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설게 보기 1: 장자와 바닷새 이야기
첫째를 낳고 얼마 안 지난 어느 날. 남편이 말했다.
“당신이랑 아가랑 똑같이 생겼는데, 아가 얼굴 보다가 당신 얼굴 보니까 거인 같아.”
허허. 누가 할 소리.
남편이랑 비슷하게 생겼는데 눈도 코도 입도 훨씬 작아서 너무나 앙증맞고 예쁜 인간이 내 앞에 있다. 그 귀여운 사이즈에 익숙해져 있다가 남편의 커다란 얼굴이 갑자기 내 눈 앞에 확 들이닥칠 때면 나는 남몰래 화들짝 놀라곤 했다(남몰래 놀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간 남편을 볼 때 내 눈에 씌었던 콩깍지는 어느샌가 사라지고, 아이를 보는 눈에 찰떡처럼 들러붙어 있었다.
제 성격으로 말할 것 같으면..
나는 남이 힘든 꼴을 잘 못 보는 성격이다.
그래서 대체로 양보하고, 남을 시키기보단 내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살았다. 착해서 그런 게 아니라 습관 같은 거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괴롭고 불편했다. 엄마가 그런 성격이셔서 그냥 그렇게 보고 자란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며 이제는 남에게 뭔가 시키고 부탁하는 일이 많이 익숙해졌지만, 어쨌든 그동안 좀 그렇게 살아왔다.
나와 남편은 비슷한 점이 많지만 다른 점도 많다.
그중 하나는 설거지 거리를 견디는 능력이다. 나는 씻어야 할 그릇들이 쌓여있는 꼴을 보면 가슴에 뭔가 얹히는 느낌이고, 남편은 먹자마자 고무장갑을 끼는 내 꼴을 보면 먹은 게 얹히는 성격이다. 남편은 하루쯤 청소기를 돌리지 않아도 먼지가 그다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고, 나는 시력이 동태급임에도 불구하고 청소기를 돌리지 않으면 하루 종일 그 사실이 명치 끝에 걸리는 인간이다.
내 성격이지만 참 도움 안 되는 성격이다. 다른 사람이 도와줄 마음이 있어도 상대가 움직이기 전에 내가 발발거리며 움직여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때론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성격이다. 잘 알고 있다. (대학원 시절, 같이 쓰는 연구실을 청소할 때마다 당신 도대체 왜 그러는 거냐며 읽던 책을 덮고 체념한 얼굴로 일어나 물걸레를 가져오던 류모 조교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도 늘 허허 웃던 따뜻한 그는 목사님이 되었다.)
이 성격은 아이가 생기기 전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냥 이제껏 살아온 것처럼 내가 좀 움직이면 되는 거였다. 나는 미션이 하나씩 클리어 되는 그 느낌을 굉장히 좋아한다.
그런데 아이가 태어나고 내가 해야 할 일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자, 나의 이 성격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처럼 조용히 폭발의 에너지를 쌓아가기 시작했다. 미션은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일마다 내 일이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드는 인간, 그리고 그걸 빨리 끝내지 않으면 왠지 마음이 힘든 종류의 인간은, 아이를 낳고 나서 과로로 죽기 딱 좋다.
남편에게 도움을 청할 때마다 내 성격 때문에 조금씩 미안했다. (‘아니 왜 미안해. 같이 키우는 건데!’라고 스스로 생각은 하지만 시킬 땐 나도 모르게 미안해지는 성격.)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해 주면 고맙겠지만, 남편이라는 분들이 원래 모든 일을 마음에 들게 잘 알아서 해 주는 그런 분들이 아니시다. 일단 집안 어디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시고, 알려줘도 다음 날 또 물어보신다. 나도 내 선에서 최대한 도움을 청했고 남편은 정말 열심히 함께 헤쳐 나가려고 잠도 못 자고 노력했지만, 나는 못난 성격 때문에 스스로를 못 살게 굴고 있었다.
나는 점점 지쳐갔다.
셋이 된다는 것
둘이 있을 때는 하루하루가 평화롭고 행복했다. 셋이 있으면 더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랬다. 우리에게 온 이 작은 생명체가 너무나 귀여워서 집 안에 반짝거리는 행복의 입자가 떠다니는 것 같았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아기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아니었다.
셋이 된다는 것.
세 꼭짓점이 있어서 삼각형처럼 안정된 형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추가 기분 좋은 균형을 유지하던 저울에 하나의 추가 더해짐으로써 심하게 기울어버린 형태가 되고 있었다. 나는 아기에게 내 온 에너지를 쏟았고, 그래서 피곤했고, 남편은 그런 나에게 서운했고, 역시 피곤했다.
남편은 내가 이제 더 이상 자기를 챙겨주지 않는다며 섭섭해했다.
나는 섭섭했다.
이 전쟁 같은 나날들에 남편은 나를 도와주어야 할 유일한 어른이지, 내가 이 부족한 에너지로 챙겨줘야 할 또 다른 존재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에.
남편도 섭섭했다.
챙겨달라는 것은 뭘 해달라는 게 아니라 아기 얼굴만 보지 말고 자기 얼굴도 좀 보아 달라는 뜻이었는데.
그가 원했던 것은 그저 관심을 조금 주는 것뿐이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폭발할 것 같은 얼굴로 아이만 넘겨주고 “잠시만 쉴게,” 하고는 방에 휭하니 들어가 눕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이 ‘실과 바늘’이라고 부르던 사이좋은 우리는 그렇게 서서히 멀어졌다.
니체는 결혼생활을 “긴 대화”라고 했는데 우리는 짧은 대화마저 잘 나누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화의 단절 역시 니체가 말한 ‘긴 대화’의 일부분임을 잘 알고 있다.)
집 안에는 꽉 차 있던 행복의 입자 대신 피로와 무기력과 서운함이 조용히 떠돌았다.
바닷새 이야기
당시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나는 소에게 정성스럽게 맛있는 고기를 대접한 사자였다.
정성을 다해 만든 수프를, 목이 긴 호리병에 담아 여우에게 준 두루미였던 것이다.
그가 원했던 건 집안이 좀 어질러져 있어도 좋고 먹을 게 없어 라면을 끓여먹어도 좋으니, 내가 눈을 들어 그의 눈을 보아주는 것이었다. 얼굴을 보고 웃어주고 관심을 가져주고, 그러고 나서 뭘 좀 해달라고 말하면, 그는 너무나 기쁜 마음으로 해 줄 참이었다.
나는 그걸 몰랐다.
아기를 데리고 몸이 부서져라 집을 깨끗이 치우고 하나라도 따끈한 메뉴를 해 놓는 것, 그게 내 사랑의 표현 방법이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일을 더 해 놓으면 남편이 돌아와서 할 일이 줄어드니까.
몸이 피곤하니 얼굴이 다정할 리가 없었다. 챙겨달라니, 여기서 어떻게 뭘 더. 나는 힘든 와중에 최선을 다해 따끈한 저녁도 해 놓고 입을 옷들도 깨끗이 갈무리해 놓는데 나에게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알았다. 나는 노나라 임금이었다는 걸.
장자(莊子) <지락(至樂)> 편에 바닷새 이야기가 하나 있다.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노나라 임금은 바닷새가 사랑스러워 그를 기쁘게 해 주려고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바닷새는 그 행위들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기쁨을 그런 방식으로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내 방식으로 남편이 힘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내 몸이 힘들어도 내가 일을 좀 더 해 놓으면 남편이 할 일이 줄어드니 그가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편은 기쁘지 않았고, 오히려 더 힘들었다. 그는 몸이 힘든 건 상관없었고 마음이 힘들지 않기를 바랐다.
남편의 눈에 나는, 아무도 그러라고 한 적이 없는데 혼자 괜히 무리해서 지쳐 있다가 자기가 돌아올 시간쯤 되면 성실하게 짜증을 내는 미스테리한 타입의 인간이었을 것이다.
장자의 조언
이렇게 타인을 이해함에 있어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장자는 귀중한 조언을 남긴다.
바로 <인간세(人間世)> 편에 나오는, 수레를 바꿔 타보라는 조언이다.
마음으로 하여금 타자를 자신의 수레로 삼아 그것과 노닐 수 있도록 하고, ‘멈추려 해도 멈출 수 없는 것(不得已, 부득이)’에 의존해 중(中)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다.
장자는 타인이란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는 것’이므로 ‘타자라는 수레에 올라타 놀라’고 조언한다. 그러다 보면 ‘중(中)’이라는 개념이 생겨나는데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이다. 거 남의 차에 올라타 노는 게 뭐가 어렵겠나 싶지만, 장자의 말은 멈춰있는 차에 타라는 게 아니라 움직이는 수레, 그것도 내가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는 수레에 올라타라는 얘기다. 달리고 있는 자동차에 목숨 걸고 뛰어오르는 제임스 본드처럼. 비행기 위로도 폴짝폴짝 뛰는 탐 크루즈처럼.
나는 나 자신의 속도에 익숙해져 있다. 타인이라는 수레는 나보다 빠를 수도 있고, 느릴 수도 있다. 내 속도보다 빠른 경우든 느린 경우든 내 입장에서는 거기에 올라타는 순간 속도 차이 때문에 현기증을 느끼고 어지러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장자는 그걸 즐기라고 조언한다. 타인을 멈추려 하지 말고 타인의 속도에 익숙해지면서 새로운 균형감각(中)을 찾는 것. 그것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타인은 ‘부득이’한 존재라는 점을 유념하자. 타인은 내가 멈추려고 해도 멈출 수가 없는 존재다. 그렇다면 내가 그 속도에 맞춰 균형을 찾는 수밖에.
혹시 법륜스님 말씀을 종종 접했던 사람이라면, 부부간의 다툼에서 조언을 청할 때 스님께서 늘 하시는 말씀이 생각날지 모르겠다. “상대를 자꾸 고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이나 고치세요. 남을 고치는 건 어렵습니다. 생긴 대로 받아들일 수 있으면 받아들이고, 고칠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상대의 모습을 내 마음대로 그려놓고 왜 그림과 다르냐고 상대를 비난해서는 안 됩니다.”
이건 장자 이야기를 그대로 현실 상황에 대입해서 우리의 일상 언어로 해 주시는 조언이다. 철학이 낯설고 어려운 것 같아도 이렇게 알고 보면 다 우리 사는 얘기다.
그런데 나는 장자 할아버지의 조언을 따를 수가 없었다.
왜냐고? 내가 수레에 올라탄 것처럼 내 삶의 속도가 아찔하게 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 발 밑의 땅이, 내가 탄 수레가 페라리 스포츠카처럼 너무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나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일찍이 느껴보지 못한 그 속도감과 아찔함이 나를 어지럽게 했다. 내 수레가 내리막길을 가파르게 내려가고 있는데 옆에서 같이 내려가는 다른 수레로 올라타는 일은 스파이더맨 정도가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게 나는 내 삶의 속도 변화에 놀라 눈을 질끈 감아 버리느라, 남편이 타고 있는 수레에 올라타기는커녕 그 수레를 제대로 볼 수조차 없었다.
부득이에 의존해 중을 기르라는 조언을 따르자면, 내 수레의 속도에 내가 먼저 안정적으로 익숙해졌어야 했다.
첫째를 낳고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 내 수레는 둘째를 낳고서 롤러코스터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내가 내 수레의 속도에 조금씩 익숙해진 건 우리가 모두 독일로 옮긴 후였다.
고마워요, 어린이집
독일에 와서 처음으로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맡겼다. 미국에서는 좀 괜찮아 보이는 데이케어에 보내려면 비용이 엄청나서 맡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엄마들의 한 달 월급이 고스란히 데이케어 비용으로 가서 박히는 경우를 종종 목격했다. 독일에는 킨더 겔트(Kindergeld)라는 육아수당이 있었고(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만 18세까지 지급하니 성은이 망극하다), 남편이 다니는 연구소에는 아이들이 유치원에 다닐 경우 비용 절반을 부담해 주는 제도가 있었다. 아이가 3살이 될 때까지 부모의 육아휴직이 한 아이당 3년간 가능하고, 아이가 1 살이 되었는데도 어린이집에 자리가 없다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나라가 독일이다. 큰 아이는 세 살 무렵이라 바로 유치반인 킨더가튼(Kindergarten)에, 작은 아이는 유아반인 크리페(Krippe)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선 3주 정도 적응기간을 거쳐야 했다. 처음 일주일은 나와 아이가 함께 들어가서 30분에서 1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고, 다음 주에는 엄마가 같이 있다가 마지막 30분 정도 사라져 보는 것이다. 아이가 심하게 힘들어할 경우를 대비해 엄마는 어린이집 안의 다른 방에서 대기한다. 그렇게 점점 엄마와 같이 있는 시간을 줄이고 혼자 있을 수 있게 되면 적응이 잘 끝나는 것.
적응을 위해 어린이 집의 다른 방에 앉아 있던 짧은 시간에 나는 책 한 권을 탐욕스럽게 씹어 삼켰다. 30분이라는 조용한 시간이,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나만을 위해 존재하다니.
적응이 끝나 아이들이 8시 반부터 1시까지 다니기 시작한 첫날, 나는 아이들 없이 청소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었다. 아아. 내가 치운 자리에 물건들이 그대로 있어.
첫날 어찌나 신나서 바쁘게 움직였던지, 나는 집안을 깔끔하게 청소하고 색깔별로 빨래를 두 차례나 돌리고 아이들이 오면 먹일 간식과 저녁 준비까지 마치고는 그래도 남아있던 약 30분 정도의 시간에 감격했다. 30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다시 아이들을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야 했다.
되돌아보면 참 미련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던 나.
그리고.
여유가 생기니 그때 비로소 남편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닥치고 육아를 함께 해야 할 전우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남편이.
나 못지않게 아빠로서의 변신이 힘들었고, 그 많은 변화에 나만큼이나 당황하고 고뇌했을 그가.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가 이야기했듯 사람은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 제정신을 차릴 수 있고,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가 부르짖었듯 여자들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이 주어지자 나는 점차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자기만의 방까지는 아니어도 몇 시간 동안 혼자만의 집이 주어지는 것만으로 나는 빠르게 생기를 회복했다.
(집에 자기만의 방이 있는 여자들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아파트 광고를 봐도 여자들의 공간에 신경을 썼다며 자랑스럽게 내미는 것이 주로 부엌과 파우더룸, 드레스룸 정도인 건 왠지 서글프다. ‘남편의 서재’나 ‘아이방’은 왠지 익숙한데 엄마들의 방은 입에서조차 낯설다. 형편이 나아지면 우리 식구 모두는 자기만의 방을 갖기로 했다.)
어린이집이 준 자유 덕분에 나는 새로운 속도에서 새 균형을 찾았다.
그리고 이제 남편이 타고 있는 수레에 올라타 가끔씩 노닐어 보는 것이 가능한 단계까지 왔다.
집은 다시 조금씩 평화롭고 따뜻해졌다.
이제 남편을 대할 때 나는 애정과 관용과 체념의 중간쯤 어딘가에 서 있다.
나는 부득이(不得已)에 의존해 중(中)을 기른 것인가. 허허.
별책부록(?): 아빠로 변신하기
두 아들을 둔 육아 선배이자 아이들의 고모부께서 (6살, 8살 아이들을 데리고 공중에서 저글링 하시듯 놀아주시는 놀라운 분이시다) 그런 말씀을 하셨다.
여성들은 엄마가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신체적 변화를 겪으면서 서서히 엄마라는 역할에 자신을 맞추어 가는데 반해 남성들은 신체의 변화나 어떤 호르몬의 도움 없이 자의적으로, 의식적으로 아빠로 변신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는 듯하다고.
그 말을 들으니 남성들은 과연 어떤 순간에 아빠로의 변신을 체험하게 되는지 궁금해졌다.
남편에게 물었더니 내가 첫 아이를 낳고 사나흘 우울감 때문에 눈물을 흘렸듯, 자기도 비슷한 감정을 겪었다고 했다. 내가 아이를 낳고 회복하느라 병원에 있는 동안 텅 빈 집에서 혼자 밥을 먹으며, 내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불안감을 가슴 깊이 느꼈고 그때 아빠가 되었다는 것을 실감했다고. 이렇게 힘든 세상에 저렇게 약한 존재를 낳아놓고, 저 아이를 깊이 사랑하며 책임질 존재로서 갖게 되는 불안감 말이다.
<집으로 출근>이라는 귀엽고 따뜻하고 뭉클한 책을 세상에 내놓은 한 아빠는 임신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에 그런 감정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임신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에 여러 가지 의미로 세상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길 위의 모든 것이 위험한 듯 느껴졌고, 이제 더 이상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내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감정이었다. ‘지나왔던 내 생에 이토록 중요한 것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과 ‘내 남은 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 생겼구나’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다른 아빠들의 경험도 궁금했다. 아빠로서의 변신 모먼트랄까. 그런 건 언제일까.
페이스북에 질문을 올렸더니 다정한 지인들이 자신의 경험을 나누어 주었다.
보고 있자니 마음이 따뜻해져서 허락을 얻고 가져와 보았다.
J: 나이를 34개 먹도록 운전면허도 차도 없이 살다가, 첫 아이 출산 두 달 앞두고 만삭 진료와 늦은 밤 갑자기 닥칠 수 있는 출산 상황에 생각이 닿았는데요. 결국 일주일 여름휴가를 내고 매일 새벽 면허 학원을 다니며 실기며 주행을 했던 기억이 나네요. 대학생과 고교 졸업생들 틈에서 주행을 했더니 강사가 “음주로 취소된 면허 따시는 거냐”고 묻던 기억이.
J: 나도 차 운전하면서부터였던 듯. 생전 차 운전에 관심도 안 두고 귀찮아만 하다가, 애를 데리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에 구석에 처박아 뒀던 면허증 챙겨서 운전 연수받던 게 내가 아빠로서의 첫 자각이 아니었나 싶다.
K: 아빠가 되고 처음으로 얘들을 위해서 내가 몇 걸음이든 내 인생에서 물러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꿈이든 일이든 뭐든 간에… 그래서 저 스스로 많이 신기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H: 엄마의 호르몬에 의한 변화의 순간을 목도하면서 이성적으로 그리 느끼는 거지. “아 마누라가 저리 고생하는데… 내가 이래 살믄 안 되겠구나…” 뭐 그런. 그래도 출산의 순간에는 쬐끔 그런 거 (아빠로서의 자각) 있긴 하다. 남자는 눈 앞에 보여야 뭔가 깨닫는 하등 동물이라…
W: 아빠로서의 변신은 지금도 진행 중이지 않나 싶긴 한데, 가장 뭉클한 순간들을 꼽자면 먼저 아이들 탯줄을 끊어줄 때. 눈물이 찔끔 나더라고요. 아, 이제 이 아이들이 독립된 인격체가 되는 것이 나의 손에 맡겨졌구나. 그땐 책임감 반 기대감 반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한 번은 첫째가 세 살쯤에 너무 힘들어서 혼자 멍하니 있었는데, 아이가 아무 말 없이 와서 안아주더라고요. 아빠가 되어 누리는 특권 같은 행복을 느낀 것 같았습니다. 둘째도 제가 요새 저녁에 늦게 집에서 일하고 있으면 가끔 고맙다고 절 안아줍니다. 아빠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잘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애들 아빠보단 와이프의 남편이 되는 걸 우선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지금이야 애들이 커서 말은 듣지만, 두 놈 다 어리고 그럴 때 일이라는 명분으로 와이프 혼자 육아 전쟁에 두었던 게 많이 미안했어요. 그땐 아빠는 인내해야 한다는 걸 배운 것 같습니다.
돌이켜보면 아빠라고 자각한다는 건 하나씩 배워가는 훈련과정 같습니다. 실패와 상이 공존하는.
J: 엄마든 아빠든 인간은 본능에 지배당하거나 강제되지 않는 존재라, 전적으로 자기 의지의 발현을 통해 육아에 기여한다고 본다. 엄마와는 몸이 다르다는 핑계 내지 변명을 한다면 인간이 못난 것일 뿐. 나는 육아에 남녀, 엄마 아빠의 유불리가 존재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본다.
S: 아이가 아파서 밤에 응급실 다녀오고 조금 느낌이 달라졌던 기억이 납니다. 늦은 저녁 집에서 뛰놀다가 부딪혀 이마가 조금 찢어졌는데, 응급실에서 피 흘리며 아프다고 우는 아이에게 정작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어찌나 무력감이 절절하게 밀려오던지… 응급실 다녀오신 분들은 알겠지만 대기 시간은 또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지. 겨우 순서 기다려 처치받는 동안 아프다고 막 자지러지는데 그냥 잘 견디라고 손만 잡아주고 달래주고 하는 수밖에 없어서 참.. 이게 부모의 심정이구나.. 하는 생각.
H: 제 경우에는 아기가 태어나서 어느 정도 클 때까지는 ‘내가 이 아이의 아빠니까 잘해줘야지, 와이프가 힘드니까, 이 아이가 아무것도 못하니까, 내 도움이 우리 가정에 필요하니까’라는 의무감이 더 컸어요. 내가 진짜 아빠고 이 아이가 정말 무작정 사랑스럽고 예쁘다는 건 머릿속으로만 갖고 있다가, 아이가 한 살 반에서 두 살 정도 되어 서로의 감정을 전달할 수 있고 진정으로 ‘같이’ 할 수 있게 되면서, 즉 함께 놀고 대화도 나누고 공유도 하고 상호작용도 하게 되면서 뭔가 특별한 유대감이나 아빠로서의 사랑이 생긴 것 같아요.
K: 난 애 신발 신겨줄 때요. 매번 외출할 때마다 무릎 꿇고 꼬깃꼬깃 애 발을 신에 넣는 게 여간 귀찮지 않더라는. 그러면서 참 부모가 된다는 건 이렇게 수고로움이 많은 거구나,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많아지는 거구나 하고 느꼈어요. 이건 어른이 되는 느낌이랑 비슷할 수도 있는데, 다만 남을 위한 수고를 해야 한다는 점에서 좀 느낌이 다르죠.
J: 아이가 과하게 고집부리거나 떼쓸 때, 때론 자기가 좋아하는 것에만 과도하게 집착할 때, 이게 지극히 당연하고 정상적임에도 보통 부모들은 우리 아이가 혹시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노심초사하잖아? 하는 일, 꿈 다 접고 베이비시터에게 더 이상 맡기지 말고 내가 전업으로 키울까 진짜 진지하게 고민이 들더라고 누나.
때때로 일이 쌓여 아가 보는 게 부담되기도 하지만 이 아이에겐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세상 전부일 텐데 하며 반성하기도 하고.
어린이집 하원 시키러 가면 아빠 발견하고 친구들 헤집고 아빠 아빠 하며 뛰어나오는 아이를 안으면 세상에 나의 다른 조건이 아니라 존재 자체만으로 좋아해 주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눈물도 글썽이게 되고.
Y: 저의 경우에는 아내가 많은 것을 포기하는 것을 옆에서 보았기 때문에 저도 몇 가지를 포기했습니다. 1) 아내는 육아 때문에 운동을 할 수 없기에 저도 스포츠를 포기했습니다. 훗날 육아가 끝날 때 같이 하기로 했습니다. 2) 아내는 육아 때문에 밤에 친구들과 만날 수 없기에 저도 항상 일찍 귀가합니다. 학교에서 회식이 있더라도 저녁만 먹고 집에 8시에 들어오려고 합니다. 3) 국제학술대회에 가면 집을 오래 비워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아내에게 많은 짐을 주기 때문에 국제학술대회를 과감히 포기했습니다. 아내가 육아를 더 많이 하지만, 이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함께 육아하니 이런 제 마음을 보고 아내가 흐뭇해합니다.
J: 큰 아이가 태어나고 병원에서 집에 오던 날 아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도대체 내가 이 아이를 위해 뭘 해 줄 수 있을까를 생각하다가 십수 년간 피웠던 담배를 끊었어요. 그 전에도 다른 이유로 몇 번 금연을 시도하다가 실패했는데 신기할 정도로 그땐 어렵지 않게 끊었고, 개인적으로는 그게 아빠가 된 것의 힘이 아닐까 생각해요.
S: 선배님 글 읽고 차근히 돌아봤어요. 언제였을까…
분만실 앞에서 아이의 첫 울음소리가 들리고, 간호사의 콜을 듣고 허겁지겁 분만실 안으로 들어갔는데, 장갑을 끼고 탯줄을 자르라고 하더라고요. 당황한 나머지 장갑 끼는 것도 제대로 못 하다가, 탯줄을 자르기는 했는데… 다시 밖으로 내쫓겨서 조금 기다리다 녹색 담요에 싸인 아이를 처음 안았을 때…도 물론 찌릿한 순간의 연속이었지만…
역시, 조리원에서 아기 목욕시키는 법을 배울 때가 떠오르네요.
한 손에 아이를 안고 조심스럽게 얼굴을 씻기고 옷을 입히는데… 조리원에 계신 선생님이 “아버님 그렇게 하시면 애기 손가락 부러져요.”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던 것 같아요.
‘옷을 입다가 손가락이 걸려서 뒤로 젖혀지면 손가락이 부러질 수도 있다고…?’
오 마이 갓… 그때 느꼈던 것 같아요.
아, 이 작은 생명을 내가 지켜야 하는구나…
아기들은 운전면허증 발급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자, 금연도 가능하게 하는 존재이며, 무력감과 행복감에 눈물 글썽이게 만드는 존재, 일도 학회도 꿈도 접을 수 있게 하는 존재로군요.
아기들만 쑥쑥 자라는 게 아니라 엄마도, 아빠도 함께 자라고 있는 것 같습니다. 🙂
같이 사랑하며 같이 힘내요.
- 작가: 이진민 / 제7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 대상 수상
미국서 두 아이를 낳아 현재 독일에서 거주 중. 철학을 일상의 말랑말랑한 언어로 풀어내는 일에 관심이 있습니다.
- 본 글은 이진민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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