엇보다 인간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서 온다면서, 인간이 느끼는 감각과 감정들로부터 시작해서 온갖 것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정의를 내려놓았다. 공포라는 감정이 어떻게 인간 사회를 중추적으로 구성하는지, 어떻게 국가라는 인공적인 인간(Artificial Man)을 만드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초석인 셈이다.
그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게 두 가지 있었는데, 하나는 종교와 미신에 관한 것, 다른 하나는 웃음의 정의였다.
홉스가 종교와 미신을 구별하는 기준은 놀랄 만큼 간단하다.
대중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진 것은 종교, 그렇지 않은 것은 미신.
즉, 내용이나 교리 면에서 종교와 미신을 구분하는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는 말이다.
와후. 세상 모든 신자들의 뺨을 후려갈길 것 같은 이 가차 없는 정의. 그런데 세미나 시간에 다 같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홉스의 이 정의를 반박할 만한 다른 정의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 더 놀라웠다.
두 번째로 나를 혼란에 빠뜨렸던 정의는 웃음. (참고로 미소가 아니라 깔깔깔 터져 나오는 웃음(laughter)을 말한다.) 홉스는 웃음을 얼굴의 일그러짐(grimace)이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일단 여기에서부터 넋이 나갔다. 네, 얼굴이 일그러진 거라고요?
- 소설가 김초엽의 <스펙트럼>이라는 단편에도, 외계 생물 루이가 입을 찢으며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주인공이 저게 미소인지 궁금해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그것은 미소가 맞았다.
홉스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인간이 웃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나의 어떤 갑작스러운 행동이 스스로를 유쾌하게 만들 때(그렇다, 어른도 트램펄린 위에서 점프할 땐 웃음이 나온다), 둘째, 타인에게서 흉함이나 열등함을 발견하고 그걸 나와 비교해서 갑자기 자찬하는 마음이 생길 때.
아 후자는 이게 대체 무슨 우울한 정의인가 싶은데, 생각해보면 또 맞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광화문 네거리에서 몸개그를 시전 하는 사람들을 보고 깔깔 웃고, 친구의 어리바리 경험담에 낄낄거리며, 안경 벗은 유느님 얼굴을 보고 박장대소한다. 솔직히 상대가 못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웃는 것이다(저는 하늘에 맹세코 유느님이 세상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만♡). 코미디 프로들은 대체로 타인의 열등함이나 우스움을 소재로 하고, 방청석은 물리적으론 아래에 있을지언정 관객들은 심리적으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웃는 구조다. 게다가 어떤 스마트한 농담에 깔깔 웃는 건, “나 똑똑해서 이 농담 이해했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 아닌가. (유학 시절 나는 교실에서 터지는 많은 웃음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수업 내용은 이해 못해도 좋으니 (응?) 농담은 이해하고 싶었고 나도 같이 웃고 싶었다. 흑.)
읭. 우리의 경쾌한 웃음소리가 진짜 이렇게 검은 주머니 속에서 나오는 거였어?
정 많고 산타 할아버지 같던 지도교수님은 홉스의 이 정의를 반박할 수 있는지, 인간이 웃음을 터뜨리는 데 다른 이유가 있는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아무도 생각해 내지 못했다. 아이들의 재롱을 보며 웃는 것도, 따지고 보면 어른인 내가 우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것이 맞다. 아직 서툴고 부족한 존재인 그들의 말이, 몸짓이, 우습고 대견해서 그런 거다. 인정하기 싫고 씁쓸하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정의였다.
그 불편함은 수업 시간 내내 나를 괴롭혔다.
그러다 띠롱, 조카의 얼굴이 떠올랐다. 당시의 나는 아직 미혼이었다.
어? 엄마를 보고 좋아서, 이모를 보고 행복해서 그냥 이유 없이 깔깔 웃는 경우도 있던데.
수업이 끝나고 함께 짐을 챙겨 나오면서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교수님은 놀랍고 즐겁다는 표정이셨다.
“오, 진짜 그렇네. 홉스가 아이를 놓쳤군. 그건 전혀 생각을 못 했네!”
우리는 마주 보고 웃었다. 교수님은 아이가 없으셨다. 홉스도 알려진 바로는 아이가 없다.
그렇다. 아이는 타인의 열등함 때문에 웃는 게 아니라 타인의 존재 자체에 기뻐서 크게 웃는다.
(잠깐. 혹시 이모가 열등하게, 흉하게 생겨서 까르르 웃었던 건 아니겠지… 그럼 이 글 제목부터 바꿔야 하는데…)
아이라는 마법
내 아이들은 아침마다 행하는 의식처럼 엄마를 찾아와 한참을 안겨 있는다.
이른 아침 부엌에 있을 때, 잠에서 깨자마자 제일 먼저 엄마 품으로 오겠다고 제대로 뜨지도 못한 눈으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넘어지며 작은 발로 다다다다 달려와 포옥 안기는 아이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행복을 넘어 감동이다.
작고 부드러운 몸을 꼭 안으면 따뜻한 햇살이 전신에 끼얹어지는 느낌이다.
아이들이 하루도 빼먹지 않고 엄마한테 주는 고마운 선물.
조그만 아이가 나에게 달려와 착 안길 때의 느낌이 있다.
겉으로 느껴지는 말랑말랑 부드럽고 따뜻한 촉감과 안에서 환하게 피어나는 행복감.
나는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에게 엄마를 안아달라고 한다.
똑같은 주문에 남편은 이 여자가 뭘 잘못 먹었나 하는 얼굴로 나를 살피지만, 아이들은 다행히 엄마를 내치지 않고 자기들이 노느라 바쁜 와중에도 “오케이!”하면서 뛰어와 엄마를 꼭 안아주곤 한다.
아이를 키우며 곁에서 보니, 아이들은 참 신기한 존재다.
그들에게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아이들이 “축하해요!”라고 하면 그 말에 어떤 마법의 힘이 있는 것 같이 마음이 따뜻해진다.
길을 지나다 모르는 아이가 나에게 환하게 웃어주기라도 할 땐 으아아 내 안에 눈부신 LED 전구가 켜지는 느낌이다.
아이가 그 작은 손을 움직여 엄마를 꼬옥 안아줄 때, 엄마 등을 토닥토닥해 줄 때의 그 느낌은 도저히 말로 설명할 재간이 없다.
아이들은 분명 엄마의 에너지를 쭉쭉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존재들이지만, 아무 근심 없이 행복한 그 녀석들의 조그만 눈코입과 통통한 볼을 보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마음이 풀어지고 에너지가 생겨난다. 그것도 피톤치드 저리 가라 할 아주 좋은 느낌의 에너지가.
내가 방전된 상태로 호박엿처럼 땅에 들러붙어 있을 때에도 아이들에게는 나를 일으키는 마법의 힘이 있다.
작은아이가 공손하게 두 손 모으고 수줍게 먹을 것을 찾으러 걸어오는 모습을 보면 일어나 달걀이라도 부쳐야겠다는 수퍼 쿠킹 파워가 샘솟고, 누워 있는 내 얼굴에다 또록또록한 눈을 부딪힐 듯이 들이미는 (personal distance 따위 없다) 큰아이 얼굴을 마주하면 와생동물의 이 편안함을 포기하고 이제 직립보행의 수고로움을 해야 할 때구나, 척추가 알아서 기립한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어둠 속에서 작은 손이 다가와 더듬어 내 손을 찾더니 깍지를 꼬옥 끼고 잠을 청한다.
나도 아이의 손을 쥐고 잠을 청한다.
아이의 자그마한 손이 주는 놀라운 충만감이 있다.
작고 따뜻한 새 한 마리가 내 손에 있는 느낌. 그리고 온 우주가 나와 연결된 것 같은 따뜻한 느낌.
어둠 속에서 아이의 손을 잡고 있는 시간은 그래서 마법에 걸려있는 시간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다 그 손이 꼼지락대면서 내 손을 벗어나 “엄마 눈!” 하며 내 눈을 후비기 시작하면 그 마법은 곧 끝이 나고 말지만.
사랑스러움의 힘
아이들은 엄마를 지옥의 개드래곤으로 만드는 능력도 탁월하지만, 엄마를 흐물흐물 녹이는 능력도 뛰어나다.
아이들은 귀엽고 사랑스럽다. 대체로.
둘째가 아직 없던 시절, 첫째가 한 살 반쯤 되었을 때다.
지음아, 엄마 너무 졸려서 잘래.
그랬더니 자기가 생각하기에 잘 때 필요한 것들을 주섬주섬 챙겨 준다.
자장가가 나오는 빔 프로젝터를 틀어주고, 안고 자라고 곰돌이 인형도 주고, 아빠가 즐겨하는 수면 안대도 눈 위에 놓아준다. 살짝 안대를 들어보니 엄마를 쳐다보며 빙구 웃음을 짓고 있다.
그리고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옆에서 암막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고 (feat. 눈이 멀 것 같은 햇빛) 팡파르가 빰빠바빰빰 나오는 마이크를 들어 버튼을 계속 누르며 (오 마이 고막) 창 너머로 바깥 구경을 하기 시작했다. 허허허 이것 참 자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하지만 그렇게 바깥을 바라보는 조그만 아이의 뒷모습은 참 귀여웠다.
얼마 전에는 둘째가 방울토마토가 먹고 싶다고 해서 네 개 남은 것을 씻어 주었더니 홀랑홀랑 입에 넣는다.
엄마 하나도 안 주고 이음이가 혼자 다 먹었어? 했더니 저런, 엄마가 못 먹어서 너무 안 됐다는 표정으로 입에 있던 걸 손가락으로 꺼내려고 한다.
어후, 넣어 둬 넣어 둬, 엄마는 괜찮아.
아이들은 꽃병에 든 꽃의 꽃잎이 떨어졌다고 풀을 들고 와서 엄마한테 고쳐달라고 하고, 글을 쓰고 있으면 옆에 와서 장난감 사과 반쪽을 접시에 담아 내민다. 엄마 배고파?
두 살 무렵 첫째의 절친은 지하 세탁실에 있는 세탁기였고, 비슷한 시기에 둘째는 남의 집 담장에 귀엽게 앉아있는 코끼리가 절친이었다.
엄마, 저기 에-펀(elefant)이 있어. 코끼이야 안녕! 오가는 길에 매일 안부를 묻고 매일마다 애절한 이별을 했다.
하루는 어쩐 일인지 현관 앞 바닥에 날벌레가 하나 죽어 있었다. 죽은 줄도 모르고 아이가 “이리 와~ 이음이한테 와~”하고 다정하게 부르는데 어이쿠, 엄마는 이순신 장군에 빙의하여 아이에게 벌레의 죽음을 알리지 않느라 몹시 힘들었다.
아이들은 세상 만물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다.
세탁기와도 친한 친구가 될 수 있고, 나뭇잎이 떨어지면 나무가 아프지 않냐고 묻는다.
아이들의 마법의 힘은 아마 그런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랑의 마음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다.
아이가 부리는 또 다른 마법
존재 자체의 사랑스러움이 아닌, 그들이 갖는 또 다른 마법 같은 힘이 더 있다.
바로 어른들에게 부리는 마법.
루모스 (Lumos, 작은 불을 켜는 마법)
어른들은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그것도 여러 종류의 가면을 준비해 두고, 인벤토리에서 적절한 아이템을 꺼내 장착하듯이 상황에 맞게 쓱 꺼내어 쓴다.
하지만 아이들은 민낯 그대로 환하게 웃고 엉엉 울고 찡그리고 미소 지으며 산다.
슬퍼. 행복해. 두려워.
어른인 나는 슬픔, 행복, 두려움, 이런 단어를 입 밖으로 잘 내어 쓰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기감정에 충실하게 내뱉는 단어에는 힘이 있고 울림이 있다.
엄마에게는 아이들이 뱉어놓은 그 단어들을 한 음절 한 음절 마음으로 만져가며 그 울림을 만끽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머릿속에 전구 하나가 깜빡깜빡 켜지는 느낌이다.
그래, 이런 단어가 있었지.
나는 왜 안 쓰고 있을까.
알로호모라 (Alohomora, 잠금해제 마법)
아이들 유치원에는 작은 언덕이 있다.
우리 아이들은 그곳에서 깔깔거리며 데굴데굴 굴러내려오는 걸 좋아한다.
겨울에는 그 작은 경사에서 온 유치원 아이들이 썰매를 타느라 난리다.
신난다 데굴데굴
그래서 우리 아이들은 밖에서도 잔디언덕이 보이면, 일단 구른다.
가끔 나도 같이 구른다.
아이들과 데굴데굴 언덕을 굴러 내려오면, 재밌다.
구름이 송송 박힌 하늘이 보였다가, 민들레가 알알이 박힌 잔디가 보였다가, 앞서 굴러내려간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가.
혼자 까르르 웃으며 데굴데굴 언덕을 굴러내려오는 중년의 여자를 상상해 보라.
아이들과 구르면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는 엄마가 되지만, 혼자 구르면 거 참 정신세계가 걱정되는 독특한 여성이 되는 법.
이 재밌는 걸, 우리는 나이 좀 들었다고 못하게 됐다.
가끔 놀이터나 놀이동산에 가면 아이들보다 더 신나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노는 아빠들을 본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아이들과 놀아주는 게 아니라, 자신이 신나서 뛰어노는 중이다.
그간 못 놀았던 어른이, 아이들의 힘을 빌려 그렇게 즐겁게 뛰어노는 것이다.
익스펠리아무스 (Expelliarmus, 상대방을 무장 해제시키는 마법)
첫 아이를 낳고 두려웠다.
이렇게 험한 세상에 이렇게 작고 연약한 존재를 낳아 놓았으니, 불안하고 두려웠다.
하지만 희한하다.
아이와 함께 있음으로 해서 나는 오히려 자유를 얻고 불안을 없애는 경험을 종종 한다.
아직 미국에 살고 있을 때의 이야기다.
저녁을 먹고 아이와 산책을 나왔다. 아이가 이리로도 가자 저리로도 가자 해서 다니다, 어느 골목에서 만난 고양이에게 홀라당 정신을 빼앗겼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 도심의 밤길.
갑자기 훅 겁이 나고 무서웠다.
하지만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아이와 조그맣게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이러면 꽤 안전하지 않을까?
밤길을 혼자 걷는 여성과, 아장거리는 아이 손을 잡고 걷는 여성.
둘 다 경험해 본 바, 후자 쪽이 왠지 덜 불안하게 느껴졌다. 아이 손을 잡고 걷는 엄마에게는 왠지 해코지를 할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아 물론 제대로 정신이 박힌 사람이면, 아니 정신이 안 박힌 사람이라도 일단 타인에게 해코지를 하면 안 되는 법이다!!!)
나는 그렇게 아장아장 걷는 한 살 반 짜리 아이에게 보호를 받으며 집에 무사히 귀가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늘 부모가 무한히 베푸는 관계가 아니다.
참 많은 것을 받고(그중 으뜸은 아이들이 엄마 아빠에게 주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많은 기회를 얻고, 저 멀리 묻어 둔 유년기를 다시 사는 듯한 느낌.
내가 당연히 여겨왔던 것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고, 나의 윤리관이 새로 정립되며, 잊었던 소중한 것들을 떠올리게 되고, 재미있었던 놀이와 좋아하던 동화들이 다시 빛을 얻어 떠오르는 시간이자,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부여받는 일, 그리고 때로는 그 작디작은 손에서 위로받고 보호받는 일이다.
그렇게 병아리같이 연약한 아이들은 마법을 부린다.
우리의 웃음
아이들은 심호흡을 가르쳐 줬더니 그게 재미있다고 둘이서 낄낄대고, 유치원 지하에서 기계로 종이를 위이잉 자르는 소리가 재밌다며 한참을 깔깔거린다.
어제는 유치원에 아이를 데려다주러 갔더니 먼저 와 있던 아이의 절친 에릭이 내 아이와 나를 보고는 세상 반갑다는 얼굴로 뛰어와 까르르 웃는다.
삶의 곳곳에 순전한 웃음의 요소가 가득하고, 타인의 열등함 때문이 아니라 그 타인의 존재 자체에 기뻐서 크게 웃는다. 네가 온 것이 너무 기쁘고 너를 만난 것이 반가워서 저렇게 유리알처럼 맑은 웃음소리를 꺼내 놓는다.
어제 에릭을 보며 새삼 생각했다. 확실히 홉스는 어른의 입장에서만 웃음을 정의한 게 아닐까.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홉스의 정의가 소중한 것은 우리 어른들의 웃음이 많은 부분 얼마나 뒤틀린 일그러짐이 맞는가, 그것을 깨닫게 하는 게 아닐까.
사실 일부러 아껴놨지만, 홉스의 정의가 진정으로 빛을 발하는 것은 홉스가 웃음을 정의하는 단락의 마지막 부분이다.
홉스는 이런 웃음을 짓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에게서 최소한의 능력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 즉 자기가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들의 결점을 보고 흐뭇하게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홉스는 타인의 결점을 보고 크게 웃는 것은 자신이 비겁하다는 표시라고 한다. (And therefore much Laughter at the defects of others, is a sign of Pusillanimity.) 아, 이 멋있게 거침없는 양반.
그러므로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는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며,” 나보다 못한 사람과 비교하며 우월감과 흐뭇함을 느끼는 게 아니라 “자신을 가장 유능하고 뛰어난 사람들과 비교한다”고 한다.
(이쯤 되면 홉스는 성악설을 주장한 어둠의 자식이 아니라 공자님과 친구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웃음 하나에 참 많은 것이 담겨 있다.
순수하게 타인을 보고 기뻐하는 아이 같은 웃음소리를 더 이상 낼 수 없다면, 우리 어른들은 홉스의 웃음의 정의를 귀 기울여 듣고 세상의 일그러짐을 조금이라도 걷어내는 데 마음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경멸과 조소의 대상이 되어있는 사람들을 도와 그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고, 그리하여 아이들의 저런 예쁜 웃음소리가 더 오래 지속되도록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오늘 나는 어떤 일로 웃는지, 내 아이는 어떤 일로 웃는지 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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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참고로 미리 고백하자면 이 매거진의 다음 글은 ‘지독하게 말 안 들음에 관하여’다.
이번엔 본의 아니게 연애편지를 쓰고 말았지만 다음 글에서는 이 놈들을 대차게 깔 예정이다.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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