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는 대로 삶이 되는 공간
초록 지붕 집의 아름다움
빨간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 앤에 대한 정확한 기억은 없다.
하지만 어린 시절 TV를 통해 접했던 빨간 머리 앤의 애니메이션 주제곡과 벚꽃이 흩날리는 오프닝 장면은 웬일인지 좀처럼 잊히지가 않는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럽다는 그녀에 대한 묘사가 어린 마음에도 큰 울림을 주었던 탓일까? 사실 노래 가사에 따른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의 앤’ 보다는 까만 머리카락을 양 옆으로 땋아 동그랗게 말아 올린 하얀 얼굴의 다이애나가 어린 마음에도 참 예뻐 보이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빨간 머리라는 간질간질 한 추억은 로망이라는 이름으로 마음 한편에 지금껏 자리 잡고 있었나 보다.
빨간 머리 앤 역의 에이미 베스 맥널티(Amybeth Mcnulty)는 그녀 자체로 ‘앤’이었다. 기차역에서 집으로 달려가는 마차와 흩날리는 벚꽃길 장면까지도 나의 오래된 추억을 되살리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앤 셜리가 초록 지붕 집으로 온 첫날, 문을 열고 그녀와 함께 내부로 들어간 나는, 시선이 머무는 집 안 곳곳의 아름다움에 온전히 매료되었다. 캐나다 시골 마을 애번리의 지극히 평범하고 소박하며 오히려 검소하기까지 한 초록 지붕 집 안의 모습은 어디 하나 모난 곳 없이 평온하고 조화로웠다. 커다란 나무판자들로 정갈하게 짜여있는 바닥은 자연광을 그대로 반사시켜 반짝이기까지 했다.
현재 나는 베를린에 살고 있고 꽤 연식 있는 집에 살고 있다. 그 연유로 우리 집의 바닥 또한 긴 나무판자들이 통으로 짜여 있는 식이다. 하지만 흘러온 세월만큼 나무판자의 사이사이는 케케묵은 먼지들이 잔뜩 들어차 있고 표면에 따로 왁스 칠을 하지도 못해서 광택을 잃은 지도 오래이다. 이에 비해 초록 지붕 집의 나무 바닥은 놀라울 만큼 매끈했고 깨끗했으며 윤기가 났다. 드라마 중간중간에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장면이 마릴라 커스버트의 바닥 청소 장면인데 어찌나 열과 성의를 다하여 바닥을 닦아 내는지 보는 내내 손목이 시큰거릴 정도였다.-한편으로는 카타르시스가 느껴지기도 했다.- 극 중 적어도 60년 남짓 살아온 집의 바닥재가 그 정도로 관리가 되어 왔다는 점은 가히 놀랄 만한 것이었다.
커다란 원목 식탁과 엔틱한 서랍 콘솔이 위치한 거실 풍경
앤 셜리가 커스버트 집안의 엄연한 가족이 된 후, 세 가족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는 벽난로 앞, 커다란 원목 식탁일 것이다.
특히 주방 쪽에서 바라보는 식당 겸 거실은 투박하면서도 고전적이고 심플하지만 섬세한 감성이 묻어나는 곳이다. 프랑스 자수로 수놓은 마릴라의 작품이 한쪽 벽면에 보기 좋게 액자로 걸려있는 동시에 다양한 모양의 원목 액자들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계단 뒤 쪽 벽 위에 차례로 위치한다. 또한 집 안 여기저기에 세워져 있는 투명한 기름등과 촛대들도 자칫 심심할 수 있는 공간을 아름답게 채워 주고 있다. 전기를 통상적으로 사용하지 않던 1900년대 초 시골 마을의 어둠을 밝혀 준 촛불과 투명한 기름 램프들은 그들에게는 그저 생활의 일부였겠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아날로그 무드의 멋스러움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앤이 직접 꺾은 벚꽃나무 가지는 무심한 듯 툭 유리병에 꽂혔다. 이는 앤을 무척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에 서툴었던 마릴라의 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일수록 억지로 애써서 포장하기 보다는,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담아내려는 그녀의 마음의 표현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세월을 품은 엔틱 한 서랍 콘솔과 의자, 주방 선반마다 잘 보관되어 있는 식재료들과 크기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있는 요리 도구들까지 마릴라가 어떻게 초록 지붕 집을 꾸려왔고 하루하루를 살아왔는지 고스란히 설명해 주고 있었다. 잔잔한 들꽃 같은 그녀는 결코 화려한 색상이나 요란한 패턴이 있는 옷을 입은 적이 없었다. 그녀가 직접 지어준 앤의 원피스를 보아도 가히 알 수 있다.-앤은 그런 마릴라의 패션 센스에 늘 불만이 있었다.- 이렇듯 식기류 또한 단색의 심플한 접시와 찻잔들이 주를 이루었지만 한쪽 벽면에 걸려있는 과하지 않는 꽃들이 새겨진 찻잔이며 접시들은 무뚝뚝해 보이는 마릴라의 이면에 숨어있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모습도 함께 보여주는 듯했다.
퀸스 대학 입학을 위해 초록 지붕 집을 떠나기 직전의 앤 셜리 커스버트
앤은 어느덧 대학을 갈 나이가 되었고 잠시 초록 지붕 집을 떠나게 된다.
시즌1에서 시즌3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점은 각 등장인물이 실제로 나이를 먹어가면서 자연스럽게 극 중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었다.- 가끔은 시즌1의 귀여운 앤이 그립기도 했지만- 한편 그 수많은 시간들과 사건들 속에서 앤의 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장면이 없다는 것이 퍽 아쉬웠다. 카메라 앵글을 이 끝에서 저 끝으로 한 바퀴 돌려보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를 정도로 말이다. 초록 지붕 집 2층 복도 끝 하얀 문을 열면 작지만 아늑한 그녀의 방이 나타난다.
문을 열자마자 정면으로 마주하는 창문은 앤이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듯하다. 창을 위로 한껏 밀어 올려 나무 조각을 창틀 가에 괴고, 몸의 반 이상을 창 밖으로 내민 채 벚나무, 하늘, 또는 날아다니는 새들과 친구 삼아 대화를 나누는 것이 앤의 소중한 일상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말린 갈대, 들꽃이며 솔방울, 하찮게 굴러다닐 법한 깃털들은 한데 엮여 침대 머리맡을 장식했다. 그리고 이교도로 미움받던 인디언 소녀가 선물로 준 머리끈 장식, 조세핀 고모님의 주최로 열린 예술가들의 파티-성소수자들이 대거 참여한 파티였다- 에서 가져온 화관은 눈에 잘 띄는 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이렇듯 앤은 자연을 사랑하고 편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대를 앞선 여인이었으며 그녀의 공간은 작지만 중요한 의미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공간은 살아가는 이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는 무한한 그릇과 같다.
낯선 베를린이란 땅에 정착하고, 아이를 키우는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살고 있는 ‘집’이란 공간이 의식주를 해결하는 곳 이상의 어떤 의미도 없는 무미건조한 장소가 되어버렸다. 언젠가 떠날 것이다, 이 집은 나와 평생 함께할 집이 아니다, 짐을 늘리지 말자, 벽에 못 질을 하지 말자, 최대한 있는 그대로 사용하자 등의 너무나 재미없고 정적인 생각들이 온통 나를 지배해왔다. 여느 독일 친구들 집처럼 예쁘게 꾸미고 살아가는 것은 물질적으로 혹은 마음으로 여유 있는 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올해 어쩔 수 없이 집에 있을 시간이 늘어나면서 내 생각은 180도 뒤집혀버렸다.
하루를 살아도 어느 한 켠, 시선이 머물 수 있는 아름다운 집에 살고 싶다는 마음의 소리가 내면에 강하게 울려 퍼졌다. 집 내부의 구조를 바꾸고 몇 가지 가구를 구입했다. 평소와 달리 필수품이 아닌 것들로 공간을 채워보았다. 창가에는 초록 식물들과 나무로 만든 쟁반, 예쁜 초들을 괜히 올려놓았다.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작은 책상을 들여놓고 방 모서리에 놓여있는 작은 서랍장 위에 아이보리 색 천을 깔아 보기도 했다. 라탄으로 만든 바구니들을 있는 대로 사모아서 화분을 넣거나 작은 물건들을 담아 장식했다. 실제로 사용하지도 않을 빈티지한 물뿌리개며, 다양한 화병들을 선반이나 서랍장 위에 전시하고 드라이플라워들을 꽂아보았다. 오래도록 방치했던 작은 발코니에는 나무 타일로 바닥을 채워 넣고는 그냥 그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기도 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숨이 탁 트이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왜 진즉 이렇게 하지 못했나 싶을 정도로.
살아가는 이의 생각을 담기에 공간의 크기는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져야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주 작은 화분이나 라탄 바구니 또는 양초 하나가 내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 주었다. 잠시라도 기분 좋게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이 집 한편에 주어진 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쾌감과 감동이 있었다.
누구나 빨간 머리 앤의 초록 지붕 집 곳곳에 숨겨있는 그들의 삶과 생각을 읽게 된다면, 당장 움직여보라. 세상에 우연히, 괜히, 그냥이라는 것은 없다.
소소하지만 우리의 삶이 녹아든 각자의 초록 지붕 집을 만들어 간다면, 한정된 공간 속 갇혀 지내야만 하는 이 힘든 시간조차도 거뜬히 이겨 낼 힘을 얻게 될 것이라 믿는다.
- 작가: KIRIMI/KiRiMi 일러스트레이터
베를린에서 살아가는 삶 –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득 영감을 받아 무작정 기록해보는 진솔한 이야기. - 본 글은 KIRIMI 작가님께서 브런치에 올리신 글을 동의하에 옮겨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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